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omo ludens Apr 24. 2024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 특집

번외 편 - 모방론 I

예술의 시초에 대한 다양한 이론이 있을 수 있으나, 예술이 모방으로부터 시작한다는데 대부분의 미술사학자들은 동의할 것이다. 모방론이란 그리스어로 mimesis라고 하는데 '흉내 내다/따라 하다' 등의 뜻이다. 라틴어로는 imitatio라고 하고, 독일어로는 Nachahmung, 영어와 프랑스어로는 representation이라고 한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재현이라는 말이 적합한데 '다시 눈앞에 둔다'라고 이해해도 크게 다르지 않다. 넓은 의미에서 한번 목격한 '원본'을 다시 눈앞으로 가져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제욱시스와 파라시오스

<제욱시스와 파라시오스>, 요한 폰 산드랏, 1675

그림을 누가 더 잘 그리냐에 대한 궁금증은 고대 그리스에도 있었다. 예술가들의 경쟁은 르네상스의 유명한 예술가인 미켈란젤로도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피해 갈 수 없었다. 20세기의 아방가르드 미술을 대표하는 파블로 피카소와 모딜리아니의 경쟁 역시 매우 유명하다. 이러한 예술가들의 경쟁을 파라고네 (Paragone)라고 하는데 여기서 우리는 무엇이 올바른 예술인지에 대한 예술가들의 견해를 살펴볼 수 있다. 과연 무엇이 올바른 예술일까?

그리스의 화가 제욱시스와 파라시오스는 각자 그림을 준비해 천으로 가려두고 대중이 모인 자리에서 공개하기로 한다. 위 그림의 오른편에 위치한 포도 그림은 제욱시스가 그린 것인데 그림을 공개하자 새들이 포도를 향해 날아들었다. 포도 그림이 너무 실제의 그것과 비슷하여 새들이 포도라고 착각했고 사람들은 이에 감탄했다. 의기양양해진 제욱시스는 파라시오스에게 천을 걷어 젖힐 것을 요구한다. 그러자 파라시오스는 살며시 웃었고 제욱시스는 그가 그린 것이 천으로 가린 장막 자체였던 것을 알게 되었다. 제욱시스는 관중들과 새의 눈을 속였지만 파라시오스는 화가의 눈을 속인 것이다.


철학자들의 의견

<아테네 학당>, 라파엘 산치오, 1510-11

아테네 학당의 중심에 위치한 두 철학자는 스승과 제자 관계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이다. 붉은 옷을 입고 검지 손가락을 하늘로 추켜올리고 있는 플라톤은 진리가 저 위의 이데아의 세계에 있다고 한다. 그에게 진리는 불변하는 것이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감각의 세계, 거짓의 세계라고 한다. 우리가 사는 세계의 모든 것은 이데아의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하며 예술은 그림자를 다시 모방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플라톤은 참된 지혜(episteme)의 대상에 대한 이론인 이데아론을 세우고, 이데아는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의 원형이 되는 것으로 이것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감각적인 경험과 앎이 아니라 이성을 통한 앎을 통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가 왼손에 들고 있는 책은 티마이오스(Timaios)인데 우주의 생성에 대한 책이며 손가락과 마찬가지로 세로로 들고 있다. 그는 참된 세계와 감각의 세계가 수직적 위계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 둘의 관계를 비유로 설명한다.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

<플라톤의 동굴>, Jan Saerendem, 1604

동굴의 비유에서 죄수는 묶인 채 횃불에 비친 그림자가 벽면에 어른거리는 것을 보고 있다. 그는 얼굴을 돌리수도 없기 때문에 그림자가 살아 움직이는 것으로 생각하고 벽면 위에서 이동하는 이들의 소리가 동굴에 울리는 것을 그림자가 소리 내는 것이라고 착각한다. 우리가 감각세계에서 인식하는 것을 이와 같다고 비유하는 것이다. 어느 날 죄수가 갑자기 풀려서 횃불을 보자 눈이 아파오며 그것을 바로 보지 못한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고통에 적응이 되면 그제야 그는 자신이 본 모든 것이 허상이었음을 깨닫는다. 동굴을 돌아다니다가 동굴의 바깥으로 향하는 길을 찾는다. 그는 동굴의 바깥으로 나가려 하나 다시 한번 태양의 빛에 고통을 느낀다. 드디어 마주한 실제 세계는 다양한 색채로 가득한 아름다운 곳이었다. 동굴 속에선 흑백만이 있었고 물에 반사되는 빛과 자기 자신도 볼 수 없었다. 드디어 올바른 세계를 본 이 죄수는 동굴로 돌아가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던 죄수들에게 이 이야기를 해주고는 광인 취급을 받는다. 플라톤이 생각하는 모방이란 다다를 수 없는 이데아를 흉내 내는 것에 불과하다. 예술가가 100점을 목표로 하고 평생을 정진하고 90점에 다다랐다고 생각하고 아쉬워하며 생을 마감하는 순간 하늘에서 이렇게 들려올지도 모른다. "만점은 10000점이라네..."

예술은 단지 이데아의 복사본으로서 가장 낮은 단계의 표현일 뿐이며 진정한 실재가 아니다.

이 말은 그가 생각하는 예술의 가치를 이야기해 준다. 플라톤의 시기에 예술은 자연과 인간을 따라 그리기에 바빴다. 그리스의 각성시기에 그들은 아르카익의 경직된 묘사에서 사물의 정밀한 관찰과 묘사를 이루어냈다. 플라톤이 보기에 이것은 사물이 가진 '겉모습'에만 치우쳐 그것의 본질을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플라톤을 변호해 보자면 단 하나의 관점만을 가지는 인간은 그것이 전체라고 착각하는 오만을 불러일으킨다.

