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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mo ludens Jun 05. 2024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 11장

귀족과 시민: 14세기

중세 말기의 유럽 사회는 여러 가지 사회적 변화를 겪게 된다. 교황을 중심으로 한 교회의 권력과 세속 군주들의 권력의 충돌, 경제적으로는 토지를 기반으로 한 봉건제도에서 무역 도시를 중심으로 한 시장 경제가 싹트면서 기존 기득권층 대규모 농장의 소유주인 귀족들과 성장하는 시민계층인 부르주아의 대립 등의 계급 갈등이 시작되었다. 여러 도시들은 성장 과정에서 상인들의 역할에 컸고 그들에게 여러 권리를 보장했다. 막대한 상업 이익을 얻은 도시들은 "자유도시"를 선포했고 엄청난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도시를 중심으로 작은 도시들은 흡수통합되어 갔다. 새로운 권력의 재편과 무역의 성장은 전 유럽의 활발한 움직임을 만들어냈고 문화적 전파는 소통을 통한 하나의 유사한 양식을 만들어냈다. 유럽에서의 첫 번째 국제양식(International Style)의 등장이다.


권력과 문화의 변화

교회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간 중세의 사회구조는 200여 년 사이에 발생한 상징적 사건을 통해 권력의 큰 이동이 발생한다. 1077년 교황 그레고리오 7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와 성직자 서임권을 두고 갈등을 벌이다 이탈리아의 도시 카노사(Canossa)에서 하인리히에게 굴욕은 주는 것으로 교회의 승리를 선포한다. 

<카노사의 하인리히>, 에두아르드 슈보이저, 1862

1309년 프랑크 왕국의 왕 필립 4세는 교황청을 로마에서 프랑스의 남부도시 아비뇽(Avignon)으로 옮기고 교황 클레멘스 5세를 새로 지은 아비뇽의 교황청에 가둔다. 70여 년이 지난 1376년 교황 그레고리오 11세는 아비뇽을 탈출하여 1377년 로마에 입성한 후 이듬해인 1378년 로마에서 사망한다. 아래 그림에서 로마의 가운데 앉아있는 검은 옷을 입은 여성은 남편을 잃은 미망인과 같이 교황령을 상실한 로마를 표현한다.

교황령이 상실된 로마, 프랑스 국립도서관 소장

이후 역사가들은 교황이 '유수', 즉 강제로 끌려갔다는 데에 이견을 제시하고 있는데 교황 나름의 정치적 판단에 의한 것이라는 견해다. 어찌 되었든 교황청의 이동은 단순히 교황의 부임지의 이동이 아닌 문화 중심의 이동을 뜻하고 로마의 문화가 프랑스로, 프랑스의 문화가 다시 로마로 이동했음을 의미한다. 두 문화의 미술은 각자의 방식으로 서로를 흡수하고 발전했다. 각자의 방식으로 발전하는 동시에 공유하는 양식적 통일성을 지니게 된 것이다.


중세도시와 도시국가의 발전

교황과 황제의 권력다툼은 도시국가의 성장을 가능케 했다. 고래싸움에 큰 새우들은 자신의 지위를 확보한 격이다. 두 고래의 권력은 이전과 같지 못했고 각 도시들은 각자도생의 길을 걸으며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룬 도시와 큰 도시에 병합되어 사라지는 도시들로 나뉘었다. 베네치아와 제노바와 같은 해상국가(Stato da mare)들은 동방의 상품들을 유럽에 공급하여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거두었고 그 과정에서 다양한 민족과 문화를 경험하고 자유로운 교류를 통한 창조력을 획득했다. 13세기부터 강력한 경제력을 유지하던 베네치아는 선박 생산에 있어서 분업과 책임형의 생산 체계를 구축하고 특허에 대한 개념을 장착했다. 

<도제궁>, 1342-50

종교 건물에 쓰이던 고딕 양식은 이제 공공건물의 영역에도 쓰이게 되었다. 베네치아 공국의 지도자인 도제(Doge)의 집무실이 있는 도제궁은 일반 시민들도 출입이 가능했다. 이러한 공공건물은 베네치아 시민들의 문화 수준을 보여주기에 당시 가장 화려한 고딕 양식의 적용은 베네치아 시민의 자랑거리이자 도시국가의 엄청난 성장을 보여주는 반증이기도 했다. 

산마르코 대성당과 다양한 아치 종류

산 마르코 대성당의 입면은 다양한 아치들이 혼재해서 쓰였다. 로마의 반원아치부터 첨두형 아치에 다양한 곡선이 포함된 변형된 아치들의 조합으로 화려함을 뽐낸다. 

