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경섭 Jan 01. 2023

아내의 고향

중년 백수의 생 바라보기 7


사계절 꽃이 넘쳐나는 섬이 있다. 초봄에는 유채꽃이 온 섬을 노랗게 물들이고, 여름엔 수국이라는 기지개를 편다. 가을에는 메밀꽃이 들판을 장식하고, 겨울에는 빨간 동백꽃이 추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스스로 나무에 불을 켠다. 


20여 년 전, 회사 바이어 발굴을 위해 유럽으로 출장을 떠났다. 한 달간의 출장이었고, 그때는 신혼 초라 외국에서 비싼 전화 요금에도 불구하고 매일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의 무고를 전해주고, 아내의 안부를 물었다. 그러던 중, 유레일 기차를 타고 이탈리아에서 독일로 가는 여정에  일이었다. 독일을 가기 위해선 스위스를 거쳐야 했고, 난 그날 창밖의 숨 막히는 풍경을 감상하며, 아내와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때는 유럽연합이라도 국경에서 여권을 제시하던 시기였다. 전화 요금 체계도 달라서 이탈리아에서 스위스로 국경이 바뀌자마자 엄청난 국제요금이 부과되고, 내 전화기의 충전된 금액은 모두 소진하고 말았다.


초봄 유채꽃은 어두운 겨울에서 탈출했다고 알리는 황색 신호등과도 같다. 이제 세상의 만물이 깨어날 거니 모두에게 준비하라고 외치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들판에 핀 유채 군락을 보면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사진에 담기 위해 차를 길가에 세우고 연신 셔터를 누른다. 이내 자신들과 유채꽃 들판을 찍다 지쳐 온몸의 진을 따 빼고 나서야 자신들의 차에 올라갈 길을 향한다. 


전화 요금이 다 떨어진 난, 스위스에서 전화 요금을 충전할 수 있었지만, 마침 토요일이었고, 스위스에서 전화 요금을 충전할 상점은 열지 않았다. 일요일까지 스위스에 머물다 독일엔 월요일 아침에 도착할 일정이라,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나만의 휴가를 스위스에서 즐겼다. 그때는 스키에 미쳐 있었던 지라, 스위스에서 언제 스키를 타 보겠느냐고, 일요일 오전 느긋하게 청바지 차림으로 스키까지 즐겼다. 그때의 햇살이 어찌나 좋던지 난 내가 세상의 모든 행복을 가진 듯 한껏 즐거움에 들떠 있었다.


여름 수국은 여러 꽃잎이 모여 하나의 꽃을 만드는 모양새라 신기했다. 수국을 처음 본 것도, 제주에 와서 처음이었다. 서울 촌놈이라는 말이 나에겐 딱 맞았다. 수국을 보고 있자면, 커다란 수국꽃들이 너무 수북해서 줄기가 부러지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다. 그래도 그 수국의 꽃들 사이에 서면 꽃들의 관심을 온전히 혼자 받는 것 같아서 마음이 저절로 즐거워진다.

 


월요일 아침, 또 한 번 유레일 기차를 타고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에 도착을 했다. 제일 먼저 아내에게 전화부터 걸었다. 너무 아침 일찍이라 핸드폰에 돈을 충전하기보다는 콜렉트 콜을 이용하여 아내에게 안부를 전했다. 아내는 전화를 바로 받았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화를 냈다. 지난 주말 갑자기 전화가 끊어지고, 아내는 주말 내내 연락이 없어서 큰 사고라도 난 줄 알았다고 이야기했다. 나를 크게 걱정했다는 생각에 미안하다는 말을 연발했다. 그리곤, 다신 연락이 안 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말해주었다. 아내의 걱정이 사랑이라는 생각에 많이 설레기도 했다.


가을 메밀꽃은 마치 겨울은 금방 올 거라고 예고라도 하듯 들판을 하얗게 물들인다. 들판엔 듬성듬성 빈 공간이 생기는데, 그곳엔 돌담으로 둘러쳐진 무덤들 버티고 있다. 무덤이 삶의 한 부분을 상징하기라도 하듯 제주 들판의 흔한 풍경이다. 그래서 그런지 가을 메밀꽃은 더 을씨년스럽지만 한편으론 죽음까지 품는 사랑에 아름다워 보인다.


출장의 일정을 마치고 귀국하여 공항에서 아내와 재회를 했다. 아내는 웃는 듯 우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난 그런 표정의 아내 얼굴이 마냥 사랑스러웠다. 그때 공항엔 처제와 함께 나를 마중 나왔는데, 처제가 들려준 이야기는 놀라웠다. 그 주말 이틀 동안, 아내는 이탈리아 대사관에 전화를 걸어 실종 신고를 냈다고 한다. 거기까지는 이해할 만한 사항이었는데, 보험을 하던 처제에게 나의 보험금이 얼마나 되냐고 물었다고 한다. 당황한 난 아내에게 왜 그랬냐고 물었다. 그때 아내의 답변은 나를 웃프게 만들었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


그때 불현듯 아내의 고향이 제주도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까지 제주의 여인들이 강하다고만 들었지, 가녀린 아내가 이렇게 생존력이 강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겨울 동백은 빨갛게 정열적으로 피어난다. 흔히 동백은 두 번 꽃 피운다고 한다. 한 번은 나뭇가지에서, 그리고 나머지 한 번은 꽃이 떨어진 바닥에서. 눈 덮인 길에 빨간 동백이 꽃송이채 떨어진 것을 바라보고 있으면, 난 나의 아내가 생각나서 피식 웃는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꽃을 피우는 그 능력에 경외감마저 든다.


사계절 꽃이 피는 제주는 아내의 고향이다. 


작가의 이전글 횡단보도를 지켜보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