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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mo ludens Jun 12. 2024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 12장

현실성의 승리

풀교회 권력과 세속 권력의 다툼으로 성장한 부유한 시민 계층, 즉 부르주아는 중세의 경제 시스템인 봉건제도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형태의 사회 체제로 이행하는데 일조했다. 거대한 권력의 와해는 작은 여러 도시 국가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부유한 도시는 더욱 성장하며 작은 도시를 병합해 서유럽의 100여 개의 도시는 40여 개의 큰 도시로 수렴한다. 막대한 물적, 인적 자원의 집중은 다양한 형태의 미술이 발전하게 했다. 미술을 포함한 다양한 문예의 부흥운동은 중세 기간 동안 묻혀있던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화에 대한 향수를 불러왔다. 새로운 미술에 대한 갈증은 고대 문화에 대한 연구를 통한 창조로 나아갔다. 14세기에서 16세기 이탈리아와 다른 서유럽 지역에서 발생한 이러한 문예 부흥 운동을 르네상스(renaissance), 즉 다시 re + 태어남 naissance이라고 칭한다. 이 명칭은 당대에 쓰이지 않았고, 19세기 중반 쥘 미쉘레(Jules Michelet)에 의해 처음 사용되고 그 유명한 야콥 부르크하르트(Jacob Burckhardt)에 의해 정착된 용어이다.


실패와 도전의 르네상스맨 - 브루넬레스키

르네상스의 시작점에 대해서는 분야와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다. 문학에서는 단테와 페트라르카에 이르러 13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건축에 있어서는 다소 정리된 선구자가 있다. 그의 이름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Filippp Brunelleschi, 1377-1446)이다. 그가 르네상스적 인간(Uomo Universale)이라 불리는 이유는 팔방미인으로서의 재주를 증명했기 때문이다. 조각가로 시작한 그는 회화이론과 건축디자인과 건축술에 이르는 방대한 부분에서 업적을 이루었다. 피렌체에서 활동하던 그에게 숙원사업이 떨어지는데 그것은 피렌체 대성당 앞의 세례당의 3개의 문에 대한 제안이었다. 그의 기획안은 로렌초 기베르티에 의해 밀려났다. 

피렌체 두오모 앞 세례당 청동문 조각을 위한 제안, 좌: 로렌초 기베르티의 안, 우: 브루넬레스키의 안

당시 피렌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기베르티의 안인데 브루넬레스키의 그것보다 다소 자연스럽고 정밀해 보인다. 물론 브루넬레스키의 극적인 연출이 그보다 못한 것은 아니다. 낙선한 그는 일생일대의 실패에 낙담하여 친구 도나텔로와 함께 로마로 여행을 떠난다. 로마에 남겨진 폐허들을 보며 그는 건축에 관심을 갖고 실측을 통한 고대 로마의 건축물들에 대한 연구를 이어간다. 

피렌체로 돌아온 그는 오랫동안 지어지지 않고 남겨진 피렌체 두오모의 쿠폴라에 대한 설계서를 제안한다. 45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팔각형의 지붕이 53미터의 고공에 지어져야 하는 지금으로서도 쉽지 않은 이 작업에 그는 뛰어난 계획안을 제출한다.

좌: 브루넬레스키 조각상, 우: 피렌체 두오모 쿠폴라

거대한 공간을 덮기 위한 거대한 돔을 석조로 만드는 일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자체 하중을 견디기 위해서는 완벽한 수학적 계산을 통해 구조를 계획해야 하고 실제 건설을 위해서는 시공을 위한 각종 건설 장비 역시 요구된다. 브루넬레스키는 이 구조체를 만들기 위해 구조적 아이디어와 시공을 위한 갖은 기법들을 고안해 냈다.

왼쪽: 피렌체 두오모 단면도, 오른쪽: 지붕 구조

단면도에 드러나듯 돔은 이중 구조로 되어있다. 외부는 벽돌로 쌓은 얇은 껍데기이고 내부는 4.4 x 3.4m의 격자로 된 늑골 형태의 구조체이다. 팔각형의 아랫단은 17미터 길이에 3.5미터의 두께로 이루어져 있다. 이 지붕 구조체 전체의 무게는 37,000톤에 이른다. 

