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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섭 Mar 22. 2023

거기 사람이 있는가

 하루가 매일 똑같을 거라고 생각해도 매번 반복되는 날은 없다. 세상의 일이 그렇다. 그래서 일상은 항상 시끄럽다. 그것이 사람 사는 세상이라 그럴지도 모르겠다. 인간이 다 똑같아 보여도 모두 다른 생각과 행동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은 한편으론 재미있다.     


 요즘 들어 뉴스를 시끄럽게 달구는 이야기는 우리나라 대통령이 일본과의 관계를 개선하고자 대법원에서 판결한 강제 동원 노동자의 배상문제에서 일본 기업을 배제한다는 내용이다. 어떤 이들은 이젠 과거에 갇히지 말고 미래를 나아가야 한다며 대통령의 의견에 찬성하고, 어떤 이 들은 우리나라 사법부의 판결을 삼권 분립이 보장된 나라에서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이 뒤집었다고 격분하기도 한다. 이러한 결정은 훗날 역사가 판단하겠지만, 내 개인적인 견해는 이런 방식이 문제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미봉책은 결국 훗날 또 다른 문제로 나타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독일은 전후 자신들은 패전국이며, 그들이 시작한 전쟁에 대한 잘못을 통렬히 반성한 반면, 일본은 원폭을 들먹이며, 자신들은 패전국이 아니라 피해국이라고 울먹인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이런 일본의 행태에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다. 그곳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이 문제를 조금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 보려고 한다. 일본뿐 아니라 우리나라 그리고 중국까지, 동아시아 문화에 “미안하다”가 가진 속뜻이다. 지금이야 단지 “미안하다”라는 말이 개인 간에 쉽게 쓰여지지 만, 예전엔 그것이 곧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행위였고, 곧 죽음을 의미한다. 일본은 건국 이래 천황의 체계에서 쇼군의 체계로 바뀐 후 수많은 전쟁을 치러왔다. 이런 전시체제에서 “미안하다”는 한 마디는 위험한 발언이었을 것이다. 또한 중국은 문화혁명 당시 자아비판 후 숙청을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에 지금도 개인 간에 “미안하다”는 말을 듣기 어렵다. 그렇다고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당쟁이 심했던 조선시대에는 한마디의 말실수가 곧 가문의 멸문지화를 면치 못하는 사태로 이어졌으니, 그야말로 “미안하다”는 말은 사형선고의 의미를 가진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자기반성은 죽음을 의미하는 경직된 문화에서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를 바라보면 쉽게 이해될 수 있다.     

 거기에 반해 미국과 유럽에서는 미안하다는 말을 쉽게 들을 수 있다. 이는 명예를 중시하는 결투의 문화에서 모욕은 곧 죽음과 연결된다는 등식이 성립되면서, 자신의 잘못을 쉽게 수정할 수 있었다. 러시아의 대문호 푸시킨도 이런 결투를 벌이다 세상을 등졌고, 미국의 초대 재무장관이었던 알렉산더 해밀턴은 자신의 아들뿐 아니라 자신도 결투에서 목숨을 잃었다. 어떤 학자들은 이런 결투문화가 계몽주의 사상의 전파로 사라지면서, 현대 인터넷이나 각종 매체에서 난무하는 가짜뉴스가 개인의 명예를 쉽게 손상시킨다는 주장도 하고 있다.      

또 다른 이유는 동서 문학차이에서도 찾아볼 수도 있다. 서양에서는 일찍이 비극이 유행했다. 그리스의 4대 비극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비극은 매서운 자기반성을 유발한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자신의 아내로 맞이한 운명의 장난을 알아차리자 바로 자신의 눈을 뽑고 방랑자가 된다. 이 비유는 유명한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주인공 토마시가 소련에 협조한 체코인들을 빗대어 잘못을 참회하고 스스로 야인으로 돌아가라는 신문사 칼럼의 한 예시로 사용되었다. 이런 비극 문화가 개인 스스로 잘못을 반성하는 문화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에 반해 동양의 문학은 다르다. 이러한 처절한 비극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그저 권선징악에 따른 해피엔딩만 있을 뿐이다. 춘향전, 심청전 그리고 홍길동전과 같은 구전이나 고전 문학 등에서 잘 나타나는 현상들이다. 얼마 전 스물다섯과 스물하나의 사랑을 그린 재미있는 드라마가 비극으로 끝났다. 그때 많은 시청자들이 방송사에 항의하는 해프닝이 있었다. 그것만 보더라도 우리가 얼마나 비극을 싫어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한마디로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방식이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다.      


 내가 생각하는 동서양의 차이가 조금은 다른데 있다. 바로 인간의 생각 속 ‘거기에 사람이 있는가’의 여부이다. 동아시아에서는 일찍이 가족을 중심으로 우리라는 개념이 발달했지만, 서양은 우리 이전에 개인이라는 개념이 먼저 발달했다. 이러한 동아시아 사상의 배경에는 공자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그는 우리의 근원은 조상에게 왔으며, 그 예를 다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국가가 개인보다 우선한다고 주장을 한다. 거기에 반해, 서양은 그리스 로마시대의 개인의 자유를 주장하다 중세에 접어들며 신을 중심으로 사고한다. 그러나 르네상스 이후 인간 본연의 자유를 다시 찾으면서 문화와 예술 그리고 과학에 이르기까지 사상적 발전을 이루었다. 프랑스 대혁명을 거쳐 영국의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론을 만들었고, 이러한 사상적 연결은 결국 미국의 독립선언문에 담겨 인간 개인의 완전한 자유가 보장된다.      


 우리나라 대통령은 자신의 임기 중에 일본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과거사의 문제를 덮고 가야 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거기에 일본은 자신들의 뻔뻔한 주장, 즉 과거에 모든 배상은 끝났다는 것이 관철되었다고 좋아하는 모양이다. 한마디로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냐는 발상이다. 이에 많은 한국 민간단체와 야당에서 굴욕외교를 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다. 세상은 한층 더 시끄러워졌다. 한 가지 의문이 드는 일은 어제와 오늘이 불만으로 가득 찼는데, 과연 내일이 되었다고 나아질까 하는 생각이다. 대통령과 일본 수상은 말한다. 국익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라고. 그러나 그들에게 묻고 싶다. 그 판단 기준에 국가보다 강제동원 된 피해자가 먼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거기에 사람이 없으면, 국가는 존재의 의미가 있는 것이냐고.     


 사람 사는 세상이 재미있는 이유는 자신이 만든 집단을 마치 세상의 전부인양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곤 그 집단을 위해 개인을 희생하라고 강요한다.      


 개인보다 위대한 집단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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