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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mo ludens May 29. 2024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 10장

교회의 승리: 13세기

로마네스크와 고딕의 구분은 사회의 변화상과는 크게 연관이 없다. 다만 양식사적 부분에서의 발전과 구조적 발전이 이후 건축에 미친 영향력은 굉장히 크다. 로마네스크와 고딕의 구조적 발전은 서양 건축의 주된 재료인 돌로 만들 수 있는 가장 섬세하고 효율적인 성취이며 미학적으로도 진리를 체감할 수 있는 형태와 공간감을 완성한 업적이다. 고딕 건축은 이전의 어떠한 건축에서도 성취하지 못한 어머어마한 개방감과 높이를 구현했으며 그 속에 설치한 파이프 오르간과 그림과 조각 그리고 스테인드 글라스는 성당 건축이 단순히 사람이 모이는 공간이 아닌 신을 오감으로 느낄 수 있게 만들어 놓은 일종의 '신 체험관'과 다르지 않게 만들었다. 성당은 그림과 조각과 같은 시각적 경험과 음악과 설교라는 청각적 경험, 성찬식을 통한 미각적 경험, 분향을 통한 후각적 경험과 공간이 주는 촉각적 경험 전체를 제공하는 종합 콘서트장과 비슷하다. 만약 가상현실(Virtual Reality) 기술에 추가적 감각경험이 제공된다면 800년 전 중세 건축가들이 만들어 놓은 체험 공간을 보다 현실적으로 구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딕 건축은 단지 감각적 경험만을 제공하는 곳은 아니라 정신적 경험, 즉 탈물질화된 신의 존재를 느낄 수 있게 만들어진 곳이다.


대성당의 시대

고딕 건축의 특징을 살피기 위해서는 이전 양식인 로마네스크와의 비교가 불가피하다. 서유럽 전반에 광범위하게 공유되던 로마라는 문화는 그들이 남겨놓은 물질적, 비물질적 유산을 통해 중세까지 이어졌고 건축에서는 그 에센스인 아치를 적극적으로 이용한 건축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것이 로마네스크(romanesque), 즉 '로마풍'의 건축양식이다.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Victor Hugo, 1802-85)에 의해 '대성당의 시대'라 불리는 고딕 건축의 전성기는 12세기의 초입에서 시작하여 13세기에 그 절정을 이룬다. 고딕 건축이 왜 알프스 이북의 프랑스 지역에서 주로 발전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답을 내리기는 힘들지만 일반적으로 11세기부터 14세기 사이에 증가하는 인구의 경향을 보면 프랑스가 다른 유럽의 국가들보다 큰 증가추세를 보인다. 프랑스는 거의 2배가량 인구가 증가하여 다른 국가들보다 압도적으로 큰 폭을 보인다. 프랑스가 가진 지리적 특징은 넓은 평야와 비옥한 땅인데 이를 기반으로 증가한 인구는 생산량의 증가를 가져오고 막대한 수입의 증가는 대성당을 짓는 경제적 기반이 된다. 

고딕이라는 명칭은 1530년 이탈리아의 미술사학자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는데 이것은 고트족의 건축이라는 의미에서 'il gotico'라고 부르는 데서 시작되었다. 이 말은 당시 이탈리아의 고트족에 대한 멸칭으로 로마의 직계인 이탈리아반도에서 삐쭉빼쭉하고 기괴한 탑으로 이루어진 형태의 고딕 건축을 비하하기 위한 표현이었다. 반원 아치의 간결한 아름다움에서 벗어난 고딕 건축을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반고딕 감정은 이탈리아 반도에 시도된 고딕 건축의 수에서 드러나는데 밀라노 대성당과 같은 소수의 예를 제외하면 알프스 이남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반면 프랑스지역과 일부 독일지역에는 수백 개의 고딕 성당이 지어졌다.


구조적 진보

로마네스크와 고딕의 비교는 구조적 측면에서의 발전을 확연하게 보여준다. '로마풍'의 로마네스크는 반원형 아치를 기반으로 한 구조체를 골자로 한다. 반원형 아치는 아치의 안정성을 가장 잘 보여주지만 수평으로 흘러가는 힘이 상대적으로 커서 벽체가 두꺼울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닌다. 고딕 성당은 두 개의 원이 만들어내는 뾰족한 아치를 기본으로 한 구조체이다.