왼쪽: 피렌체 두오모를 위한 건설 장비, 오른쪽: 계단실에서 본 벽돌쌓기

이러한 육중한 무게를 건설하기 위해 건축가는 그림과 같은 각종 건설 장비를 이용했고, 가장 위쪽의 랜턴 부분의 장식부를 디자인한 베로키오의 제자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이후 브루넬레스키에 감명을 받고 건설 장비에 대한 스케치를 남기기도 한다. 계단실의 벽돌 쌓기는 건설 도중 흘러내리는 것을 방지하고 완성한 경우 더욱 견고하고 마무리될 수 있는 헤링본의 패턴으로 완성된 것을 볼 수 있다.


로마의 판테온의 구조체에서 영감을 받은 피렌체 두오모의 돔 부분을 완성한 후 그는 완결된 교회를 설계한다. 산 로렌초 성당은 브루넬레스키가 고대 로마와 이후 여러 건축의 요소들을 자신만의 조합으로 만들어낸 건축물이다.

산 로렌초 성당의 내부

오른편의 주랑 사진에서 보듯 반원형 아치를 아케이드 위에 얹어 주랑을 구성한다. 왼편의 제의실에서 그는 로마의 개선문과 이스탄불의 하기아 소피아 성당의 펜덴티브 돔을 섞은 듯한 독특한 형태의 공간을 만들어낸다.


새로운 회화의 시작

중세에서 회화의 부활을 이룬 조토는 입체감과 공간감을 주기 위한 다양한 기법을 개발했다. 브루넬레스키는 과학적인 방법을 이용해 입체감을 주는 기법을 착안하는데 이것이 우리가 흔히 아는 원근법이다. 그는 기하학적 작도를 통해 소실점을 중심으로 공간을 하나의 매트릭스로 재구성하는 작법을 만든다.

브루넬레스키의 원근법 확인 도구

그는 자신이 그린 그림이 정확한 지 확인하기 위한 도구를 만든다. 자신이 그린 그림의 뒷면을 눈앞에 대고 구멍을 뚫은 후 그 앞쪽에 구멍이 난 거울을 둔다. 자신이 그림을 그린 곳으로 가서 두 판 사이을 조절 해가며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장소와 거리를 찾는다. 그러고 나서 거울판을 제거했을 때 그림과 실물이 일치한다면 그림은 정확히 재현된 것이다. 과학적 방법을 통해 그림의 정확성은 확인된다.

<성 삼위일체>, 마사초, 1426-28

그는 그의 친구 마사초에게 이 기법을 선물한다. 마사초의 어마어마하게 긴 본명은 Tommaso di ser Giovanni di Mone di Andreuccio이다. 마사초는 그의 별명인데 학창 시절 동명의 토마소를 '작은 토마소'로 부른데 반해 그를 '큰 토마소' 혹은 '거친 토마소'라고 부른데 기인한다. 마사초는 브루넬레스키의 소실점을 이용한 원근법을 벽화에 그대로 적용하여 <성 삼위일체>를 완성한다. 실제 사람의 눈높이를 기준으로 그려진 벽화에서 조금만 떨어져서 감상하면 작품이 실제 공간과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당시 원근법을 적용한 그림이 전무하던 시기에 이 그림이 주는 몰입감은 감상자들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조각에서의 시도

한편 조각에서는 또 다른 브루넬레스키의 친구 도나텔로(Donatello, 1386-1466)가 업적을 남긴다. 그는 로마에서 고대의 조각들을 연구하여 중세의 자연주의 전통에 고전의 형태미를 가미한 사실주의적 조각을 시도한다. 

왼쪽: 성 게오르그 기마상, 성 비투스 대성당 앞 광장, 프라하, 1373; 오른쪽: 성 게오그르, 도나텔로, 1415-17

위의 두 조각상 사이에는 시간 차이가 거의 나지 않지만 표현에 있어서의 사실성에는 큰 차이를 보인다. 성 비투스 대성당의 게오르그는 건실한 남성의 몸이라고는 믿기지 않는다. 좁은 어깨와 얇은 다리 그리고 근육이 없는 것 같은 팔은 용을 오히려 더 왜소하게 보이게 할 뿐이다. 가장 현실적인 것은 오히려 그가 타고 있는 말이다. 반면 도나텔로의 게오르그는 용이 없어도 건장한 사내의 모습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곧게 선 전신과 굳은 심지를 가진 듯한 표정은 악이 다가와도 조금도 흔들릴 것 같지 않다.

