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구 Feb 24. 2024

난 가끔 춤을 추는 나를 봐

나의 음악서사 - 1


 유난히 내성적인 지금과는 확연히 대비되는 초등학생 시절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있다.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던 90년대, 치고받고 싸우며 클 형제도 없이 자란 외동딸은 한번 놀이터에 나가면 저녁시간까지 들어오지를 않았다고 한다. 지금은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도 하루 3시간 이상 떠들면 모든 에너지가 소진되고 마는 인간이 된 건 신기한 노릇이다. 친구들이 놀러 오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어쨌든 부모님과 있는 시간을 제외하면 혼자 있는 시간이 남들보다 많았던 것 같다. 이런 시간을 재밌게 보내는 법을 터득할 수 있었는데, 중2병이 오기 전까지는 이 놀이를 계속할 수 있었다. 그 놀이는 바로 '홈비디오 찍기'. 아빠가 컴퓨터를 잘못 미는 바람에 사라진 몇 년의 추억은 눈물로 제하더라도 못해도 오십 개가 넘는 영상들이 내 하드와 유튜브 비공개 채널에 저장되어 있다. 때 묻지 않은 날것의 나를 감각하는 것과 동시에 이런 기록을 남길 수 있도록 도와준 부모님의 젊은 시절과 지금은 곁에 없는 강아지들이 보고플 때면 언제라도 찾아볼 수 있다. 어떤 실수로도,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단 하나의 영상도 더 이상 사라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여기저기 무한백업을 했을 만큼 금은보화보다도 소중한 자료다.


유세윤의 홈비디오를 본 적이 있나? 나는 그 영상이 공개됐을 때 무척이나 큰 동질감을 느꼈다. 나 또한 거울 앞에서 가수들의 노래와 몸짓, 표정을 흉내 내거나 때로는 나만의 필을 자유롭게 표현하며 전위예술 뺨치는 몇 시간을 지치지 않고 보낼 수 있었다. SES, 보아 등 그 시대를 풍미하는 노래들과 함께라면 언제든 언제 까지든 넘쳐흐르는 흥을 발산할 수 있었다. 엄마 아빠가 판을 깔아주며 한번 해보라고 하면 부끄러워하면서도, 말없이 나만 바라봐주는 관객이라면 관객인 카메라의 눈동자 앞에서라면 얼마든지, 무엇이든지 가능했다. 카메라는 실력을 평가하지도, 야유를 보내지 않았으며 그저 나의 모든 행동을 기꺼이 담아줄 뿐이었다. 이 은밀한 취미생활을 담을 때면 한쪽 손에 들린 무선 리모컨은 쉴 새 없이 줌아웃을 반복하기도 하고 스위블 액정으로 보는 내 얼굴 또한 티브이에 나오는 연예인이 된 듯 신기하고 재밌었기에 콧구멍을 발랑발랑 크게 벌렸다가 말기도 했다. 나중에는 뮤직비디오를 따라 한답시고 선풍기를 틀고 머리가 날리는 효과까지 주기 시작했다. 평범한 일상복들은 한쪽 어깨를 내려 무대복으로 변신시키는 과감함도 불사했으며 성숙한 이미지를 위한 롱웨이브 가발은 덤이었다. 기본적으로 쓸 마이크는 엄마의 반쯤 쓴 로션통이었다. 마이크와 비슷한 크기의 물건을 찾다 보니 화장품만큼 제격인 것이 없었다. 보아를 따라 할 때는 컴퓨터용으로 쓰는 헤드셋의 선으로 칭칭 감아 머리에 고정시키는 방법을 사용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 분위기 있는 곡들에 심취하게 되면서 어디에서 튀어나온 건지 모르겠지만 노래방에서 쓸법한 진짜 마이크를 구할 수 있었고 당분간 발라드를 한층 더 감성 있게 부를 좋은 라이브 장비가 되어주었다.