위의 그림에서 보듯 벽체가 얇아지고 같은 벽체의 두께라면 훨씬 높은 내부 공간을 만들 수 있다. 이러한 첨두형 아치를 이용한 고딕 성당은 벽체의 상당 부분을 개구부로 만들 수 있다. 개구부는 문과 창 같은 벽체가 아닌 구조체를 의미하는데 상층부의 대부분은 창으로 구성되고 이 창을 채우기 위한 유리는 '채색된 유리'인 '스테인드 글라스(stained glass)'이다. 

위의 그림과 같이 고딕 건축의 내부는 뼈만 남은 생선과 같이 필요 없는 부분이 거의 다 빠져버린 건축으로 이후 영국의 건축가 겸 이론가 퓨진(Augustus Welby Northmore Pugin, 1812-52)은 도덕적으로 우월한 '솔직한' 구조체라고 이야기했다.

독일 Regensburg의 Petersdom(베드로 성당)과 Sankt Ulrich kirche (성 울리히 교회)

독일의 바이에른 주에 위치한 레겐스부르크에는 페터스돔과 울리히 교회가 나란히 서있다. 이 둘을 동시에 보면 로마네스크와 고딕의 확연한 차이를 볼 수 있다. 오른편의 울리히 교회의 측면을 보면 책꽂이처럼 생긴 벽이 나란히 서있고 그 사이에 원형의 창이 위아래로 위치한 벽이 만들어져 있다. 그리고 조금 튀어나온 벽체 사이로 상부창이 좁게 위치한다. 반면 왼편의 고딕 성당은 상당히 큰 창들이 벽체의 대부분을 대체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구조적 진보의 핵심은 뾰족한 '첨두아치(pointed arch)'이외에 또 다른 발명품인 '공중부벽(flying buttress)'이다.

플라잉 버트레스로 불리는 공중 부벽은 고딕 건축의 주랑(nave)의 벽체를 떠받치는 보조 구조체이다. 이 때문에 벽체는 얇아지고 벽체 자체의 무게를 줄이기 위한 개구부의 확장이 가능해진다. 공중 부벽은 가로방향의 힘을 버텨야 하므로 사선으로 힘을 전달하게 되고 이에 따라 가장 바깥쪽에 좁고 높은 벽체를 만들어 이 힘을 흘려보낸다. 공중 부벽은 각 건축물마다 조금씩 다르게 만들어지는데 형태는 달라도 기능을 매한가지다.

클레몽-페랑과 파리의 노르트담 대성당은 바깥쪽 벽을 두꺼운 한 덩어리의 소첨탑을 만드는 반면 아미앙 성당은 둘로 쪼개진 소첨탑으로 구성한다.


최초의 고딕 건축: 생 드니(St. Denis) 성당

성인 디오니시우스(Dionysius)는 프랑스의 수호성인으로 파리의 첫 주교가 되었다. 그 이름을 프랑스어로 만들면 생 드니(Saint Denis)로 쓴다. 그는 3세기 중반 몽마르트르에서 참수당해 순교했는데 목이 잘린 그는 잣니의 머리를 들고 파리에서 북쪽으로 4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머리를 두고 쓰려졌다고 한다. 이곳에 그를 기리기 위한 성당을 짓게 되는데 그것이 생 드니 대성당(Basilique de Saint-Denis)이다.

생 드니 대성당 북쪽 팀파눔

이 건축물은 건축사학자들에 의해 최초의 고딕 성당으로 일컬어진다. 이 건축물은 12세기의 수도원장인 쉬제(Suger)에 의해 설계되었다.

생드니 대성당의 평면과 서측 파사드

생드니 대성당의 평면을 보면 구조적으로 기하학적 일관성을 만들어내며 역학적 안정성을 형성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서측 입면의 아치는 여전히 반원 아치의 흔적이 보이나 수직창과 장미창과 같은 개구부가 로마네스크의 답답한 입면으로부터 조금씩 벗어나는 것이 확인된다.

생드니 대성당 주랑(nave)

대성당의 내부를 보면 수직적 요소가 강조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기둥은 하나의 덩어리지만 얇은 여러 기둥을 뭉쳐서 만든 형태로 조각되어 있다. 이것은 시각적으로 얇고 긴 기둥이 다발로 뭉쳐있는 모양이라 하여 '다발주'라고 한다. 이 얇은 기둥은 지붕의 늑재까지 이어져 가늘고 긴 부재의 간결한 아름다움을 완성한다. 고딕 건축의 내부는 선이 만들어내는 수직성의 한계를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이다.

