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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조벌의 아침

by 정이흔

눈앞에 펼쳐진 호조벌이 바라보이는 거실을 품은 집으로 이사한 지 두 주가 되었다. 너른 들판 특유의 아침 안갯속에서 앞산 넘어 떠오르는 해를 보는 아침은 일출을 바라보던 동해안 어느 방파제 위의 경치와는 비길 것이 없이 장엄하다고나 해야 할까? 지금껏 살던 곳에서 불과 차로 이십 분도 안 되는 곳에서 이런 아침을 맞이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다.


지금까지 도시권 환경에서 살아오면서 언젠가는 너른 벌판에 익어가는 벼를 바라보는 곳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항상 간직하고 있었지만, 섣불리 생활의 터전을 옮긴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기에 그저 마음속으로만 그 생각을 간직하며 살았다. 그리고 이주 전, 상상 속에서 그리던 농촌 마을은 아니지만, 아무튼 거실에서 너른 들판이 바라보이는 지금의 집으로 이사를 왔다. 그리고 이사한 다음 날 아침 앞산 너머에서 떠오르는 해를 보고야 말았다. 아내와 함께 그 광경을 보며 탄성을 질렀다. 아침 안방 창 너머의 일출이라니…… 얼른 일어나서 커튼을 활짝 열어젖혔다.


아침저녁으로 일터를 오가며 지금의 집을 눈여겨보아 둔 지가 거의 오 년은 넘었을 것이다. 항상 쭉 뻗은 마유로를 달리며 야트막한 야산 중턱에 세워진 아파트 단지를 보면서, 언젠가는 저런 집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바람이 마음속에서 조금씩 쌓여갈 즈음, 드디어 기회가 아주 자연스럽게 다가왔다. 그리고 우리 가족은 망설이지 않고 그 기회를 잡았다.


농촌의 풍경을 그리워한 까닭은 아마도 안온한 생활을 원했기 때문이리라. 그런 데다가 한창 그림에 빠져 살 때는 도시적 풍경보다 농촌이든 산촌이든 촌 풍경이 그립기도 했다. 집을 나서기만 하면 주위에 온통 자기를 그려달라고 달려드는 풍경 속에서 그림에 빠져보고 싶었다. 상상은 점점 부풀어, 그렇게 그린 마을의 사계 풍경으로 전시회도 열고 그 마을과 함께 살아가는 작가의 모습도 꿈꾼 적이 있었다. 원래 유명한 화가들도 그렇지 않은가? 나야 뭐 무명 화가였지만, 나라고 그런 생활을 하지 말라는 법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그림 생각만 하다가 요즘 들어서 글을 쓰고 전국의 문학관을 돌아다니다 보니, 이번에는 너른 들판이 내다보이는 거실에 커다란 테이블을 놓고 거기에 앉아 시도 쓰고, 수필도 쓰고, 소설도 쓰는 나의 모습을 그려보기도 했다. 내가 마음먹기 나름일 터, 이룰 수 없는 꿈은 아니었다. 글을 쓰다가 이제 곧 돌아올 손자 손을 잡고 마을을 돌면서 시원한 곳에 앉아 그림도 그리고, 계절 따라 변화하는 자연의 모습에 잠겨 지내고 싶다. 그런 자연이 서울의 경계에서 불과 차로 이십 분 정도의 거리에 있을 줄은 몰랐다.


원래 내가 촌 생활을 동경하던 당시에는 아내의 반대로 꿈도 꿀 수 없었다. 물론 아내도 생활 자체를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생활환경을 우려한 것이다. 쉽게 말해 아내는 갖은 곤충과 벌레를 두려워한다. 아내에게 촌 생활은 그런 벌레나 곤충의 손에 아내의 몸을 무방비로 던져놓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아무리 집을 잘 지으면 된다고 해도 아내는 요지부동이었다. 더욱이 나이가 들어가며 아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병원이었다. 아무리 촌 생활이 동경한다 해도 늙으면 병원 가까이에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 말도 일리는 있다고 생각했기에 나도 더 이상 촌 생활을 주장할 수 없었다. 그리곤 결국 촌 생활의 로망은 그대로 사라지는가 했는데, 촌 같기도 하지만, 촌은 아니면서도 촌 생활의 일부를 만끽할 수 있는 곳에 정착했다. 이곳에서는 평소 우리가 다니던 모든 병원이 차로 삼십 분 이내에 있다. 인근에서 가장 큰 도서관도 차로 십오 분 거리다. 수도권의 여러 고속도로 진입도 차로 십 분 거리의 연성 IC나 시흥 IC를 통해 가능하다. 단지 전철역을 제외하고는 무엇 하나 불편한 것이 없다. 하지만 그것도 아파트 단지 앞을 지나는 버스로 세 정거장만 가면 서해선 전철을 탈 수 있으니, 어느 정도는 불편함을 상쇄할 수 있다. 전국에 전철역이나 지하철역에서 버스로 세 정거장을 벗어난 비역세권 지역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니 지금의 우리 집은 그나마 양호한 편이다. 마지막으로 어머니를 모신 요양원 또한 차로 삼십 분 이내의 거리에 있으니, 가끔 찾아뵙기에도 부담 없는 거리인 셈이다.


이삿짐은 풀면 풀수록 계속 나오는 법이다. 그렇기에 이사를 한 번 하면, 정리하는 데에만 몇 달이 걸리거나 아니면 다음 집으로 이사할 때까지 풀지 않는 짐도 있다고 할 정도로 이삿짐 풀기는 간단하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열흘도 안 되어 모든 이삿짐을 다 정리했다. 물론 추석 연휴도 일조했겠지만, 무엇보다 우리 가족이 지금의 집에 대해 갖게 된 애착의 힘이 컸다. 이제는 거의 집을 옮길 일이 없는 상황에서, 이제야 오랫동안 안주할 집을 찾았다는 안도감까지 모든 여건이 이삿짐 정리를 도와준 셈이다. 이제 조금 있으면 며느리와 손자가 먼저 귀국한다. 그렇게 되면 형식적으로는 삼 대가 사는 집이 된다. 아이들이 어린 시절에도 삼 대가 사는 집에서 자랐다. 이제 내 대에서 다시 삼 대가 사는 집을 이룰 것이다. 그렇게 살다 보면 손자들도 클 것이고 아들 가족이 분가할지도 모르므로 나중에는 결국 아내와 나만 남는 집이 될 것이지만, 둘만 남아도 이 집은 끝까지 지킬 생각이다. 그래야 아들이나 딸이나 손자들이 찾아와도 어린 시절의 기억을 되살릴 수 있지 않겠는가? 비록 시골의 뛰놀 수 있는 마당 있는 집은 아니지만, 아이들에게는 시골집은 아니더라도 고향이나 마찬가지인 집으로 평생 간직하고 싶다.


글을 쓰다 보니 호조벌의 아침이 밝았다. 매일 떠오르는 해를 볼 때마다, 나의 인생도 이 집에서 매일 새롭게 시작되기를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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