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으려 들면 세상은 귀신같이 안다.
그런 날이 있다. 기본값 상태의 우울감에서 점점 내려가고 또 내려가다가, 결국 바닥을 찍고 아주 오랫동안 올라오지 못한 채 가라앉아 있다 보면 찾아오고야 마는 날. 그간 생각만 해오던 것을 실행에 옮겨야겠구나, 나는 정말 이 세상을 떠야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 때. 언제는 안 그랬겠냐만 그런 날은 유독 발걸음 하나 옮기는 것도 부질없고 힘든데다 버스라도 타는 날이면 죽고 싶어지고, 들어가야 할 회의를 앞두고 바로 그 자리에서 뛰어내리거나 목을 매달고 싶다. . 나는 분명히 해야 할 일을 위해 움직이고 있는데 끊임없이 초점이 사라지고 의식은 저 너머를 맴돈다. 머리가 너무 아파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잠이라도 청하려 하면 도무지 잘 수가 없고, 그 와중에 눈을 뜨고 감는 그 짧은 순간에도 지옥과 현실을 오간다. 어떤 형태로든 눈 감고 있는 것이 그나마 낫다는 걸 깨달았을 때 다시 한 번 다짐한다. 오늘 죽어야겠다. 그제는 몇 달만에 겨우 울 수 있었고 어제는 너무 힘들어서 어쩔 수 없이 또 울었고 오늘은 어떻게 울어야 할지 몰라서 안 울었다. 제때 울고 제때 울지 않는 것조차도 도무지 방법을 모르겠으니 이만 죽어야겠다.
이런 세상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이니 괜히 타인들에게 관대해지기도 한다. 편의점에 들러 산 1+1 제품 중 하나를 직원분께 드리기도 하고, 자리도 양보하고. 만나는 사람이 있다면 안 그래도 조심하던 말에 쿠션이 더 깔린다. 평소에는 주지도 못했던 선물을 생일 축하한다며, 취업 축하한다며, 그동안 못 챙겨줘 미안하다며 여기저기 주고 다닌다. 마지막 날이니 그냥 잘 해주는 걸까, 아니면 더 이상의 업보를 쌓기 싫어 그런 걸까. 끌려가는 세계가 어디든 간에 지옥을 눈에 앞두고 그나마 마지막 날까지 선의를 베풀었노라 주장하는 알량한 변호를 해보다 결국 지옥으로 떨어지는 상상을 해본다. 모든 종교에서 자살은 어쨌든 죄악이니. 종교는 윤리와 도덕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전세계적 공통 수단이라는 주장을 가진 무신론자도 이런 생각을 한다. 다시 태어나는 것이든 영원한 고통이든 더 아프기는 싫으니까.
그리고 그런 날들은 이상하게도 어디서 자살방지위원회라도 출동한 듯,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살리고야 말겠다는 것처럼 군다. 지구 반대편에 사는 친구는 구해서 전달하기도 어려운 한국 기프티콘을 사서 보내주고, 들어간 가게에서는 유달리 친절한 직원이 오랜 친구처럼 나를 맞이하더니 나중에는 조용히 선물 하나를 쇼핑백에 넣어준다. 만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굉장히 호의적이고 시장에서는 가게 주인분들이 날 딸처럼, 동생처럼 대하며 한두 마디 붙이다가 좋은 물건을 골라준다. 기대하지도 않았던 커피 한 잔을 누군가 쥐어주고, 집으로 가는 버스 기사님은 승객 한 명 한 명에게 진심을 담아 '어서오세요' '안녕히 가세요' 를 외친다. 장을 보고 왔다던 아는 언니는 천혜향 다섯 개가 들어 있는 봉지에서 세 개를 꺼내 노트북 위로 와르르 놓아준다. 평소 인사만 가볍게 해오던 동생은 문득 내 생각이 났다며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 기념품을 여러 개 모아와서 건네더니 총총 가버린다. 오래된 친구는 느닷없이 선물을 샀다며 만나자는 연락을 한다. 집으로 가는 길 마주친 이웃집 마당개는 평소와 달리 나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하얀 속눈썹이 있는 갈색 눈으로 오랫동안. 그러다 냄새를 맡더니 평소보다 더 오랜 시간 동안 재롱을 피운다. 할 줄 아는 재주란 재주는 싫증내지 않고 다 보여준다. 가는 길까지 멀찍이서 웃는 표정으로 지켜보며 배웅한다. 그리고 자기 전 떠오른다. 오늘 탑승한 모든 버스와 지하철에서는 서 있는 일이 없었다는 걸. 늘 자리가 있었고, 옆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점잖았으며, 출발지부터 목적지까지 내내 앉아서 올 수 있었다.
