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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중진미 Nov 11. 2022

단풍 찾아 삼만 리, 그러나 돌고 돌아 동네 단풍!

[문음미체 일상] 파랑새가 어디 멀리 있던가?

설악산 단풍도 아니더라. 내장산 단풍도 아니더라. 순창 강천사 단풍은 더 아니더라. 계절이 계절인지라 조선 팔도 단풍놀이를 다녀봤지만, 결국은 우리 동네 불곡산 단풍이야말로 천하제일임을 뒤늦게 알았다. 파랑새를 찾아다니던 치르치르가 곧 나였음을 알고는 허공으로 썩은 미소를 한 방 날렸던 이야기.   

  

그저께, 가는 세월 붙잡을 수 없어 김밥 하나 사서는 불곡산(佛谷山)으로 향했더랬다.

    

~지금 나와 어디든 가자

지루한 하루 여기까지만 All Stop

작은 가방 운동화 챙겨~~   

  

흥얼흥얼 탄천을 건너 서울시니어스타워 쪽으로 산길을 올라가면, 바로 불곡산 초입이다. 기온이 섭씨 13도, 산행하기에 최적의 온도이다. 양손에 스틱을 잡고 한 발 두 발 느긋하게 오른다. 급할 게 없는 백수의 산행이다. 저만치 대광사의 지붕 한 모서리가 보인다. 계단엔 국화 화분이 가득하다. 아마 모두가 시주 화분들일 터. ‘황후화(皇后花)라는 중국 영화가 있었다. 거대한 궁궐 계단을 송곳 하나 꽂을 데 없이 빼곡하게 채워놓은 황국화들! 장이우머 감독의 황금빛 미장센에 엄청난 시각적 호사를 그때 즐겼던가? 대광사에는 동양 최대의 미륵불이 모셔져 있어 중생들의 눈길을 끈다. 사실 천태종은 장엄하고 웅장한 것으로 알아준다. 일전에 대웅전에서 뵌 미륵불은 정말 상상을 초월한 규모였다.      


이쪽 길은 산행 초보자에겐 최적의 코스이다. 이마트 쪽에서 오르면 경사가 심하고, 바위가 곳곳에 포진하고 있어 아주 힘이 든다. 또 하나 이쪽으로 오르면 좋은 점이 있는 게, 전망대에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이다. 산불 예방을 위한 초소인데, 분당 시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어 바라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어디 재미뿐인가? 오늘은 불곡산이 말 그대로 주황빛으로 훨훨 타오르고 있는 걸 목격할 수 있었다.   

   

‘만학천봉(萬壑千峯)이 한바탕 흐드러지게 웃는 듯, 산색(山色)은 붉은 대로 붉었다. 자세히 보니, 홍(紅)만도 아니었다. 청(靑)이 있고, 녹(錄)이 있고, 황(黃)이 있고, 등(橙)이 있고, 이를테면 산 전체가 무지개와 같이 복잡한 색소로 구성되었으면서, 얼른 보기에 주홍(朱紅)만으로 보이는 것은 스펙트럼의 조화던가?’  

   

그 유명한 ’산정무한‘의 화려한 표현에는 할 말을 잃었지만, 어쨌든 계곡은 물론이고 능선이란 능선은 모두가 단풍 천지이다. 이런 황홀한 지경인데 설악이나 내장산보다 못할 게 뭐람? 우리 집에서 도보로 고작 1시간 남짓한 거리에서 굽어보는 저 단풍잎들! 단풍 품평회라도 있다면 단연코 일등이다. 그 어딜 내놓아도 손색이 없겠다. 오늘 그야말로 단풍 재물로 횡재했다.


학창 시절, 그냥 좋아 무턱대고 외웠던 문장들이 옛 추억과 함께 새록새록 떠오른다.  

    

‘불의(不意)의 신화(神火)에 이 봉 저 봉이 송두리째 붉게 타고 있는 것일까?

우러러보는 단풍이 새색시 머리의 칠보단장(七寶丹粧) 같다면, 굽어보는 단풍은 치렁치렁 늘어진 규수의 붉은 치마폭 같다고나 할까. 수줍어 수줍어 생글 돌아서는 낯 붉힌 아가씨가 어느 구석에서 금방 튀어나올 것도 같구나!’     


흐흐, 그렇담 또 횡재하는 거지.     

저기 롯데타워도 보인다. 청계산, 관악산, 광교산은 물론이고, 멀리는 북한산도 가물가물하게 시야에 들어온다. 초소 근무자는 온종일 이곳에서 꼼짝을 않고 경계를 선다고 한다. 한 평 남짓 공간에서 매의 눈으로 동서남북을 훑고 계시니 산불 예방은 확실하리라. 얼마간 잡담을 나누고 나니 방문일지에 서명을 부탁한다. 아, 이런 데는 엄격 근엄 진지한 궁서체가 제격인데, 하며 정자로 이름을 써봤다. 곧이어 수고하시라는 인사를 건넨 후 내려왔다.      


이번 산행의 목적이 단풍 구경에 있다면 이제 더 이상 할 게 없다. 정상의 표지석이나 한번 쓰담 쓰담하고 나서 하산해야겠다. 참, 김밥은 먹고 가야지. 배낭에 든 것들을 끄집어내 놓으니,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핫한 믹스커피가 하나 나온다. 연이어 초콜릿 한 통, 감 한 조각도 덩달아 나온다. 김밥과 함께 샀던 만두도 있고 캔 맥주도 하나 있다. 그리고 식수 한 통!

이건 뭐, 누가 봐도 산에 먹으러 온 게 분명했다. 하지만 더 분명한 것은 시각의 즐거움은 미각의 즐거움과 함께해야 시너지가 커진다는 것.     

 

애써 멀리 가 단풍놀이를 한 후 기진맥진 집으로 오는데, 아파트 현관 앞 단풍나무가 붉디붉은 모습으로 반겨주고 있었다. 아! 감탄의 소리가 절로 나왔다고 어느 지인이 말했던가.   

그래서 그날 부처님 ‘불(佛)’자 쓰는 불곡산(佛谷山)에 올라 생각해봤더랬다.

파랑새는 멀리 있지 않고 우리 곁에 있듯이 사람도 이웃사촌이 제일이고, 단풍도 동네 산이 최고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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