파리의 노트르담 평면과 서측 파사드

노트르담 성당은 '우리의'를 뜻하는 프랑스어 notre와 '여인'을 뜻하는 dame의 합성으로 '우리의 여인' 즉 마리아를 봉헌하는 성당이다. 파리에만 있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여러 지역에서 노트르담이라 하고 지역이름을 뒤에 붙인다. 우리가 말하는 노트르담은 Notre-Dame de Paris 파리의 마리아봉헌 성당이다. 파리의 노트르담의 평면을 보면 생드니 대성당과 유사하지만 조금 다른 부분이 있다. 주랑의 천장이 모듈당 하나의 교차볼트를 구성하는 생드니와 달리 노트르담은 두 개의 세 개의 기둥이 만들어 내는 두 모듈의 기둥쌍이 하나의 천장모듈을 구성한다. 

파리의 노트르담 주랑과 주랑 천장

이 천장 구성은 더 적은 늑재를 이용한 것으로 구조적으로 적은 부재를 사용하면 발전한 구조체라는 상식을 보여준다. 

샤르트르 대성당(Cathédrale Notre-Dame de Chartres)의 서측 중앙 입구 팀파눔과 서측 파사드

성숙기 고딕 양식의 샤르트르 대성당의 팀파눔을 보면 성 트로핌 교회의 팀파눔과 같은 주제를 표현한 부조가 보인다. 

왼쪽: 성 트로핌 교회 팀파눔, 오른쪽: 스트라스부르 대성당, 남쪽 현관 팀파눔

부조의 주제는 그리스도와 4대 복음서를 쓴 사도들이다. 각 사도들을 대표하는 천사(마태우스), 독수리(요하네스), 황소(루카스), 사자(마르쿠스)가 그리스도를 둘러싸고 있으며 그 아래층에 12명의 제자가 위치한다. 인물의 자세는 다소 경직되어 있고 인물 간의 간섭이 전혀 없다. 반면 스트라스부르 (Strassbourg) 대성당의 팀파눔에 나타나는 부조는 눈에 띄는 주름들과 인물들의 역동적인 자세를 표현한다. 고딕 건축에서의 미술적 발전은 건축과 건축에 녹아있는 조각들이 대표적이다. 여기서 추가적인 회화의 요소는 한 영웅적인 화가의 등장으로 발전된다. 그의 이름은 조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이다.


조각에서 회화로

독일의 중부에 위치한 도시 나움부르크의 대성당에는 눈에 띄는 조각이 있다.

설립자 조각, 에케하르트 2세와 우타

곰브리치는 나움부르크 대성당의 설립자를 기리는 이 조각에 대해 높게 평가한다. 


<조각가는 당시 기사의 모습을 신빙성 있게 전달한다그가 실제로 실물을 대상으로 이 작품을 제작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왜냐하면 이 설립자들은 이미 오래전에 죽어서 그에게는 하나의 이름에 불과했기 때문다. 그러나 그가 만든 남녀 조각상들은 언제라도 대좌에서 내려와 헌신과 고행이 우리 역사책의 페이지를 메우고 있는 힘센 기사들과 우아한 숙녀들 무리에 합세할 것 같이 보인다.>


이 조각을 만든 예술가의 의도는 실제 인물의 재현이 아니다. 그는 단지 실제로 존재했을 것이라는 신빙성을 부여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이 건축물을 설립한 자들은 어떤 성정을 지닌 인물인지를 표현하는 것은 그들의 특징적인 모습들을 미술가의 역량이다. 이를 위해 미술가는 섬세한 표현을 이용한다. 옷의 다양한 주름과 그것을 만들어내는 우타의 왼손. 그녀의 왼손은 옷자락을 야무지게 잡기 위해 손가락을 넓게 펴고 있다. 그녀의 왼쪽 심장 부근에 위치한 왼손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신실함을 표현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에케하르트와 우타는 모두 그들의 오른쪽 윗편을 바라보고 있다. 그들의 시선이 같은 곳을 바라본다는 것은 그들의 지향점이 같다는 것의 느끼게 해 주고 그것은 보다 높은 것을 향하고 있다. 장엄하고 신실한 그들의 표정은 흔들리지 않는 신앙심으로 신을 위한 거처를 완성하리라는 굳은 다짐을 보여준다. 이러한 시선처리와 섬세한 표현은 알프스 이남 이탈리아의 미술가 조토에게서도 발견된다.