그 날 딱 하루만 그런다. 인생 그래프 가장 저점 중에서도 가장 아래에 콕 찍힌 점 같은 날 딱 하루만. 다들 어디에선가 지령이라도 받고 온 것처럼,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할 거 없이 다들 무언가를 주고, 따뜻한 눈빛을 하고, 친근한 말을 붙인다. 나의 상태를 아는 사람도 있지만 이런 날은 어쩐지 모르는 사람들이 베푸는 친절이 더 많다. 오로지 좋은 사람들만 만날 수 있게 누군가 조치를 취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음모론같은 생각마저 든다. 집을 나설 때 모두가 걱정 어린 얼굴을 하고, 시간마다 내내 상태를 확인했던 아침의 내 무거운 발걸음은 그렇게 갑자기 다가온 따뜻함에 조금씩 가벼워진다. 집에 무사히 도착한 다음 한결 괜찮아진 표정을 보며 아, 그래도 오늘은 살 만했다, 싶어 안도한다. 죽지 않고 잘 살아서 도착했구나. 물론 시장에서 예쁜 리본 끈을 보고 어떤 것이 매듭을 묶었을 때 아프지 않고 부드러우면서 예쁠까, 하는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서랍을 열고 우연히 눈에 띈 줄을 만지작거리기는 했지만... 이런 날은 그것들을 생각하는 시간은 짧아지고, 대신 하루 종일 있었던 신기하고 기묘한 일들을 복기해 보는 시간이 길어진다. 그러다 보면 잘 수 있는 시간이 된다. 내일의 나는 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지금은, 이 순간은 그래도 죽을 계획은 그리 심각하고 구체적으로 세우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럼 그 날 밤의 나는 끝까지 정말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잠에 들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상황들을 묶어 나는 '김OO 자살방지위원회가 출동했다' 라고 부른다. 내가 죽으려 들면 세상은 귀신같이 그걸 알아챈다. 그리고 어떻게든 사람은 살리고 봐야 한다는 사명감에 자살방지위원회를 꾸려다가 내보낸다. 세상은 생각보다 살 만 하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 늘 죽어서 썩어 문드러진 나무 그루터기만 보던 내 고개를 옆으로 살짝 돌려, 그 옆에 흙을 비집고 나온 귀엽고 여린 새순을 보게 하기 위해서. 물론 나는 조만간 다시 고개를 돌려 썩은 냄새를 두른 그루터기에 꼬인 벌레들을 관찰하고 있을 테지만, 어쨌든 그들은 내가 가장 위험한 순간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렸기에 목적은 달성한 셈이다. 그렇게 또 아주 오래 같은 모습으로 있다가 어느 날, 나의 생명이 점점 꺼져가는 것이 포착되고 나면 그들은 또 다시 출동한다.
내일은, 사실 앞으로도, 모든 하루하루가 편했으면 좋겠다.
아침에 일어나서 숨 쉬는 것이 쉽고, 앞에 늘어진 시간들이 즐거웠으면 좋겠다.
잘 일어났다, 오늘 아침 너무 보송하고 상쾌하고 개운하고 따뜻해. 라고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정말 먹고 싶은 음식을 오늘 먹었는데 그게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더라, 라고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래도 매 초 매 순간 죽어야지, 죽어야겠다, 죽어야겠지. 죽을거야. 죽어야겠어. 죽어야 해. 생각하던 평소와 달리 그래도 나의 바람 속에 내일이라는 미래가 담겨 있다는 점이 낯설다. 뚜로루디자살방지위원회가 가져다 준 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