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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뚜로루디 Sep 11. 2022

누군가 갑자기 모든 것을 정리하려 든다면



유서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한 지 한 달이 지났다. 막연히 죽어야겠다 생각하는 단계는 애저녁에 지났고 죽어 있는 내 모습을 곳곳에서 머릿속 환영처럼 보기 시작했을 때부터 나의 삶은 약으로 이어나가는 연명에 더 가까웠다. 누가 계획에 살고 계획에 죽는 사람 아니랄까봐 나는 5년 전 어느 날 메모장에 써 놓았던 '신변정리' 라는 제목의 글을 꺼내 보았다. 5년 전의 나는 검색 기록이나 방문 사이트 같은 기록들이나, SNS 게시글들을 정리하고 아이디 구글링을 통해 나온 관련 게시글을 구글 측에 삭제 요청을 하는 걸 추천했다. 유치원 때부터 모은 수많은 일기장들과 플래너들을 몽땅 쏟아내 우울증 진단을 받은 순간부터 다 읽어보고, 가족들이 보지 않았으면 하는 부분은 폐기하는 것을 원했다. 2022년의 나는 여기에 덧붙여 장례식 방법이나 지인들에게 돌릴 부고 문자 양식, 유언장 작성과 계좌 및 비밀번호 등등을 추가했다. 보안상 노트북에 저장하는 것보다는 손으로 쓴 것을 간직하는 것이 더 도움이 될 것 같아, 집에 있는 예쁜 노트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원래 가지고 있던 일기장을 쓰는 것보다는 죽음을 주제로 깔끔하게 정리한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가장 막막한 부부이 바로 물건 정리이다. 나는 쪽지 하나도 제대로 못 버리는 맥시멀리스트다. 배냇저고리와 신생아 때 덮던 이불이 아직도 있고, 몇 년 동안 모은 영화 팜플렛은 좁은 집으로 이사를 하며 버리고 버려도 리빙 박스 하나를 가득 차지했다. 버려도 이 정도인데 점점 또 무언가를 사면서 짐이 늘어나고 있다. 새 것과 오래된 것을 구분하고, 오래된 것들 중 내 손으로 버려도 되는 것들은 미리 버리는 게 좋을 것 같다. 짧은 시간 내 이사를 두 번이나 치른 탓에 버릴 만한 물건이 남아 있는지가 의문이긴 하지만. 하여튼 내가 세상에 없으면 이 지독한 맥시멀리스트의 지독한 물건들을 치우는 것은 결국 부모님의 몫이기에, 조금이라도 힘들게 하고 싶지 않다. 조금이라도 내가 해 두는 것이 나을 것 같다. 


너무 우울할 때는 정말 저렴한 가격의 이상한 택배들, 그러니까 인형 옷 같은 것들이나 쓸모도 없는 공구 같은 것들을 사기도 했다. 해외 우편 배송이라 평균 한 달 정도가 걸리곤 했는데 그걸 기다리는 동안 나는 살아 있어야 하는 것이다. 도착한 우편물을 열어보고 새 무언가를 가졌다는 잠깐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 기쁨의 순간은 잠깐이지만 어쨌든 그것이 언제 도착할지 몰라 택배나 우편을 기다리며 살아 있는 시간이 존재하게 된다. 내 나름의 살아남는 방법이었지만 이제는 그것도 그렇게 통하지 않는 것 같다. 내가 죽어 사라져 없을 때 부모님이 택배를 받게 된다면? 그런 감정을 굳이 느끼게 하고 싶지 않다. 더군다나 작은 것들을 산다 해도 어쨌든 돈이기 때문에, 결국 내가 남길 돈을 까먹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소비. 아침에 일어나서도 습관적으로 쇼핑 사이트를 둘러보던 나였지만, 이제 정말 무언가를 사는 것은 포기하기로 했다. 앞으로 올 택배들을 전부 수령하려면 11월은 되어야 하는데, 그 때까지 나는 과연 잘 살아 있을까. 


유서를 한 달 내내 써야 한다는 생각만 하고 정작 실천에 옮기지 않은 건, 역설적이게도 그렇게 하는 순간 정말 죽어야만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눈 뜨는 순간부터 감는 순간까지 내내 누워 있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기력도 한몫 했다. 언젠가는 이런 생각이 사라지겠지, 생각도 했으나 마치 불로 지진 낙인처럼 '유서를 써야 한다' 는 강박을 한 달 내내 가지고 살아온 결과, 그냥 마음 편하게 천천히 준비하는 게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부담 가지지 말고, 천천히. 



하필 이 글을 쓸 당시 추석이었던 오늘은 세계 자살 예방의 날이기도 했다. 아이러니하다. 나는 내가 죽으면 많은 사람들이 큰 타격을 받지 않았으면 한다. 그러니까, 죽은 지 이십 년쯤 된 사람을 추억하듯, 처음부터 그렇게 나의 죽음을 큰 사건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한다. 15년을 함께한 강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 나는 정말로 죽을 것만 같았지만 3년이 지난 지금은 보고 싶어도 어쩄든 그애에 관한 일화들은 웃으며 말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가끔 너무 그리울 때면 울기도 하지만. 나는 내 부모님을 포함한 모든 지인들이 딱 그만큼만 속상해 했으면 좋겠다. 울며불며 장례식장을 오거나 애매한 사이라 쭈뼛거리는 것이 아니라, 애매한 사이면 부조금도 안 내도 되고, 그냥 오고 싶은 사람들만 와서 파티를 하듯 서로 모여 이야기하고. 내가 미리 적어둔 장례식장 플레이리스트를 들으면서 쟤는 죽어서까지도 자기가 좋아하는 뮤지션 영업을 하려 든다는 그런 농담도 하고. 내가 싫어하는 사람은 아예 그냥 오지 말라고 대못 박아버리기도 했으면 하고. 


그러니까 나는 십삼 년 동안 우울증으로 고생했고 나도 통제하기 힘들 정도에 접어들었으니, 그냥 루디는 그럴 만 했어, 하는 정도로 받아들이고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각자의 삶을 이어나가길 바라는 것이다. 


어렵다. 

어려워.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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