<헤롯왕의 잔치>, 도나텔로, 1423-27

<헤롯왕의 잔치>에서 도나텔로는 다양한 특색을 보여준다. 화면의 가운데 두 인물은 각자 반대편으로 상체를 젖혀 V 자 형태의 구도를 만든다. 그림의 소실점은 명확지 않으나 마치 소실점이 생긴 것 같은 착각을 준다. 이전 시대의 그림들과 달리 주인공인 헤롯왕은 왼편 구석으로 밀려나 있다. 하지만 그 앞에 제공되는 세례자 요한의 목을 중심으로 왼편 네 명이 둘러싼 형태의 공간감을 구성한다. 그리고 오른편의 일군의 무리는 잘린 목에 대한 반응으로 왼편으로의 시선을 잃지 않는다. 물론 가장 오른편의 두 인물은 차마 바라보지 못하고 얼굴을 돌리지만 그로 인해 나머지 인물들의 몰입이 강조된다. 테이블의 공간은 왼편의 헤롯왕으로 향하는 듯한 방향성을 갖는다. 뒤편의 공간과 인물들은 보다 얕은 깊이를 보이는데 이로 인해 뒤편과 앞부분의 공간적 깊이감의 차이를 한눈에 알 수 있다. 이러한 얕은 부조 기법을 릴리에보 스키아치아토(Rilievo Schiaciatto)라고 한다. 그는 친구 브루넬레스키의 일점 투시도를 일부 사용하며 고대 그리스와 헬레니즘의 조각의 특징 역시 적극 활용한다. 또한 왼편 제일 뒤의 인물은 손에 사람의 머리를 가지고 오는데, 이는 화면 맨 앞의 인물과 동일인으로 부조 안에서의 시간이 고정되어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다비드>, 도나텔로, 1416/40

도나텔로 조각의 정수는 <다비드>이다. 이 시기의 어떠한 조각가도 이렇게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소년의 모습을 조각하지 않았다. 위의 청동상은 1440년의 작품으로 1416년의 대리석 조각을 청동상으로 만든 것이다. 다윗왕의 강인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나약하고 어린 신체의 발아래 골리앗의 머리를 둠으로써 다윗의 탁월한 두뇌를 부각하려는 것일 수도 있다. 그가 미혼으로 생을 마무리한 것과 조각의 여성성으로 인해 동성애자라는 견해도 있으나 마땅한 근거는 없다. 르네상스라는 시기는 성경에서 자연으로 관심이 옮겨 왔는데 미술가에 들에게 이러한 변화는 이론보다 폐허나 고대 조각에 대한 관찰이 주는 영감에 집중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브루넬레스키와 그의 두 친구는 고대 도시 로마와 그곳에 남겨진 고대의 미술작품에 의해 영감을 받고 새로운 미술로 나아갔다.


회화의 새로운 길을 연 -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플랑드르 지역은 벨기에와 네덜란드 일부지역을 이르는 말이다. '물에 잠기는 땅/홍수가 잦은 땅'이라는 이 지역은 15세기 이후 알프스 이북 유럽의 무역의 중심지였다. 알프스로 인해 물자를 이동하기 힘들었기에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프랑스 서부해안을 지나 도버 해협 부근의 이 지역이 물류 이동을 위한 중심지 역할을 했던 것이다. 막대로 자본의 유입은 생활양식을 바꾸고 새로운 신분과 계급을 형성한다. 새로운 기득권으로 성장하는 상인계급은 자신들을 위한 미술을 예술가들에게 요청하고 미술의 주제 역시 종교에 국한되지 않고 그들의 삶의 모습을 미화시켜 보여주는 것으로 변화한다.

<헨트 제단화> 안쪽 면, 얀 반 에이크, 1432

헨트 제단화

플랑드르의 부유한 도시 헨트(Ghent)의 바보(Bavo) 대성당의 제단화는 양쪽 날개가 접히는 삼단화(Triptych)로 구성되어 있다. 이 작품은 얀 반 에이크의 형 휘베르트가 시작했으나 도중 사망하였고 동생인 그가 완성했다. 그는 새로운 회화의 기법인 유화를 처음으로 개발했다. 이탈리아 지역의 미술가들이 원근법이라는 과학적 재현기법을 개발했다면 알프스 이북의 이 미술가는 새로운 미술도구를 이용해 가장 현실적인 표현이 가능한 도구를 개발한 것이다. 새로운 기법은 상상할 수 없는 어마 어머 한 정밀성을 가능케 했고 그들은 원근법이니 투시도법이니 하는 과학적인 접근보다 가까이서 보면 볼수록 생생히 드러나는 생동감을 화면에 구현했다.  

