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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mo ludens May 15. 2024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 8장

혼돈기의 미술 - 5세기에서 11세기: 유럽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기원후 476년 이후 서유럽은 급격한 혼란의 시기를 겪게 된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한 때 이 시기를 '암흑시기'(dark age)라 부르기도 했다. '암흑'이라고 불렀던 이유는 다양하다. 우리가 떠올리는 어둡고 칙칙하며 뻘밭의 지저분한 중세도시는 소설 속의 판타지와 같은 하나의 이미지에 불과하다. 실제로 600여 년의 시간 내내 어둡고 지저분한 도시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기에 이 시기를 온전히 어둠으로만 뒤덮여 있었다고 상상하는 것은 허구이자 역사를 단순화하여 받아들이고자 하는 편협하고 나태한 인식일 수 있다. 실제로 몰락하는 로마와 같은 도시가 있었던 반면 성장하고 정점을 찍은 도시들도 존재했기 때문이다. '암흑'시기를 주장하는 역사학자들의 이유는 사람들의 삶의 측면뿐 아니라 역사적 사료의 부재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많은 사료들이 발견되었고 '암흑'은 서서히 밝음으로 돌아섰다. 그리고 사실상 600여 년의 시간 동안 유럽은 새로운 창조를 위한 의미 있는 혼돈의 시간을 보냈다. 분열과 혼란은 통일과 안정만큼이나 충분한 강도의 창조력을 가진다. 혼돈기를 곰브리치는 'melting pot'(용광로)라고 칭한 것도 혼돈 속에서 발생하는 문화의 융합현상 때문이다.


역사적 배경

곰브리치의 시대구분이 5세기부터 11세기인 이유는 서로마 멸망(476) 이후 구심점이 사라진 기간을 1차 십자군 원정(1094)으로 상정했기 때문이다. 물론 십자군 원정이 공백 상태의 서유럽에 혜성같이 등장한 권력을 확인하는 사건은 아니지만 가톨릭 세계의 연대를 통한 공통의 가치가 공유되었음을 보여준다고 볼 수는 있다. 그리고 이 기간 서유럽은 로마의 영광을 이어받기 위한 세력이 등장하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대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바로는 샤를마뉴(Charlemagne)이다. 카롤루스 대제는 로마 지역을 복원하고 서로마 교회의 종교적 지위를 이어받는 두 가지의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그를 통해 등장한 세력이 신성로마제국(holy roman empire)이다. 이름에서도 세속과 교회의 권력 모두가 포함되어 있는 의도가 다분한 작명이다.

476년에 서로마가 멸망한 이후 서유럽의 지도는 세기마다 엄청난 변화를 보인다.

왼쪽: 4세기 동서로마 공존시 유럽지도, 오른쪽: 서로마 멸망 후 5세기 유럽지도

동로마는 자신의 영토를 수호한 반면 와해된 서로마는 여러 부족 및 왕국으로 쪼개져 혼돈의 상태에 빠진다.

8세기 지도

각축전을 벌이던 중 카롤루스 대제의 정복활동으로 서로마의 상당 지역이 통합된다.

9,10세기 지도

카롤루스 대제 사후 구심점을 잃은 신성로마제국은 다시 나뉘게 되고 현재의 민족국가 단위의 재편이 일어나게 된다.


브리튼 섬

브리튼 섬은 서로마 제국시절에도 완전히 정복되지 않은 지역이었다. 이후 온 지구의 시간대에 지배력을 행사하지 않은 곳이 없는 "해가 지지 않는" 영국은 로마의 카이사르에 의해 처음으로 로마의 문명을 접하게 된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원정길에 브리튼에 탐사대를 보내는데 이것이 로마가 브리튼 섬을 처음으로 마주하게 되는 시점이다. 이후 8세기말에서 11세기까지 섬의 주인이었던 브리튼인과 북부의 켈트족을 밀어내고 자리를 차지한 이들이 등장했다.

바이킹의 브리튼 점 진출

바다를 건너온 북방인 노르만족은 영국의 여러 부분에 진출하게 되고 대표적으로 앵글로족과 색슨족이 각각 영국의 북부와 남부를 지배했다. 이로써 이 섬에는 원주민들의 문화와 로마의 문화 그리고 노르만족의 문화가 혼합된 형태로 생겨난다.

