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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뚜로루디 Oct 03. 2022

무소식이 희소식

매일매일이 크고 작은 싸움


살아서 돌아왔다. 결국 그렇게 되었다. 수많은 복잡한 생각들과  죽어버리겠다는  모든 기복들을 버티고 드디어 아무 생각 없이 세상 좆같네를 되뇌이며 살아있는 시기가 돌아왔다는 말이다. 지금의 나는 놀랍게도 상당히 안정된 상태이다.  2주 전의 상담에서 나는 한달 동안 나를 괴롭혀온 죽음과 유서 생각을 조금 정리했다고 말했다.   동안이나 유서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너무 힘들고 지겨워 결국 유서를  저장해둔 것이다. 지독한 계획형으로 악명이 자자(?) 했던 이력답게 번호를 매겨가며 남겨진 가족들이  흔적들을 수습하기 쉽도록 정리했다. 쓰임새가 많을 것으로 예상되어 실리콘으로 엄지손가락 지문을 본떠 놓기도 했는데 불행히도 일반 실리콘으로는 지문 인식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여튼 그렇게 장례식장에서 쓰일 음악들과 부고 문자 내용까지 SNS별로 정리해 두자 해방감이 밀려왔다. 


오래 미루어둔 숙제를 끝낸 느낌. 한달 뒤의 약속이나 미팅도 약속이 잡히는 순간부터 부담과 스트레스를 받는 나였다.대망의 '그 날' 바로 전 날에는 이겨내지 못한 중압감에 펑펑 우는 일이 잦았다. 그러니 유서를 써두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 달 동안 품어온 심정이 어땠겠는가. 나는 매일 밤 죽고 싶어도 유서를 쓰지 않아서 그렇게 하지 못했다. 나의 자살 사고는 몇 년전까지 제법 충동적이었지만 지금은 도리어 지독히 현실적으로 바뀐 것을 느꼈다. 이러한 변화가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는 지금까지도 알 수 없다. 하지만 묘하게도 유서는 자살을 막았고 자살은 유서를 막았다. 때문에 그것은 지금까지 최종 관문을 거치지 못한 채 (아직 법적 효력이 있는 자필로 옮겨적지는 못했다) 메모 앱에 고이 잠들어 있다. 상담 이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까지, 다음날 미팅을 무사히 끝내고 집에 오기까지 여러 감정기복들이 널뛰었지만 죽을 것 같으면 세상이 늘 베풀어 주는 호의들 덕분에 살았다.


어쨌든, 나는 여기 있다. 선생님께서 심리 상담의 빈도를 늘려야겠다는 말씀과 함께 유서를 써 두었다는 사실이 굉장히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느냐는 걱정을 덧붙인 것이 무색하게. 부모님까지 데려오라 말하던 선생님이 우려하는 바가 무엇인지 나는 알았으나 지금은 다행히도 보통 사람의 평소 기분 정도 선을 유지하고 있다. 가끔 리본이나 끈 혹은 방충망 없이 열려있는 창문을 볼 때마다 이상한 기분이 들곤 하지만 그냥, 거기까지다. 당장 다음 날의 미래조차도 없는 것처럼 느껴져 같은 패턴의 삶을 반복하고 있지만, 적어도 2주 동안은 난 사방에 널린 죽을 방법들에게서 눈을 돌리는 법을 알고 있는 듯 했고, 실제로 그렇게 하며 살아가고 있다.


나의 경우에 이렇게 솔직하게 모든 것을 적어내리는 일기장과 같은 곳에서 이루어지는 고백들은 그 빈도가 뜸할수록 희소식이다. 모든 플랫폼과 채널들, 인간관계로부터 도망가고 도망간 끝에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이야기가 이대로 곪고 썩어갈 때 찾는 곳이 이런 곳들이다. 현실의 나를 아는 이 하나 없는 곳에서 나 죽어가요 라고 소리지르는 것. 그러니 글을 자주 쓴다면 그만큼 자주 죽을 맛이라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수없이 도망쳐온 모든 소통의 창구, 카카오톡이나 인스타그램, 거기에 문자나 전화 같은 기본적 연락 수단이 오랜 시간 동안 닫혀 있으면 그것은 오히려 비극이다. 나는 달팽이와 같은 상태가 되어 모두로부터 숨고 이 곳으로 피난을 온다. 어차피 내가 아니어도 다른 사람들에게 가 닿을 말들에 공감을 해줄 수 없는 그런 연락들을 모두 전부 어쩌라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러다가 괜찮아지면, 속죄라도 하듯 괜히 오버해서 만들어진 공감과 선물을 퍼붓는다. 그렇게 또 날아오는 카카오톡 선물하기 카드결제 명세서.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다.


중간중간 잠을 자며 시간을 보내고 영화나 영상물을 내내 보면서 남은 시간을 때운다. 내가 해방될 때는 오로지 꿈꾸지 않고 편안히 잠드는 시간뿐이다. 어디 멀리 놀러가는 사람처럼 잔뜩 꾸미고 집 앞 카페에 가서 멍이라도 때릴까. 하지만 그것 역시 낮잠을 자는 것만큼이나 시간 때우는 행위이기 때문에 삶을 지루하게 느끼는 나의 기분은 여전할 것이다. 하루하루가 지겹고, 견뎌내야 하는 퀘스트이며, 살아가는 것이 아닌 연명으로 이어가는 삶이다. 어쨌든 숨은 붙어 있으니 살아는 있자며 다짐할 때는 그래도 상태가 좋을 때, 왜 살아야 하냐며 끊임없이 나를 괴롭힐 때는 상태가 안 좋을 때. 이러나 저러나 권태로운 것은 똑같다. 그래서 지겹고 무료하고 무기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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