<헨트 제단화> 바깥 면, 얀 반 에이크, 1432

제단의 양쪽 경첩을 접으면 위와 같은 좁은 그림이 눈앞에 나타난다. 화면의 아래쪽 붉은 옷을 입고 있는 부부는 제단화의 후원자인 요도쿠스 베이트(Jodocus Vijd)와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이다. 부부 사이의 조각상 그림은 두 요한을 그리고 있다. 손에 양을 안고 있는 왼편의 요한은 세례자 요한으로 광야를 누비던 그의 검소한 모습을 맨발과 거친 옷감의 옷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뱀이 든 술잔을 들고 있는 오른편의 요한은 예수의 제자인 사도 요한이다. 파트모스 섬의 유배 시절 로마의 황제 도미티아누스가 보낸 독이 든 술잔에 축복을 하자 술잔에서 뱀이 기어나갔다는 이야기에서 기인한 사도 요한의 상징이다. 요한은 도시 헨트의 수호성인으로 제단화의 아랫부분은 도시를 수호하고 제단화에 기여한, 즉 도시의 바탕을 이루는 이들을 담고 있다. 제단의 중앙부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수태고지의 장면이다.

헨트 제단화 바깥 부분 중앙부

왼편의 천사 가브리엘은 순결을 상징하는 백합을 들고 방의 반대편에 있는 성모 마리아에게 신이 그대에게 임하였음을 고지한다. 오른편의 성모는 두 손으로 감히 자신이 고지를 받아도 되는지에 대한 놀람의 감정을 드러내고 있다. 머리 위의 성령은 그녀에게 신이 임하였음을 알려주고 있고 그녀의 오른편의 성경은 그녀의 신실함을 보여준다. 마리아의 왼편으로 글귀가 보이는데 "ECCE ANCILLA D[OMI]NI" (주님의 종을 보라)라는 말로 재미있는 것은 글귀가 거꾸로 적혀있어서 하늘에서 읽을 수 있도록 쓰여있다. 그녀의 말이 하느님에게 전하는 것이라서 화가는 위에서 내려다보는 방향으로 읽을 수 있도록 했다. 화면의 중앙부 왼편의 창밖으로 도시의 풍경이 보이는데 15세기 플랑드르 지역의 모습을 담은 것으로 보인다. 고딕풍의 건물과 계단식의 입면을 가진 집들은 이 시기 부유한 북유럽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건축양식이다. 중앙 오른편의 흰 수건과 주전자 등은 마리아의 순결함을 상징하는 물건들이 위치해 마리아가 있는 부분에는 개방된 부분을 최소화했다. 독일을 비롯한 지역에서 자주 사용되는 회화의 모티브 중 Hortus conclusus, 즉 '닫힌 정원'은 마리아의 순결함을 드러내는 회화의 장르이다. 우리가 소위 '금남의 구역'이라 부르는 것과 다르지 않다.

헨트 제단화 안쪽 면 상단부 가운데 부분

제단화 안쪽 면의 가운데 부분은 삼위일체를 손으로 표현하고 있는 그리스도, 왼편의 마리아와 오른편의 세례자 요한으로 구성된다. 그리스도가 착용하고 있는 옷과 장신구들의 세밀함과 화려함은 이전에는 볼 수 없던 엄청난 사실성의 구현이다. 화가는 곳곳에 장식과 글귀를 섞어 풍성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마리아가 머리 위에 얹고 있는 티아라는 그녀를 상징하는 백합과 장미로 꾸며져 있고 상대적으로 간결한 장식으로 구성된 옷차림과 책에 몰두한 모습은 그녀의 겸손함과 신실함을 나타낸다. 이 세 인물이 등장하는 구성은 데에시스(δέησις)로 비잔틴 미술에서 자주 보이는데 이것은 신에 대한 '간절한 기도'를 의미한다. 

헨트 제단화 안쪽 부분 상단부 중앙 옆면

중앙부의 좌우측에는 천사들이 보이는데 왼편에는 노래하는 천사들, 오른편에는 악기를 연주하는 천사들이 등장한다. 왼편 성가대의 천사들의 표정은 매우 다양한데 노래를 부르는 동안 일그러진 표정으로 보아 고음역대를 소화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표정이 중요한 것은 얀 반 에이크가 미묘한 인간의 표정들은 다양한 얼굴 각도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오른편의 천사들은 악기를 연주하고 있기에 입을 열 필요가 없고 다만 지긋한 눈빛으로 음악을 연주하는데 악기에 대한 정밀한 묘사를 확인할 수 있다.

