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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뚜로루디 Aug 20. 2022

백수는 한량의 꿈을 꾼다.

세상에는 다양한 분류의 사람이 있다. 한량인 사람, 한량이 아닌 사람, 한량을 꿈꾸는 사람, 한량인 척 하는 사람. 한량의 의미는 대중들 사이에서 대체로 걱정 없이 놀고 먹으며 신선놀음하는 사람 정도 되는데, 사전적 의미도 크게 다르지 않다. 특정 직업 없이 놀고 먹던 말단 양반 계층을 뜻하는데, (출처 : 네이버 사전) 깊이 파고들어보자면 관직이 없이 한가롭게 사는 사람, 혹은 관직이 있었지만 그만두고 타지로 가 무직으로 사는 사람, 아무 곳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 돈 잘 쓰고 천하태평 놀기만 하는 사람 등의 해석들이 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그러니까, 부유한 환경을 방패로 하는 일 없이 여기저기 놀러다니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다. 내 유일한 꿈, '돈 많은 백수' 와도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 


그런데 좀 슬픈 건 한량은 백수와는 조금 다르다는 것이다. 한량은 어느 정도 금전적인 여유가 있어야 가능하다. 하지만 백수는 무언가 쫓기는 느낌이 있다. 사회, 가족, 그리고 자기 자신에 쫓긴다. 한량은 인생 걱정 안 하고 살아도 되지만 백수는 인생 걱정 하며 살아야 한다. 한량도 자격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돈이 많지 않다. 우리 집도 돈이 많지 않다. 빚이라는 단어와 아주 가까운 삶을 살았으나 부모님이 십 년 넘게 악착처럼 아끼고 고생해 지금은 조금 많이 멀어질 수 있었다. 그래도 남들 다 전세 자가 살고 신차 살 때 우리 집은 아직까지 좁은 집 월세에 출시된 지 12년 된 중고차를 마련했다. 한량의 조건, 탈락. 


그렇다 해서 나에게 풍요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자본과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직업이 있는가? 없다. 내가 가진 것은 정신병력과 잡지식들뿐인데 애초에 잠자는 것, 깨어 있는 것의 컨트롤조차 제대로 되지 않아 일반적인 직업을 가지기 힘들다. 나는 지금까지 속해온 모든 집단에서 공황장애와 우울증이 악화되는 것을 겪었다. 사람이 많은 장소나 대중 교통은 되도록이면 피해야 하는 상황. 그래서 프리랜서로 살고 있는데, 말이 프리랜서지 그냥 백수 신세다. 무기력이 심해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들기 때문이다. 한량의 조건, 또 탈락. 


하필 외동이다. 앞으로의 나, 그리고 부모님의 인생을 부양하고 책임져야 할 사람이 나라는 뜻이다. 형제자매라도 있다면 부담이 좀 적을텐데.그런데 나는 지금 놀고 먹고 있다. 하루 대부분의 일과를 누워서 영화나 유투브를 보며 퍼즐 게임이나 하는 것에 보낸다. 그리고 아주 가끔 아주 자잘한 것들 쇼핑. 천 원, 이천 원씩 하는 머리핀이나 귀걸이 같은 것들. 가끔 그림 재료가 되는 것들도 구매하고 그것들은 쌓여 큰 돈이 된다. 무의미한 소비. 택배가 도착하기까지 기다리는 동안 살아 있을 수 있고, 택배를 열어보는 그 잠깐의 시간 동안 행복해질 수 있으니 저지르는 소비. 시간과 젊음과 돈을 이렇게 하루하루 날려보내고 있다. 


우울증과 기타 여러 가지 질환들을 13년 동안 가지고 살다 보니 자기 검열에 많은 시간을 쏟아붓게 된다. 우울함과 비관적인 감정을 너무 많이 내보이는 것은 아닌지, 실제로는 아무것도 아닌데 유난인 사람처럼 보이는 것은 아닌지. 이 나이 먹고 우울해 보이는 척 하는 사람처럼 보이는 것은 아닐지. 최대한 속을 내보이지 않으려 노력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관게에서 상처를 입곤 해서, 이제는 내 정신 질환을 개그로 소비하며 넘어가는 것도 자제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어쨌든 나 혼자 만든 그 모든 비관적인 웃음거리들을 불편해하니까. 이러다 보니 안 그래도 무기력으로 마비된 뇌가 아예 고장이 나버린 느낌이다. 무엇이 일반적인 감정의 선인지 구별할 수가 없다. 내가 얼마나 우울한지, 얼마나 무기력한지, 이만하면 엄살인지 아니면 게으름을 피우기에 적합한 고통인지 알 수가 없다. 


사회화를 학습해도 이 정도니, 그냥 이쯤 되면 내 인생은 이렇게 아무것도 없는 삶인 것 같은데 한량이었으면 참 걱정 없이 잘 살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지금은 백수니까 이런저런 생각이 많은 것 같은데, 엄청난 부잣집에서 신경도 쓰지 않는 자식 중 한 명으로 태어나 한량으로 살아간다면 어땠을까. 오히려 그 쪽이 철없고 싸가지 없을 가능성은 더 높을지라도, 지금 삶보다는 더 나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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