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진단 초기에서 중기로 넘어갈 무렵 나는 죽고 싶어졌다. 그 때의 우울증은 그저 슬프고 또 슬픈 것에 가까워서, 아무리 죽음으로 이르는 과정이 고통스럽다 한들 내 마음이 아픈 만큼 더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 어떤 시도도 목숨을 위협할 만큼 치명적이지 않았던 덕분인지 (혹은 그랬던 탓인지) 나는 여러 가지 경험을 얻고도 멀쩡히 목숨 부지하며 튼튼히 살아남아왔다.
시간이 지나면서 죽음에 대한 생각은 다른 방향으로 변화했다. 세상 살기 싫고 지긋지긋한 것은 똑같은데, 다만 그 이후가 두려웠던 것이다. 자살을 결심한 딸과 엄마의 마지막 밤을 다룬 마샤 노먼의 희곡 <잘 자요 엄마> 에는 이런 독백이 있다.
엄만 내가 직업을 가질 수 없다는거 알죠? 나,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사람이에요. 내 주변엔 사람이 있어본 적이 없어요. 병원에 있을 때 빼고는 그리고 발작은 아무때나 일어나요. 내가 가질 수 있는 직업, 엄마도 알다시피 오죽해요? 그저 나 자신을 더 비참하게 느끼게나 하겠죠. (조용히) 맞아요. 엄만 할 수 없어요. 그리구 나 역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내 인생을 바꿀수도 없고, 더 의미 있게도 못해요. 그저 이만하면 쓸만하겠다 느끼게도 못해요. 아무것도 못해요. 근데 내가 꺼버릴 수는 있어요. 막을 내려버리는 거에요. 듣고 싶지 않은 음악이 나올 때 라디오 끄듯이 말이에요.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에요. 꺼버리는 것, 그건 내맘대로 할 수 있어요. 그리고 그 뒤에 무슨일이 일어날지 난 알 수 있어요. 꺼버리면 멈출 거에요. 그래서 꺼버릴려는 거에요… 엄마, 우리 남은 시간이나 잘 보냅시다.
라디오 끄듯이, TV를 끄듯이 모든 것이 끝나면 그 끝은 아무것도 없을 것 같다는 두려움. 죽음 다음에는 암흑이라는 것을 인지하지도 못한 채 의식이 사라지는 것이 두려웠다. 그래도 인간으로 태어나 미련을 가지고 있다고, 영혼의 형태로라도 소중한 사람들 곁에 머물지 못한다는 것이 무서웠다. 정말 이렇게 끝인가, 너무 허무하게 끝이고, 그 끝에 아무것도 없다면.. 혹여나 각 종교들에서 말하는 사후 세계가 존재한다면 그건 그것 나름대로 별로였다. 각국에서 묘사하는 지옥들보다도 더 마주하기 싫은 것은 바로 환생이나 윤회의 개념이었다. 살기 뭣같아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그 끝이 또 다른 인생의 시작이라면, 거기다가 태어나는 국가도 부모도 시대도 완전히 랜덤 아니야. 가챠도 이런 극악의 확률을 가진 가챠가 없다. 영혼이 구천을 떠돌 수 있다 해도 결국에는 별다를 것 없기 때문에 지겨울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나를 인지하는가, 인지하지 못하는가의 차이일 뿐 같은 세계에서 하루하루 버텨내는 것은 지금과 그다지 다를 것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목숨을 다시 끊어낼 수도 없다. 결국 사후 세계가 있어도 문제, 없어도 문제라는 치명적인 단점.
