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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mo ludens Apr 17. 2024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 7장

동방의 미술 - 2세기에서 13세기까지: 이슬람과 중국

서양미술사를 논함에 있어서 절대로 빠질 수 없는 것은 외적인 요소들이다. 유럽이라 불리는 가상의 지형은 동형질의 문화적 산물이 아니다. 고대 이집트의 유산이 고대 그리스로 이어지고, 고대 그리스는 그들의 유산을 독자적인 방식으로 소화시켜 받아들여 자신들의 방식을 찾아냈다. 이러한 융합적 성격은 유럽이라 불리는 세계의 외부에서 주어지는 요소들의 개입으로 더욱 풍부한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서양미술의 풍부한 산물은 그들이 그들 외부에 있는 다양한 문화를 유럽화한다는데 있다. 이 가운데 종교적으로 그들과 가장 위험한 관계를 유지한 이슬람과 지리적으로 아주 먼 중국의 미술은 직접적 혹은 간접적인 방식으로 유럽인의 미술에 영향을 주었다.

이슬람과의 조우

이슬람과 기독교 세계의 만남은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모함메드가 이 종교를 만든 610년경 이후 서서히 잦아졌다. 초창기 이슬람교도가 분포하던 지역은 소득 수준이 매우 떨어지는 곳이었다. 그들이 수입을 얻는 방식은 사막을 건너 무역을 하는 것으로 점차 전문화되었다. 그들은 아라비아 상인이라 불렸다. 아랍은 이슬람을 종교로 삼고 아랍어를 쓰는 국가를 일컫는 말인데 다양한 어원이 제기된다. 메소포타미아 지역 '서쪽에' 위치했다 하여 '서쪽의'라는 뜻에서 기원했다는 설도 있고, '사막 지역을 유랑하던' 이들을 뜻한다고 하여 '유랑' 혹은 '유목'인을 뜻한다는 설도 있다. 이들은 뛰어난 상인들로 성장하여 계산에 적합한 숫자를 만들어내어 우리가 알고 있는 십진법으로 표기되는 아라비아 숫자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이슬람 세력은 점차 세력을 확장하여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위치한 이베리아 반도까지 점령한다. 이 지배는 1492년까지 지속되는데 이슬람의 한 부족인 무어인들을 완전히 이베리아 반도에서 몰아낸 것을 레콩키스타 (Reconquista, 재탈환)라고 한다. 포르투갈어로는 헤콩키스타라고 발음하며 스페인보다는 일찍 재탈환에 성공했다. 1492년 이사벨 여왕은 이슬람 세력을 축출하고 유럽을 기독교 청정국가로 만들었다는 자부심에 가득 찼다. 이는 콜럼버스의 신항로 개척을 장려하는 것에 결정적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슬람이 물러갔지만 그들과의 조우는 많은 것을 남겼다. 이베리아 반도의 곳곳에 이슬람의 문화적 흔적이 남게 되었고, 미술사적으로 이 흔적은 자원 (Ressource)이 되어 이후 서양미술사에 다양한 방식으로 영향을 남긴다.


내 이름은 빨강

이슬람 미술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우상숭배금지'로 시작할 수밖에 없다. 이슬람은 신의 모상을 그리는 것을 금지했다. 인간의 시선으로 바라본 신의 모습은 완전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신의 시선'이 필요했다. 그것이 기하학이다.

살아있는 것을 그리는 자 최후의 심판의 날에 정죄를 받을 것이다.

- 무함마드의 <하디스> 中 -

기본적으로 이슬람은 대상에 대한 직접적 묘사를 금지한다. 세밀화의 경우 신을 모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허용되었는데 주제는 엄격히 제한되었다. 당연히 원근법을 사용하는 것은 극도로 주의를 요했다. 그 이유는 '한 인간의 시선'이 원근법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신의 시선'만을 허용했고 그것은 인간의 도덕적 판단을 하는 것은 신의 권능이라는 의미이다. 신은 '한 인간'의 관점에만 얽매여 있지 않기 때문에 모든 관점을 포괄하여 옳고 그름에 대한 절대적 객관성을 보장한다. 따라서 세밀화가라고 불리는 이들이 대상에 대한 독특한 관점을 갖는 것은 율법으로 금지된 것이다.

<정원에서의 연회>, 피르도우시의 샤나메, 15세기
나의 세밀화가는 실제로 말을 보면서 그리지 않거든, 나의 화가들은 당연히 기억에 있는 그대로, 기계적으로 말을 그리지.

- <내 이름은 빨강> 中, 오르한 파묵 -

오르한 파묵의 소설 <내 이름은 빨강>은 유럽 화가의 화풍에 관심을 갖는 술탄과 그의 궁정화가들 사이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살인자를 찾는 과정에서 세밀화가들이 남기는 '시녀 방법'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시녀 방법'은 화가들이 자기도 모르게 남기는 버릇을 뜻하는데 이슬람의 세밀화가들은 대상을 그릴 때 자신의 흔적이 남기지 않아야 한다는 룰에 어긋난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남기게 되어 스스로를 드러내게 되는 이 버릇은 살인자를 드러내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곧 기억하는 것이라네.