독일의 중세도시를 연구한 칼 그루버(Karl Gruber)는 전형적인 도시의 형태들을 다양한 예를 통해 보여준다.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Strassbourg)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대성당을 성벽이 둘러싸고 있었다. 차츰 도시는 확장하여 도시의 입구에서 시작되는 긴 도로 (Messe)를 따라 건물들이 나란히 채워지게 된다. 왼쪽 그림의 작은 원형으로 표시된 것은 시청사 건물로 점차 세속적 삶의 행정적 부분의 요구에 따라 중세 도시에 등장하게 된다.

시청사(Rathaus) 건물은 대성당 다음으로 화려한 고딕 양식을 취하며 도시의 랜드마크 역할을 한다. 도시가 교회와 세속 군주들로부터 자유로워지면 시청의 역할과 크기는 점차 성장하게 된다.


자유도시(Freie Städte)

중세의 도시를 대표하는 문장은 다음과 같다.


<Stadtluft macht frei (nach Jahr und Tag)>

도시의 공기가 자유롭게 만든다. (일 년과 하루가 지나면)


중세의 도시는 거주한 지 1년과 하루가 지나면 이전 신분과 상관없이 도시의 시민권을 부여했다. 봉건제도 하에서 땅에 예속된 삶을 살아오던 농도들은 농촌을 탈출하여 도시로 향했다. 도시는 무역과 상업으로 일자리가 넘쳐났고 변화하는 경제 상황에 따라 필요한 노동력이 변했다. 도시민은 상황에 따라 일자리를 선택했고 그에 따라 생산력도 증대되었다. 상인들과 기업가는 자유로운 경제활동으로 서로 경쟁하여 개인의 창의성을 발현할 기회를 가졌다. 

상업과 무역의 발달은 군주의 땅에 묶여있던 인적 자원들의 활발한 이동으로 이어졌고 뛰어난 인재의 개인적 역량에 대한 평가도 높아졌다. 도시와 도시 사이의 물적, 인적 교류는 문화적인 측면에서의 융합을 이루어냈고 미술에서의 모방과 발전을 이끌었다. 미술에서 양식적 발전은 이러한 교류 속에서 어떠한 지향점을 갖게 되었는데 알프스 이북에서 급속히 퍼지던 고딕 양식은 각 도시의 성당 건축에서 단일한 양식적 통일성을 띄게 되었고 뒤늦은 회화의 발전에서도 발달된 시각적 기법들이 공유되었다.

중세 후기 유럽의 자유도시는 여러 장점이 눈에 띄는 반면 어두운 이면이 공존했다. 사실상 시민권을 보유한 자유민의 수가 많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인구의 2~3%에 불과한 자유시민은 자유를 누릴 만큼의 경제적 안정성이 보장되어야만 자격을 유지할 수 있다는 또 다른 계급의 벽을 확인시켜 주는 사실에 불과했다. 경제적 이익을 목적으로 개인과 공동체가 연대하여 길드(조합)를 조직했고 조합 간의 알력 다툼은 날로 심각해졌다. 사소한 다툼에서 큰 법적 분쟁까지 정치적 불안정성은 노골적인 경제적 이익을 위해 커져만 갔다. 기존 세력들에 대항하기 위한 신흥세력은 적의 적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힘이 많이 빠졌지만 위세를 유지하던 군주들이었다. 이런 군주와의 결탁은 이후 절대왕정으로의 이행에 큰 역할을 하게 된다.

도시에 집중된 경제적 이익은 도시민들의 자부심을 고취시켰고 도시민들 사이에서는 농장(villa)에서 일하는 사람에 대한 멸시에 커져갔다. 이에 불만을 품은 일부 세력이 도시민에 대한 불만으로 폭도로 변했는데 그들이 빌런(villain, 농장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는 말의 기원이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빌런은 사회구조가 바뀌면서 핍박받게 된 세력의 누적된 분노가 만들어낸 결과물이지 타고난 악당은 아니다. 자본주의의 싹이 트는 이 시기에 경제적 격차는 사는 곳의 차이를 계급의 차이로 인식하게 했고 멸시의 눈초리는 누군가를 악인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섬세한 묘사

자유로운 사회의 분위기는 미술에서의 표현을 풍성하게 하는데 일조했다. 이전 시대의 미술이 경직된 사회구조를 그대로 반영했다면 이 시기의 미술은 자유로운 감정과 신체의 묘사가 도드라진다.