그래서 자살을 미뤘다. 죽음의 상이 눈 앞에서 어른거리던 때 나는 다시 상담과 약물 치료를 시작했다. 선생님, 자꾸 죽어 있는 제 모습이 보여요. 환시는 아닌 것 같았지만, 나는 장소와 시간을 막론하고 창의적인 방법으로 죽어 있는 내 모습을 시시때때로 마주해야만 했다. 뇌가 만들어내는 상상과 지금 눈으로 보고 있는 공간이 결합된 결과물이라 해야 할까, 하여튼 머릿속에서 빔프로젝터로 보여주는 것마냥 생생하게 죽어 있는 내 모습을 볼 때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 안에서 나는 방 안에서 목을 매고 있기도 했고, 지나가는 차에 치여 피와 뇌수 그리고 뼛조각들을 도로 위에 흩뿌린 채 널브러져 있었고, 욕조에 들어가 손목을 긋기도 했고 간판 교체 공사를 하는 현장 아래를 지나가다 떨어지는 간판에 깔리기도 했다. 없던 인류애라도 억지로 끌어올려 삶의 의지를 인공적으로 만들어내야 할 판에 죽음에 관한 이미지가 눈 뜬 순간부터 눈 감는 순간까지 랜덤으로 보여지니 건강해질 수가 없었다. 나는 점점 그것들에 무뎌졌고, 영화 <신세계> 속 악당의 대사 '죽기 딱 좋은 날이네' 를 마음 속에 품고 다녔다. 길을 가다 문득 급정거한 차를 보면, 사고당하기 딱 좋게 생겼네. 혹은 오늘따라 유달리 튼튼해 보이는 행거와 거기에 걸린 내 모습을 보면, 오, 웬만한 무게도 지탱하기 좋게 생겼네.. 무의식적으로 나타난 이미지처럼 실행해 보려다 놀라 한 발짝 물러선 적도 있었다. 내 뇌가 보여주는 죽은 나의 모습들은 이미 죽어 있는 모습이라, 나의 고통까지는 재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아픈 게 제일로 싫었던 나는 이 때쯤 약물 치료와 상담의 버프를 받아 또 다시 죽음에 대한 생각을 고쳐먹게 된다.
또 자살이 미뤄졌다. 그동안 나는 자살이 힘들다면 차라리 뭐 번개라도 맞아서 죽길 원했다. 그렇다고 타인에게 위험한 짓은 절대 하지 않았지만 그냥 어쩌다가 우연히 길을 걷다 확, 모든 것이 붕괴되는 상황은 자살보다 더 예기치 못한 돌발적인 것이었다. 그렇다면 나도 허공에 매달린 줄을 보며 몇 시간씩 고통과 이후의 것들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그냥 어느 날 번개를 맞는 것처럼,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도 없이 모든 것이 끝나 버리면 차라리 낫겠다 싶은 그런 감정이었다. 그런 일은 아쉽게도 아직까지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급작스러운 죽음을 생각하고 있자니, 문득문득 떠오르는 것들이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자산이라고는 분류할 수 없을 정도로 쥐똥만큼 무언가 들어 있는 가상 지갑이라던지, 은행 같은 서비스에 접속할 수 있는 비밀번호 같은 것들. 그리고 소유물들에 대한 당부 사항이나, 내 부모님과 친구들을 안심시킬 수 있을 만한 것들.. 등등. 내가 가진 것들의 권한을 가족들에게 넘겨야 하는데 그 과정이 복잡해 부모님같이 아무것도 모르는 분들은 기록으로라도 남겨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유서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해외에는 In Case I Go Missing 이라는 바인더 북이 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나의 머리카락, 손톱이나 발톱, 지문이나 주요 웹사이트의 패스워드 등을 기록하고 저장해 두는 책이다. 디지털로 기록하기에는 아무래도 해킹의 우려가 있으니 손으로 적어 두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이 책에는 여러 가지 카테고리들이 있다. 유서의 목적으로 이 책이 만들어진 것은 아닐 테지만, 참으로 이성적이고 이상적인 유언집이다. 나는 이 책을 살까 말까 한동안 고민했다. 그리고 지금도 역시 고민 중이다.
https://savor.us/products/in-case-i-go-missing-binder?variant=42761566224642
유서를 써야겠다는 내 생각은 내가 죽은 모습을 보던 때처럼 한 달이 되어가도록 내 머릿속을 맴돌다가 또 가라앉기를 반복한다. 덕분에 매번 정리되지 않은 마음으로 책상 앞에 앉았다가 아무 소득 없이 침대로 되돌아간다. 지금의 나는 자살을 포기했다. 사후 세계가 어떻게 되는지 알아내기 전까지 지금의 정신 상태가 유지되고 있다면 자살의 가능성은 현저히 낮은 채 쭉 유지될 것이다. 하지만 난 아직 죽음은 포기하지 못했다. 그것이 아마 내가 내 자신을 죽음이라는 실로 꼼짝하지 못하게 미이라처럼 둘둘 두른 탓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