이슬람의 화가들은 플라톤이 말하는 '상기설'의 방식과 유사한 기술로 그림을 그린다. 플라톤은 인간의 영혼이 이데아의 기억을 다시 상기하는 것이 철학, 즉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라 했다. 이슬람의 화가들의 경우에 그들은 선조들의 눈과 손을 통해 전달된 기억을 자신의 몸에 체득해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그림을 그리는 행위였다. 그들이 그리는 것은 사물을 바라보는 가장 올바른 방식, 플라톤의 표현을 따르자면 이데아를 관조하는 방식을 선조들에게 배워서 전달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소설에서 오르한 파묵은 빨강의 의미를 설명한다.


<그렇다면 빨강의 의미는 무엇인가?

기억에 의지해 말을 그리는 장님 세밀화가가 물었다.

“색의 의미는 그것이 우리 앞에 있다는 뜻이며, 그것을 우리가 본다는 것을 뜻하지. 보이지 않는 사람에겐 빨강을 설명할 수 없네!”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 이단자, 불신자들은 신을 부정하고자 할 때 신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네.”

“그러나 신은 보는 사람에게는 보이네. 그래서 코란에는 보는 사람과 보지 않는 사람이 절대로 같지 않다고 씌어 있지.”

그 순간에도 견습생은 말의 안장 덮개를 천천히 나로 칠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그림의 검고 흰 부분을 나의 충만함과 힘 그리고 생동감으로 채우는 것은 너무나 기분 좋은 일이었다. 붓이 나를 종이에 퍼지게 할 때는 온몸이 근질거리듯 즐거웠다. 이렇게 내가 칠해지는 것은 마치 이 세상을 향해 “되라!”라고 하자마자 세상이 온통 나의 핏빛 색으로 물드는 것과 같은 일이다. 나를 보지 않는 사람은 나를 부인하겠지만 나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여기서 빨강은 창세기를 떠올리면 그 의미가 해석된다. 태초에 어둠이 있었고 빛이 있으라 하시기에 밝음이 생겨났다. 여기서 빨강은 세상을 향해 "돼라!"라고 명령하고 그것이 빨강이 된다. 빨강은 의지이며 빛 그 자체이다. 빨강은 신을 믿는 자에게 보이는 것과 같이 늘 있는 것이다. 빨강은 '충만함과 힘 그리고 생동감'이다. 이슬람의 화가들은 신을 그리기 위해 기하학 이외에 색을 사용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라베스크

아라베스크 문양은 신을 그릴 수 있는 두 가지 도구인 기하학과 색으로만 이루어진 장식예술이다. 이 문양은 이후 서양미술사에서 자주 발견되는데 다양한 방식으로 차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체코의 화가 알폰스 무하(Alfonse Mucha)는 무난한 그림을 그리던 화가였으나 이후 자신의 고유한 스타일을 갖게 된다. 사라 베른하르트를 위한 <기스몬다> 포스터의 경우 가장 윗부분은 비잔틴의 모자이크 기법을 사용하고 있고 그 아랫부분과 의상은 아라베스크 문양을 사용하고 있다. <계절, 봄>에서도 윗부분과 테두리를 기하학적으로 표현된 식물로 장식하고 있다.

<포옹> 구스타프 클림트, 1905-07

오스트리아의 화가 클림트의 그림을 가득 메우고 있는 장식들 역시 아라베스크의 영향임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슬람 건축

이슬람의 건축양식의 기본 구조는 로마의 건축이다. 고대 로마가 에트루리아인의 건설기술을 고스란히 흡수하듯 낮은 문명이 높은 문명의 그것을 이어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해 보인다.

로마네스크식 모스크

로마풍이라 불리는 로마네스크 (Romanesque)는 로마 건축을 상징하는 아치구조는 기둥 위에 올라앉아 보다 높은 내부 공간을 구성하게 되었다. 내부 공간의 개방감을 확보하고 높은 층고를 가능케 했다. 원형기둥으로 대표되는 그리스의 건축 위에 로마의 건축이 올라앉으며 새로운 조합의 아케이드 (Arcade) 공간이 탄생했다.

이슬람식 아케이드

열주랑이라고 번역되는 아케이드는 이슬람 문화를 만나서 또 다른 조합을 만들어 낸다. 그들의 장식예술인 아라베스크와 만나 로마네스크식 아치가 다공질로 바뀌었다. 단순한 아치의 형태에 동글동글한 홈이 생기고 밋밋했던 표현에 기하학적 식물의 패턴이 조각되었다. 둔탁한 받침기둥이 날씬한 한쌍의 기둥으로 대체되어 전체적인 무게감을 가벼이 했다. 무거운 구조체의 다이어트는 고딕 건축에서 보다 철저한 모습을 보이게 된다.

알함브라

이슬람의 흔적이 마지막까지 머물렀던 이베리아 반도의 남쪽에 위치한 그라나다(Granada)에는 무어인들이 남긴 걸작이 위치한다. 알함브라 (Alhambra)는 '붉은 성채'라는 뜻이라고 한다.