혹여나 이렇게 뻔뻔하게 촬영한 영상들을 부모님이나 친척들이 보게 될 때면 거실에서 가장 먼 구석 자리로 도망가 귀를 막고 보지 말라며 소리를 질러댔다. 지금은 아련하고 재밌는 추억으로 바라볼 수 있지만, 이 영상을 아무렇지 않게 보기까지 오래 걸린 것은 재미있는 부분이다. 너무나도 순수한 시절,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찍고 찍히는 그 순간만을 온전히 즐기려고 했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


자, 이렇게 혼자만 놀았다고 생각하니 조금은 짠한가? 솔직히 그런 추억만 남아있다면 지금 변하지 않는 내 "I" 성향과 180도 다르다고 생각을 하진 않았을 것이다. (부끄럽지만 아직도 집에서 막춤을 추거나 콘서트를 하는 가수의 제스처를 따라 한다) 돌이켜 떠올려보니 아찔할 정도의 E성향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였던 초등학생 시절 장면이 몇 가지 있다. 담임선생님은 연다고 한 적이 없는 장기자랑을 손을 번쩍 들어 준비해 온 게 있다며 선보인 무대들 따위가 그것이다. 센세이셔널의 끝판왕이었던 이정현을 따라 하려고 부채와 캐스터네츠를 구해오는 것은 물론(하얀 털이 달린 큰 부채를 백팩에 넣기란 쉽지 않았다) 박지윤 언니의 과감한 '성인식' 무대도 따라 했다. '성인식' 가사를 이해하는 것과는 별개로 언제나 파격적인 모습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뜨거운 무대들 이후, 꽤 어린 나이지만 헤이터들이 생겼다. 긴 머리를 풀어헤치고 춤추는 내가 찍힌 사진이 반 앞에 붙어있는 것을 본 6학년 언니들이 '얘 깝죽거리지 말라해라'라는 무시무시한 경고 메시지를 남겼다고 하는 게 아닌가...


중학생이 되면서는 첫 수련회 장기자랑에서 베이비복스에 노래를 선보일 생각으로 흥이 많은 한 친구를 섭외했다. 함께 춰야 멋질 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주 본 안무를 느낌과 몸으로 기억해 자유롭게 프리스타일로 추는 게 아닌 진짜 안무를 배워 따라 하는 연습을 처음 하게 됐다. 첫 선생님은 '아이댄스'라는 아바타가 안무를 가르쳐주는 프로그램이 대신해주었다. 열심히 한다고 했지만 할수록 한 곡을 끝까지 보고 따라 외우는 게 생각보다 어렵다고 느껴졌다. 공부를 잘했던 파트너 친구는 금방 금방 외워지는 것 같아서 마음만 급해졌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수련회 당일날 생겼다. 친한 친구들만 모여있는 우리 반 앞에서만 하던 무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체감하게 되면서 서서히 주눅이 들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앞선 다른 친구들의 완성도 높은 노래실력을 보니 내가 준비한 게 모두 잊혀갔다. 나만 어린애 같이 보일까 봐 수치스러운 미래도 동시에 떠올랐다. 모든 망신살이 나에게로 올 것만 같았다. 다른 친구들이 성숙한 목소리의 듀엣으로 부르는 보아의 노래를 들으니 충격의 연속이었다. 나는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였던가. 어떻게 저렇게 잘 부르는지 나도 모르게 질투가 날 정도였다. 노래실력이 뛰어난 아이들을 보고 나니 머릿속은 온통 비교로 가득해졌다. 오로지 즐기기 위해 준비한 즐거운 놀이는 '실력'으로 변했고 곧 그것은 부족한 점들 투성이에 불과했다. 불과 10분 전까지만 해도 친구와 합을 맞췄지만 도저히 올라갈 수 없음을 직감했다. 남들 앞에 선다는 게 그렇게 떨린 경험은 그날이 처음이었을 거다. 친구에게 미안했지만 내가 같이 섰을 때 무대를 망칠 수도 있다고 말하며 혼자 올려 보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졸지에 무대파투를 낼 뻔한 최악의 배신자가 되었다. 무대 위를 쓸쓸히 올라가던 친구의 경멸스럽게 바라보는 그 눈빛은 어린 마음에도 죄스러운 게 어떤 건지 단박에 깨달을 수 있었다. 다행히 친구는 외로운 독무대를 완벽한 기억력으로 완성해내버렸다. 대견하고도 미안한 마음에 박수를 누구보다도 크게 쳐야만 했다. 사건을 톺아보니 늘 좋은 놀이였던 '홈비디오'시대가 막을 내린 시점과도 겹쳐 보인다. 남과 비교할 줄 모르고 완벽한 춤을 추려고 하지 않았던 유희 그 자체로서의 춤은 사라져 버리고 남의 잘함이 먼저 보이고 동시에 비교하게 돼버린 그날은 마치 선악과를 따먹은 이브의 날처럼 부끄러움을 알게 된 슬픈 날이자 사춘기의 시작이지 않았을까.

이전 01화 노래방을 좋아하세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