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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 Apr 13. 2024

어여쁜 우리 집

 때는 지난 3월, 그러니까 학생들이 개학하는 주였다. 내가 좋아하는 유리창 너머 풍경을 바라보던 아침이었다. 그 시선에는 항상 고등학교가 보이는데, 학생들이 한 명씩 등교할 때마다 주임 선생님이 두 손을 들고 흔들면서 인사를 반갑게 해 주시는 모습에 시선이 멈췄다. 선생님은 언제까지 인사를 해주시려나, 아이들의 반응은 어떤가를 지켜보면서 내 학창 시절 때에 저런 선생님이 계셨었나 생각해보기도 했다. 음, 내 기억에는 없지만 내가 못 본 어딘가에 계셨으리라 상상력을 펼치고 있자니 마음 한편이 몽클몽클했다. 이 동네에 잘 왔다는 마음이 한번 더 들었다.

그럼에도 이 집, 이 동네와의 이별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도 자주 해본다. 어떤 미래가 올지 아무도 모르지만 나의 집을 소중히 기억하기 위해 적어 내려간다.





Jimmy O. Yang이라는 아시아계 사람의 스탠드 업 코미디에서 본 내용이다. 백인들은 자신들의 생활이 얼마나 값어치 있는지를 자랑하고, 흑인은 직설적으로 구매한 물건의 값을 자랑하는데 아시안인 본인의 엄마가 늘 하는 말은 '지미- 이거 얼마게?'란다. 이는 앞서 말한 둘과는 달리 얼마나 싸게 잘 샀는지 자랑하는 독특한 문화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고 이는 많은 사람들을 웃기고 있었다. 나는 이 영상이 꼭 나를 말하나 싶어서 공감이 가 조금은 쑥스러워졌다. '얼마에 샀게~' 그 말을 참 자주 한 것 같다. 엄마에게도, 남편에게도.


각종 sns와 유튜브만 당장 봐도 고급진 인테리어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넘쳐나고 추천제품이라 소개하는 유행하는 인테리어 조명, 테이블이 적게는 몇십만 원에서 몇백만 원을 호가하는 세상에 청개구리 심보로 질투나 반항심이 든 건지 뭔지 남들과는 다른 길을 가고 싶은 성질은 어릴 때나 지금이나 별로 다르지 않은가 보다. 어쩌면 내가 처한 현실에 대한 합리화를 잘했을지도 모르겠으나 27년이 되어가는 이 오래된 집에 들어올 때 기본 중의 기본일 수 있는 올리모델링을 하지 않았다. (얼마를 들였을까요~)


이 집을 선택할 때의 첫인상은 겉보기엔 오래됐지만 전에 사용하시던 분들이 사정상 별로 사용을 안 하고 있던 상태라 곰팡이가 핀 곳이나 자잘하게 손봐야 할 부분들을 제외하고는 살기에는 무리 없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처음에는 있던 돈을 탈탈 털어 큰 시공들을 할 생각도 있었다. 크게는 욕실을 뒤엎어 욕조를 떼버리고 타일 하나, 젠다이 하나, 변기 하나까지 취향에 맞게 바꾸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돈도 절약하면서 욕심부리지 않고 심심하면 심심한대로 고쳐 살아보고 싶기도 했다. 내가 고친다고 생각했으면 조금 어려웠을 것 같은데, 이렇게 생각할 수 있었던 건 어떻게 보면 나만이 가진 혜택 덕분이었을 수도 있다. 사실 나의 아빠는 평생 인테리어 전문가로 일하셔서 이것저것 현장에서 진두지휘하신 경험이 많아 모든 공정을 어떻게든 가능하게 할 줄 아셨고, 우리 집수리에 흔쾌히 도움을 주셨기에 나는 아빠의 노동력을 부모자식 관계라는 이름 아래 착취하였고 덕분에 최소한의 비용으로 집을 다듬어갈 수 있었다.


더운 여름날 아빠는 멀리 사는 우리를 위해 항상 비어있던 그 집에 가 손수 수리할 것들을 고쳐 나가셨다. 단순히 고치기만 하는 수준은 아니었는데 이를테면 주방 수납장에 필름을 손수 재단 후 붙이는 작업, 없던 매립등을 만드는 등 정말 하나하나 아빠의 정성을 이 집에 들였기에 이 정도면 아빠의 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집을 떠나게 되는 날이 온다면 아빠의 선물 같은 온갖 땀과 정성의 결정체를 남에게 넘긴다는 것에 약간의 죄책감마저 들 것만 같다.


 너무 열심히 공들인 덕인지 여행에서 아무리 완벽하게 좋은 숙소라 하더라도 불을 끄고 누우면 미묘한 불편감이 느껴지곤 한다. 우리 집 안방에 있을 내 몸에 알맞게 맞춰진 침대가 그리워져 잘 때만이라도 집에 가고 싶어진다. 여행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회귀본능은 살아난다. 여행 마지막 날이 되기도 전에 '빨리 집에 가고 싶다'라고 말하는 날이 늘고 있다. 물리적인 안식처가 곧 정신적인 안정감까지 차지하고 말았다.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더 멀리, 많이 나가서 더 많은 걸 경험하라는 세상인데 나는 자꾸 집만 찾게 돼 큰일인가 싶다.






 계절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동네 풍경 속 숨은 그림 찾기는 꽤 재밌다. 요즘 우리 집 뒤편에 자리한 벚꽃은 '우와 봄ㅇㅣㄷ ...'하는 사이 벌써 초록색으로 변해버렸으며, 처음 보는 향기로운 꽃이 빨리 날 좀 보라며 유혹하고 있다. 살이 통통하게 오른 느릿한 걸음의 길냥이와는 초면인지 구면인지 고개를 돌려 한번 더 눈을 맞추어본다. 주에 한번 열리는 단지 내 장에서는 닭강정 아주머니의 헤어스타일이 바뀌었는지를 구경하고, 나만의 단골식당에선 '역시는 역시다'를 외치고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며 맛을 음미한다. 천 원짜리 떡꼬치를 먹으며 눈감고도 걸을 수 있는 산책 코스를 걷고, 귀한 동네친구의 우편함에는 좋아하는 반찬이나 간식을 나누며 이웃과 나누는 즐거움을 누린다.


비가 많이 내리던 날 고른 우리 집은 꽤 높고 가리는 건물도 없어 바람이 앞뒤로 잘 통해 여름에도 시원할 것 같았고 이전 집처럼 매연 가득한 큰 도로에 붙어있지도 않아 정신없는 차 소리도 안 들릴 것 같은 게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곳에 온 지도 벌써 10개월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첫날의 강렬함을 기억한다. 지상주차장에 주차를 기분 좋게 하고 차문을 닫기 위해 뒷걸음질 치다가 생긴 일이었다. 이전에는 한 번도 밟아본 적 없던 개똥을 밟은 그 화단을 나는 잊을 수 없다. 다른 곳에서 이렇게나 미끄럽고 싱싱한 똥을 밟았다면 질겁했을 텐데, 그날은 왠지 이곳에서 좋은 일들이 많이 일어날 것 같다는 기분이 들어서일까 침착하게 모래에 신발을 슥슥 닦고 털었다. 나름 따끈따끈한 환영의 의미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그 예감이 틀리지는 않았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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