<토끼>, Markus Raetz

마르쿠스 라에츠는 흙덩이를 원형 판 위에 두었다. 관람자가 주변을 서성거리다가 어느 순간이 되었을 때 이 흙덩이는 중절모를 쓴 신사로 드러난다. 그리고 벽면의 거울을 보니 이 신사는 토끼임이 밝혀졌다. 이 흙덩이의 정체는 무엇일까? 플라톤을 옹호하는 입장에서 라에츠의 작품을 해석해 보자면 흙덩이를 바라보는 수많은 각도와 거리 가운데 어느 시점이 되는 순간 이 흙덩이의 그림자는 신사로 변하고 때로는 토끼로 변한다. 그리고 특정한 한 지점에 서는 순간 중절모의 신사의 참모습이 토끼임이 밝혀진다. 이것이 우리의 인식의 오류일 수 있다는 것이다. 흙덩이를 보고 중절모 신사라 확신하는 이에게 이것은 참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것을 토끼라고 하는 자에게 그것은 참임이 분명하다. 특정 지점에 선 이에게 거울은 신사의 참모습을 비춰주는 도구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모든 이들의 말은 참이며 동시에 거짓이다. 플라톤은 우리가 한 가지 관점만을 가질 수밖에 없고 이것을 넘어선 본질을 보기 위해서는 '변하지 않는 것'을 통해야만 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에게 모방은 결코 다다를 수 없는 100점을 향한 무한 오답일 뿐인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방기원론>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스승의 말을 듣고 참지 못하고 이렇게 말한다.

스승님의 말씀은 매미 소리와 같습니다.

소리는 나는데 속이 텅 비어있다는 말이다. 플라톤은 모든 의미 있는 것을 의미 없고 공허하게 만들었다. 제자는 스승의 의견에 도전장을 내민다. 그는 손바닥을 펴고 땅과 평행하게 두며 다른 손에는 <에티카> (윤리학)를 가로로 들고 있다. 그에게는 단 하나의 이데아는 허구이며 본질은 다수의 것에 내재해 있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진리는 윤리학과 같이 사람들의 행복 (Eudaimonia)을 위한 것이었다. 하늘에 떠있던 본질은 질료라는 몸에 형상으로 깃든다. 예술가는 이 세상의 재료들을 이용해 형상을 깃들게 하는 임무를 맡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시학>에서 모방기원론에 대해 이야기한다.

시는 일반적으로 인간 본성에 내재해 있는 두 가지 원인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 같다. 모방한다는 것은 어렸을 적부터 인간 본성에 내재한 것으로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다른 점도 인간이 모방을 가장 잘하며, 처음에는 모방에 의하여 지식을 습득한다는 점에 있다. 또한 모든 인간은 날 때부터 모방된 것에 대하여 쾌감을 느낀다. 이런 사실은 경험이 증명한다. 아주 보기 흉한 동물이나 시신의 모습처럼 실물을 볼 때면 불쾌감만 주는 대상이라도 매우 정확하게 그려 놓았을 때에는 우리는 그것을 보고 쾌감을 느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방이 지식과 쾌감의 근원이라 한다.

예술의 목적은 사물들의 외적인 모습이 아니라 내적인 의미를 재현하는 것이다.

사물의 외적인 모습만을 반복한다면 예술에 있어 창조란 새로운 물질을 만드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외적인 모습이 아닌 '내적 의미'에 초점을 맞춘다. 내적 의미는 창작자의 해석이 포함되기 때문에 같은 대상을 두고 재현을 하더라도 다른 외형적 결과로 나타날 수 있다. 결국 '내적 의미'를 '외적인 모습'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하는 예술가의 역할이다.

<피에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1498-99

피에타 (pieta)는 '경외', '연민' 등의 의미를 가진다. 그리스도교에서 주로 다루는 주제로 십자가에서 내려온 예수를 안고 슬퍼하는 마리아를 그린다. 이 작품의 특징은 성인 남성인 예수의 몸이 여성인 마리아보다 현저히 작아는 것이다. 외형을 모방한다는 점에 주목한다면 마리아가 여느 남성보다 월등한 피지컬을 보유했었다는 기록이나 전승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것은 없다. 그렇다면 미켈란젤로는 왜 예수를 그의 육체적 어머니의 품에 쏙 들어가도록 작게 만들었을까? 미켈란젤로가 성경의 이 장면을 떠올렸을 때 그가 전하고자 하는 바는 마리아의 어머니로서의 마음이었을지 모른다. 삼위일체의 한 축이자 신 그 자체인 예수는 죽음 이후 힘없이 늘어진 육체만을 남겼고, 그것이 자신의 몸으로 낳아 기른 그녀의 아들이었다. 어머니인 그녀에게 아들의 죽음은 신의 뜻대로 이루어진 받아들여야 할 숙명이었고 그녀는 신에 대한 사랑과 아들에 대한 사랑으로 여느 어머니보다 더 어머니 같은 '보편적' 어머니의 모습을 보였다. 미켈란젤로는 '어머니 중의 어머니'의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혹은 애처로운 예수의 모습을 강조하기 위해 '외적인' 모순을 만들어냈을지도 모른다. 미켈란젤로의 재현이 '창조'인 이유이다.

------------

본 <서양미술사>는 온라인 강의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됩니다. 총 28장으로 구성된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7장씩 4부로 구성하고 각 7장 이후에 예술론을 추가하여 32강으로 구성했습니다.  1부를 마치고 5월 15일에 2부의 시작, 8장부터 이어갑니다.

이전 08화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 8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