멀리서 보면 이 성채는 이슬람의 분위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9세기 이전부터 이곳은 로마의 요새가 있었다. 그 토대 위에 성벽과 토대를 올린 것이 9세기의 에미르 (이슬람의 장군직)였다. 1238년 술탄 무함메드 1세가 수도를 건설하며 100년에 걸쳐 화려한 궁궐을 추가로 건설했다.

알함브라의 나스리 궁전은 이슬람의 정취가 물씬 풍긴다. 세필화를 그리듯 섬세하고 레이스 장식과 같이 다공질의 구조체가 무게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가볍게 늘씬한 기둥 위에 올라앉았다. 좌우는 완전한 대칭 (symmetry)을 이루고 있고 아래로는 단출한 물길이 흐르며 시선의 중앙에는 분수대가 위치한다. 구조체가 하늘로 날아갈 듯이 가벼운 것과 같이 분수대에서는 물이 하늘로 솟구친다.

이슬람의 정원 구성은 최대한 좌우 대칭을 이루기 위해 애쓴다. 이후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 구성에서도 이 대칭성은 절대성과 완전성을 뜻하는 또 하나의 표현법이 되었다.

정원 곳곳에 위치한 낮은 연못을 두어 거울과 같은 효과를 내어 또 다른 대칭성을 드러낸다.

알함브라를 거닐다 보면 이질적인 양식의 건물이 눈에 들어오는데 이슬람의 장식 예술이 없는 로마식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카를로스 5세 궁전의 회랑과 안뜰

1526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로스 5세는 포르투갈의 이사벨 공주와 결혼하고 신혼여행으로 그라나다를 방문한다. 알함브라 궁전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그는 이곳에 머물기로 정하고 미켈란젤로의 제자 페드로 마추카 (Pedro Machuca)에게 궁전의 설계를 지시한다. 궁전의 회랑을 보면 이탈리아에 정착하여 토착화된 도리아 양식인 토스카나 양식의 기둥 위에 이오니아 양식의 열주랑이 위치한다. 콜로세움에서 보았던 슈퍼포지치온 (Superposition)이다. 알함브라 궁전에는 로마의 건축을 기반으로 이슬람의 장식예술이 조합된 것과 이후 로마의 건축 양식을 이어받은 르네상스 건축이 공존한다.

아라베스크 문양은 이후 19세기부터 등장하는 '새로운 예술'인 아르누보 (Art nouveau)에서 완전히 유럽 건축에 정착한다.

호텔 타셀, 빅토르 오르타 1893

아르누보 건축은 장식적 요소가 강하게 드러난다. 이 장식성은 아라베스크에서 익힌 식물의 기하학적 선을 강조한다. 이러한 선의 움직임은 철학자 앙리 베르그손 (Henry Bergson)의 '생명의 약동' (Elan vital) 철학의 이론적 지지를 얻어 단순한 장식 이상의 가치를 다루게 된다.

아랍문화원, 장 누벨, 1987

현대 건축가인 장 누벨은 아랍적 장식을 카메라 조리개와 연결시켜 파리의 <아랍문화원>에서 독특한 창을 만들어 냈다.

미나렛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1617

이스탄불의 하기아 소피아의 건너편에는 '블루모스크'라는 별명을 가진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가 있다. 동로마 시기에 지어진 이 건물을 능가하는 이슬람의 걸작을 만들기 위해 오스만 최고의 건축가 '미마르 시난'이 나섰다. 안타깝게도 규모 면에서 하기아 소피아를 넘지는 못했으나 이슬람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데는 성공했다. 이 건물에서 보이는 특징은 하기아 소피아에서 등장한 펜덴티브 돔 구조의 발전과 여섯 개의 기둥이 주면을 둘러싸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하기아 소피아도 네 개의 탑이 존재하지만 이슬람이 이 지역을 점령한 이후에 추가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 탑의 개수는 모스크의 중요도를 나타낸다. 일반적으로 탑이 많은 건물은 더 중요한 건물이다. 이 탑의 이름은 미나레트(Minarete)이다. 미나레트는 '등대'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슬람 문화에서 빛은 신을 나타내는 그 자체이다.

위의 이슬람 국가들의 국기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것은 초승달과 별이다. (예외적으로 하현달 모양이 있긴 하다.) 초승달은 어둠이 지난 직후의 달의 모양이며 '밝음의 시작'이다. 별은 '빛'을 그대로 구현한 것이다.


이슬람의 미술은 '신'을 그리고 있다. 신을 그리는 방식으로 '신의 모상'을 그리지 않고 '신이 드러나는' 것을 통해 그린다. <내 이름은 빨강>에 쓰여 있듯 신은 보고자 하는 자에게 보인다. 기하학적 패턴을 본 자들은 자연에 내재한 신의 도면을 볼 수 있다. 신은 자연을 그의 설계도대로 만들었고 그 설계도에 사용된 건축기호가 기하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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