<올 세인트 교회>, 얼스 바튼, 노스햄튼샤이어, 1000년경

이 시기에 지어진 <올 세인트 교회>는 로마의 아치와 창문 양식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으며 목조구조에 석조건축이라는 재료와 구조의 불일치된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노르만 민족에서 종종 드러나는 목조구조의 흔적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북유럽 및 독일에서 흔히 보이는 전통 가옥

구조적인 부분은 목조가 맡고 나머지 벽 부분은 빈부분을 채우는 역할만을 하는 건축형태를 보인다. 규모가 주택정도일 경우에는 문제가 되지 않으나 교회와 같은 공공 건축으로 확대되면 재료는 변할 수밖에 없다. 물론 건물의 지속성의 면에서도 나무와 돌은 그것을 담고 있는 대상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목조로 건축을 하던 동아시아에 2000년이 넘는 건축물이 발견되지 않는 이유는 재료의 영향이 크다. 영원성을 상징하는 건물이 목조로 지어질 경우 담고자 하는 가치를 재료가 쫓을 수 없다. 일본의 이세신궁은 이를 독특한 방법으로 해결해보려 하는데 20년을 주기로 건물을 옆으로 옮겨 짓는 방식을 이용한다. 하지만 이것은 아주 예외적인 경우다.


고전적 전통과 토착 미술의 충돌과 새로운 미술의 탄생

<성 루가>, 필사본 복음서의 한 페이지, 성 갈렌 수도원의 도서관, 750년경

분열된 제국에서는 각 지역들의 토착 세력들이 지배권을 회수했다. 로마라는 구심점으로 모였던 그들에게 상실된 제국의 지배권은 그들 고유의 문화를 되찾는 계기가 된다. 하지만 문화적으로 발전된 로마의 그것에 완전히 눈을 돌리기는 힘들었다. 종교적으로 이미 자리를 잡은 그리스도교는 민중들을 하나로 묶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민족 지배자들이 이 지역을 점령하거나 로마점령 이전의 지배층이 다시 권력을 잡더라도 로마의 문화적 요소는 이미 그들의 것이 되어있었다.

두 가지 전통, 즉 고전적인 전통과 토착 미술가들의 취향이 서로 충돌하는 바람에 무엇인가 새로운 미술이 서유럽에서 자라나기 시작했다.

곰브리치는 취향의 충돌을 이야기한다. 예술가는 이미 체득한 로마의 문화적 요소와 토착의 문화적 요소들 사이에 어떤 쪽을 택할지에 대한 선택을 강요받는다. 때로는 국수주의적 태도로 토착미술을 고수하려 할 것이고 때로는 로마의 우월한 미술적 성취를 택하는 문화 사대주의적 태도를 취할 수도 있다. 둘의 격렬한 충돌 가운데 둘의 장점을 취하고 단점을 배제하고자 하는 집단이 등장할 것이다. 셋 중 어느 쪽이 승리할지 장담할 수는 없지만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취향'의 문제이다. 예술가 개인의 취향의 문제이기보다는 문화를 향유하는 집단의 결정이 방향을 결정하는 경우가 많다. 프랑스의 철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dieu)는 <구별 짓기> (1979)에서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을 다룬다. 여기서 취향은 '경제적 수단을 넘어 사회적 이동성을 촉진하는 교육 등 비금융적 자산인 문화 자본이 많은 사람들이 사회 내에서 구성'한다고 말한다.


새로운 질서를 향하여...

사분오열된 서유럽은 새로운 지배자의 등장과 함께 새로운 질서를 형성해 가기 시작한다.

<카롤루스 대제>, 알브레히트 뒤러, 1513

그는 신성로마제국의 기틀을 마련한 프랑크 왕국의 지도자이다. 이름에서 드러나듯 신성로마제국(Sacrum romanum imperium)은 신성과 로마의 세속 권력을 모두 가지고자 했다. 로마의 후계자임을 자처한 카롤루스 대제는 뒤러의 그림에서와 같이 오른손에는 세속의 권력을 상징하는 칼과 왼손에는 종교적 지배의 상징인 십자가가 달린 지구본(Globus cruciger)을 쥐고 있다. 그의 왕관도 십자가로 장식하여 세속과 교회의 권력 모두를 취하고자 했음이 드러난다.

<아헨 대성당>

카롤링거 왕조를 대표하는 아헨의 대성당은 건축사에서 새로운 양식이라 부르는 '로마네스크'가 등장하기 전 새로운 질서를 위한 단계로 보인다. 아랫부분은 아치와 기둥의 조합이 아케이드를 구성하고 있고 그 위에 두 층의 아케이드가 올라서있다. 두 층 가운데 아래층은 코린트 양식의 기둥 위에 각 3개의 작은 아치로 구성된 모듈이 있다. 구조적으로 봤을 때 군더더기는 아케이드의 가장 윗부분의 아치를 받치고 있는 각각 두 쌍의 코린트 기둥이다. 아치는 그 자체로 완결된 구조단위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필요 없는 부분에 기둥이 위치하고 있으며 이것은 시각적 연결성을 위해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아헨 대성당> 내부

다른 부분들을 보면 로마의 유산인 아치를 충실히 구현한 것을 볼 수 있다. 이후 구조적 발전을 겪으며 이 구조체는 좀 더 가볍고 높게 성장한다. 로마네스크를 거쳐 고딕으로 나아가며 건축물은 불필요한 부분들을 버리고 자기의 무게를 줄이는 대대적인 다이어트를 통해 어둡고 음침한 내부에서 높고 환한 빛의 교회가 된다.