좌: <성모와 아기예수>, 에브뢰즤 잔, 1324-39; 중: <수태고지>, 스바비아 필사복 복음서, 1150년경; 우: <오그니산티 마돈나>, 조토, 1310

스바비아 필사본에 등장하는 성모는 경직된 자세와 특색 없는 표정과 자세를 취하고 있다. 대천사 가브리엘과 마리아는 필요한 것 이상의 어떠한 표현도 하지 않고 있으며 '여기 있다'는 것 이외에 극도로 제한된 정보만을 공개한다. 마리아의 펴보인 두 손바닥은 수태고지를 듣고 놀라고 당황하는 마음을 표현하지만 표정이나 자세는 절제되어 있다. 조토의 <오그니산티 마돈나>에서 마리아의 앉은 자세는 보다 자연스러워졌고 주변 천사들의 시선도 정면이 아닌 마리아를 향하여 집중도와 공간감을 높였다. 마리아가 앉아 있는 왕좌는 입체감을 잘 살리고 있으며 장식의 세밀함도 돋보인다. 에르뢰 출신의 잔(Jeanne d'Evreux)이 헌납한 <성모와 아기예수>는 도금된 은과 에나멜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마리아의 자세는 고대 그리스인이 창안한 자연스러운 자세인 콘트라포스토(Contrapposto)를 취하고 있다. 입고 있는 의복의 물결치는 주름은 휘어진 신체와 조화를 이룬다.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는 듯한 마리아의 얼굴에 아기예수는 손을 가져다 대는 구도는 모자간의 친밀감을 드러낸다. 조토에 등장하는 아기예수가 어른스럽고 경직된 모습을 보이는 것과 대조된다.

<수태고지>, 시모네 마르티니, 리포 멤미, 1333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시모네 마르티니의 수태고지는 보다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그림을 둘러싼 틀은 나무에 금장을 하여 색채의 일관성을 깨지 않고 입체감을 부각한다. 가브리엘의 날개와 의복의 주름 그리고 명암 처리는 시각 기법의 발전을 확인시켜 준다. 마리아의 뒤틀린 상반신은 두 손만 앞으로 뻗던 경직된 표현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다. 마리에의 왼손에 쥐어진 벌어진 성경의 틈은 명암처리를 적절히 사용했음을 보여주며 두 인물 사이의 백합은 마리아의 순결을 전달하는 메시지를 주는 동시에 실제의 백합을 꽤나 정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대리석 바닥의 패턴 표현과 백합 꽃병의 입체적 표현, 마리아가 앉아 있는 의자는 100% 정확한 투시도법이 적용된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인 작품의 입체감을 살리기에는 충분하다. 

좌: <에케하르트와 우타>, 1260년경, 나움브르크 대성당 성가대석의 '설립자 군사'의 일부; 우: 페터 파를러(Peter Parler) 의 자화상, 1379-89

정밀한 묘사 기술은 특정한 개인을 표현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나움부르크 대성당의 <에케하르트와 우타>는 실제 인물을 보고 만든 것이 아니다. 예술가는 '어떤' 인간을 표현해 놓은 것이다. 예술가에게 실제 인물과 작품의 관계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단지 '누구누구'라는 명찰만 있으면 충분하다. 그에게 부여된 임무는 실제 인물의 훤칠함을 '보편적 인간'의 틀로 드러내면 되는 것이다. 반면 체코의 예술가 페터 파를러의 자화상 조각은 정확히 '그' 인간을 재현한다. 단지 보편적 인간 만을 표현해서는 '페터 파를러'를 알아볼 수 없다. 눈 두 개, 코 하나, 입 하나는 '어떤' 인간이든 가지고 있는 특징이지만 그걸로 우리는 '어떤' 인간이 '누구'인지를 알 수 없다. 인물에 대한 정확한 묘사는 '그'를 담아낸다.


국제적 고딕 양식(International Gothic Style)

프랑스 북부 지역의 종교 건축에서 사용되던 고딕 양식은 프랑스 전역으로, 독일 지역과 다른 알프스 이북의 전 유럽으로 퍼져 나갔다. 종교 건축에 국한되지 않고 공공 건축으로 고딕 양식은 스며들어 갔으며 어느샌가 건축물의 목적을 떠나 하나의 양식으로 자리 잡았다. 유럽은 하나의 공통된 양식을 처음으로 공유하는 '국제적' 무대가 되었다. 회화에서는 조토가 되살리고자 했던 사실적 표현들이 다른 지역에서도 공유되었고, 조토를 경험하지 못한 지역에서도 문화적 전파를 통해 점차 완성도 있는 묘사 기법들을 체득해 갔다. 그들은 '국제적(international)' 감각을 지녔는데 그것은 '지역(regional/local)'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상가들이나 미술가들은 한 지방에서 다른 지방으로 옮겨 다녔으며 '다른 지방의 것'이라는 이유로 새로운 업적이 배척당하거나 하지 않았다.>, -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 中 -