왼편: 조토의 <오그니산티 마돈나>, 오른편: 치마부에의 <왕좌의 마돈나>

조토는 치마부에의 제자로 그의 가르침을 이어받고 또 다른 발전에 도달한 화가다. 보카치오는 조토를 "수세기 동안 어둠 속에 갇혀 있었던 회화예술에 빛을 던진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치마부에의 그림을 보면 비잔틴 미술의 흔적이 보인다.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둘러싼 천사들의 경질된 자세와 일관된 표정, 그리고 얼굴은 모두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왕좌의 모습과 천사들의 배치가 원근감을 다소 주기는 하나 조토의 그림과 비교하면 평면적이다. 조토가 그의 스승의 그림과 같은 주제를 다루며 주안점을 둔 곳은 시선처리와 얼굴의 방향이다. 성모자를 둘러싼 일군의 천사는 각기 각도가 조금씩 다른 얼굴의 방향을 보인다. 완전 옆모습을 한 얼굴부터 조금 돌아간 얼굴과 거의 정면인 얼굴까지 그들이 바라보는 시선과 얼굴의 방향으로 중심에 위치한 성모자를 둘러싼 공간감을 느낄 수 있다. 

<그리도를 애도>, 조토 디 본도네, 1305

스크르베니 (Scrovengi) 예배당의 그려진 프레스코화 <애도>는 조토의 걸작 중 하나다. 이 그림이 걸작이라 평가받는 이유는 르네상스 회화의 조짐들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간감을 만들어내기 위해  예수와 마리아의 전면에 등을 돌린 두 인물을 배치했다. 이 두 인물은 등을 돌리고 있기에 그들의 표정이나 감정을 읽을 수 없어 그들이 단지 공간감을 위해 배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늘의 천사들과 왼쪽 뒤편의 인물들의 표형과 감정 표현은 다양하게 드러난다. 고개를 들고 찡그린 표정의 천사와 두 손을 모으고 다른 곳을 응시하며 현실을 부정하는 듯한 태도, 예수를 곧바로 바라보며 두 팔을 편 직접적인 포즈 등의 다양한 신체적 묘사가 돋보인다. 또한 양팔을 벌린 핑크색 옷을 입은 인물의 오른팔은 머리 뒤에서 뻗어 나온 듯 보이는데 이전의 미술에서는 보기 힘든 단축법이 적극적으로 사용되었다. 

<동방 삼박사의 경배>, 조토 디 본도네, 1303

마찬가지로 스크르베니 예배당에 그려진 <동방 삼박사의 경배>에서도 인물들의 표정과 시선, 얼굴의 각도는 공간감을 부여하고 뒤편에 위치한 낙타의 얼굴이 약간 작게 표현되어 원근감을 준다. 마리아와 요셉 그리고 천사는 약간씩 다른 얼굴의 각도를 통해 한 곳, 즉 아기예수 혹은 무릎 꿇은 이를 바라보는 표현으로 공간감을 보여준다. 헛간의 구조물에서 나타나는 투시도법과 돌산의 명암기법 역시 시각적으로 삼차원을 느낄 수 있게 하는 회화적 기법이 사용되었음이 드러난다.

<신앙(fides)>, 조토 디 본도네, 1305

조토의 일곱 가지 미덕, 즉 fides(신앙, 믿음), spes(희망), fortitudo(용기), iustitia(정의), temperance(인내), prudentia(지혜, 통찰), caritas(사랑, 자선)을 프레스코화로 그렸다. 그 가운에 위의 피데스를 보면 자칫 대리석 조각으로 착각할 수 있다. 조토가 그림을 조각과 같이 그린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추측이 생겨날 수 있다. 회화가 더 저렴하다는 경제적 이유? 조각과 같은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기교의 과시? 보는 이로 하여금 놀람을 자아내기 위해? 무엇이 그 이유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곰브리치의 말처럼 이러한 눈속임 효과는 현실과 환영의 구분을 모호하게 한다.


<그림을 기록의 수단으로 쓰지 않고, 성경의 이야기 자체를 우리 눈앞에 전개하는 것과 같은 환영을 창조해 냈다.>


조토의 이러한 시도는 고딕 조각의 성취가 회화로 이어지는데 일조했고, 회화 자체의 발전을 위한 기술적 측면(프레스코화)과 양식적 측면(원근법, 공간감)의 진보를 이루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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