다양한 표현과 선택적 표현

회화에서 이 시기는 로마의 원본을 두고도 다양한 결과물을 내었던 시기다.

<성 마태오>. 왼편: 필사본 복음서의 한 페이지, 800년경, 오른편: 에페르네 시립도서, 830년경

왼편의 필사본을 그린 미술가는 성 마태오의 정적인 부분을 강조하려 한 듯하다. 학자로서의 성 마태오를 표현하기에 침착하고 고요한 마음으로 신의 음성을 이성적 활동으로 써 내려가는 듯하다. 반면 오른편의 그림은 성 마테오가 신의 영감을 받은 종교적 열정을 무아의 상태에서 써내려 감을 강조하려는 듯하다. 두 그림에서 중세의 미술가의 각기 다른 성 마태오에 대한 해석을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신에 대한 믿음이 그가 우리에게 준 이성적 사고를 통해 도달할 수 있는 것인지, 열의와 환희에 의해 가능한 것인지 고민해 볼 수 있다.

왼편: <사도들의 발을 씻기는 그리스도>, 오토 3세의 복음서, 1000년경, 오른편: <타락한 아담과 이브>, 힐데스하임의 청동문, 1015년경

중세의 미술가들은 이집트의 미술가들이 아는 대로 그리거나 그리스의 미술가들이 보이는 대로 그리는 방식과 달리 그들이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형식이 아닌 내용에 담는 것에 집중했다. 왼편의 그림에서 그리스도와 주변인들에 대한 묘사는 지극히 비현실적 구도를 보인다. 그리스도 뒤편의 황금색 벽과 이오니아 기둥이 뒤편의 도시를 떠받치는 것은 상상조차 불가능하다 그리고 왼편의 무리는 원근법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 그림의 목적은 그것과는 무관하다. 미술가는 저 장면을 그대로 재현하고자 하는 생각이 전혀 없다. 그는 예수와 베드로가 나누는 "세족"과 "구원"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다. <요한복음> 13장의 내용을 다루고 있는데 예수가 우리가 지은 원죄를 대속하고 원죄 이후 우리가 저지른 죄까지 모두 씻어주고자 함을 이야기한다.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우리의 원죄를 대속하고 세족으로 이 세상에서 저지른 죄까지 씻어줌으로써 구약의 신과 맺었던 계약에 대한 불이행을 예수가 대속하고 새로운 계약을 맺음으로써 인류가 예수와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른편의 그림은 원죄를 저지른 직후 그리스도가 아담에게 죄를 묻는 장면을 보여준다. 이 장소가 에덴동산이며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는 전혀 그려지지 않는다. 왼편에 그리스도가 손가락으로 아담을 가리키며 아담의 죄를 묻고 있다. 아담은 몸을 숙이고 부끄러워하며 이브를 가리키며 그녀가 부추긴 것이라 변명한다. 이브는 몸을 더 숙이며 땅바닥의 뱀이 자신을 유혹한 것이라 책임을 떠넘긴다. 이 모든 사건의 소재인 선악과로 보이는 식물이 아담과 이브 사이에 위치한다. 미술가는 필요한 정보 이외의 것들은 모두 삭제했다. 그에게는 성경의 내용을 선택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내용의 전달에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제국의 와해와 분열은 삶과 예술의 많은 부분에서 변화를 가져왔다. 이 변화는 그 자체로 좋고 나쁨을 야기하지 않는다. 제국의 어두운 면은 다소 밝아진 부분도 있을 것이고 밝은 면이 사라진 부분도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술에 있어서도 기술적 퇴보를 겪는 것이 미술사적으로 '상실'로만 바라볼 수는 없다. 양식화된 미술이 놓치고 있는 것을 와해되는 양식의 시기에 되찾는 것도 있다. 어떤 것이 가치가 있는지는 이후의 예술가들이 이 시기의 미술에서 어떤 '자원'을 발견하는가에 따라 수많은 방식으로 드러날 것이다.


다음 시간은 <9장. 12세기: 전투적인 교회>에서 로마네스크 양식을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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