<윌튼 두폭화(Diptych)>, 1395, 목판에 템페라 47.5 x 29.2 cm

두폭화는 두면의 나무 판을 경첩을 이용해 붙여놓은 한쌍의 그림을 말한다. 윌튼 두폭화로 알려진 위 그림의 원제는 <리차드 2세를 아기예수에게 소개하는 세례자 요한과 첨회왕 에드워드와 에드먼드>이다. 왼편에 위치한 네 명의 인물 중 무릎을 꿇고 왕관을 쓰고 있는 인물이 리차드 2세이다. 그는 두 손을 벌리고 아기 예수를 향하여 그의 은총을 감사히 받고자 한다. 네 인물의 시선을 모두 오른편의 아기 예수를 향해있고 각자는 자신의 특징을 드러내는 물건인 어트리뷰트(Attribute)를 소지하고 있다. 예수를 상징하는 어린양을 손에 든 이는 세례자 요한이고 가운데 흰 옷을 입은 에드먼드는 반지를 손에 쥐어 신의의 증거인이 되고자 한다. 왼편의 화살을 든 에드먼드는 스스로가 순교자임을 보여준다. 

오른편의 푸른 옷을 입은 천사들은 하나같이 가슴에 장신구를 부착하고 있는데 왼편의 리차드 2세도 역시 같은 장신구를 착용하고 있다. 이 장신구는 영국 왕가의 상징인 '황금뿔의 흰 사슴'이다. 앞의 세 천사는 신체의 각기 다른 면을 관찰에게 향하며 아기 예수와 마리아를 둘러싼 공간감을 표현한다. 그들의 아래로 자연의 꽃과 잔디가 표현되고 있다. 아기 예수의 자세를 보면 하반신과 상반신이 꼬인 듯하다. 어머니 마리아의 품에 안긴 하반신과 축복을 주기 위해 리차드 2세를 향하는 상반신이 완벽히 자연스럽지는 않으나 축복을 주고자 하는 아기 예수의 의지를 전하기에 충분하다. 그림은 전체적으로 입체감을 주기 위한 단축법과 공간적 배치 등의 시각적 기법들이 조토의 그것과 맥을 같이 한다.

<베리공의 매우 호화로운 기도서: 1월 달력>, 랭부르 형제(Limburg), 1410

<베리공의 매우 호화로운 기도서: 1월 달력>의 윗부분에 밝게 표시된 부분에 염소의 상체를 한 동물이 등장한다. 염소자리는 1월의 별자리로 랭부르 형제는 12달의 달력의 윗부분을 각 별자리로 표현한다.

<베리공의 매우 호화로운 기도서: 1월 달력>, 랭부르 형제(Limburg), 1410

아랫부분을 자세히 보면 테이블에 푸른 옷을 입고 갈색털의 모자를 쓴 인물이 베리공이다. 겸상을 하고 있는 붉은 망토의 인물은 샤르트르의 대주교 샤르펜느의 마르탱 구쥬(Martin Gouge de Charpaigne)로 보인다. 대주교와 겸상을 하는 자신의 권위를 드러낸 것이다. 그의 발아래 흰 개는 그의 충실함을 표현한다. 베리공의 옷과 뒤편의 원형 속에 표현된 푸른 배경의 황금색 백합(Fleurs de lys)은 프랑크 왕국의 상징으로 이후 부르봉 왕가의 문양에서도 이어받는 것이다. 식탁 위에는 다양한 음식들과 황금배 장식물이 위치한다. '소금배'라 불리는 황금 식기는 그림 반대편에 다른 황금 식기들과 함께 베리공의 부유함을 표현한다. '소금배'의 양 끝에는 백조와 곰이 장식되어 있는데 이 두 동물은 베리 가문의 상징 동물이다. 그림의 가장 뒷부분에 전투 장면이 그려져 있는데 그림의 주제는 '트로이 전쟁'이다. 이상한 것은 트로이 전쟁의 시대적 배경은 청동기에서 철기로 막 바뀌는 시기인데 철갑주를 두른 기병과 보병은 시대와 맞지 않다. 또한 배경에 등장하는 건축물은 중세 고딕 양식의 성채인데 이것 또한 기원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양식이다. 랭부르 형제는 베리공의 위대함을 표현하고자 가장 최신식의 무장을 과시하는데 트로이의 전쟁 장면을 주제로 삼았을 뿐이다. 이후 르네상스의 미술가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배경과 인물을 그림의 배경으로 자주 사용한다. 이제 유럽은 르네상스로의 입장을 위한 준비를 서서히 마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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