헨트 제단화 안쪽면 상단부 가장자리

양측면의 가장자리에는 아담과 이브가 위치한다. 둘은 중요부위를 잎으로 가리고 있는데 이것은 그들이 원죄를 저지른 후의 상태임을 알려준다. 그들은 선악과를 먹은 후 "부끄러움을 알게 되었다"라고 한다. 선악과를 먹기 전에 그들은 분별이 없었다. 해도 될 것과 하면 안 될 것의 구분이 없는 상태, 즉 죄가 없는 상태였다. 공자가 말하는 '종심소욕 불유구'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해도 거리낄 것이 없는 상태는 완전한 선의 상태를 뜻했다. 하지만 각자가 부끄러움과 분별을 알고 나서 선악의 판단은 각자의 몫이 되었고 이 순간부터 사람들 사이에는 시시비비가 생겨났다. 아담의 오른쪽 발은 단축법의 보여주고 있고, 화면의 바깥으로 뛰쳐나올 것만 같은 생생함을 표현한다. 그의 발아래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있다. "ADAM NOS I[N] MORTE[M] P[RE]CIPITA[VI]T" (아담은 우리를 필멸의 존재로 전락시켰다.) 그리고 선악과를 오른손에 들고 있는 무표정의 이브의 발아래에는 "EVA OCCIDENDO OBFUIT" (에바는 원죄로 우리를 더럽혔다)라고 쓰여있다. 

헨트 제단화 안쪽면 하단부 중앙

하단부의 중앙은 피를 흘리며 제단 위에 서있는 어린양을 천사들이 둘러싸고 있다. 왼편의 천사는 십자가를 세우고 있고 다른 손에는 가시면류관을 들고 있다.

헨트 제단화 안쪽면 하단부 중앙 확대

오른편의 천사는 기둥을 들고 있는데 예수가 묶여서 수난을 받던 사건의 상징물이다. 예수가 인간의 갖은 고통을 받으며 우리의 죄를 대신 받으러 온 숭고함을 그리고 있다. 예수는 자신의 피로 우리를 구원하고 있다. 


[6. 그분께서는 바로 물과 피를 통하여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물만이 아니라 물과 피로써 오신 것입니다. 이것을 증언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곧 진리이십니다. 7. 그래서 증언하는 것이 셋입니다.

8. 성령과 피와 물인데, 이 셋은 하나로 모아집니다요한 1, 5:6-8 -]


그림에는 요한복음서의 내용과 같이 성령의 빛과 물과 피가 등장한다. 아랫부분의 분수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물줄기처럼 여러 곳으로 퍼지기를 바라는 확장의 의미를 가진다. (혹은 여러 분파를 의미하는 경우도 있다.) 제단의 전면에는 두 글귀가 보이는데 윗부분은 ECCE AGNUS DEI QUI TOLLIT PEC[CAT]A MVNDI (세셍의 원죄를 씻어줄 어린양을 보라), 아랫부분은 IHES(SUS) VIA V[ER]ITA[S] VITA (예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다)라고 쓰여있다. 

제단화는 성경의 내용을 편집하여 극적으로 드러내는 장면들을 화가의 정밀한 묘사들로 표현했고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의 자세와 표정, 옷차림, 장식물까지 구석구석 정밀하게 묘사하여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 얀 반 에이크, 1434

얀 반 에이크의 그림 중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은 단연코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 일 것이다. 섬세한 표현뿐 아니라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주기 때문이다. 화면의 왼편에 위치한 남성은 이탈리아 토스카나 출신의 성공한 상인 아르놀피니(Giovanni di Arrigo Arnolfini, 1400-1472)이다. 그는 어린 시절 브뤼헤로 넘어와 비단과 각종 물건들을 거래하며 부를 쌓았다. 오른편의 여인은 그의 아내 지오반니 케나미(Giovanni Cenami)이다. 그녀의 배가 볼록한 것은 임신일 수도 있고 당시 옷차림의 반영일 수도 있다. 두 사람 모두 두꺼운 모피옷을 입고 있는데 화면 왼쪽의 창밖으로 얼핏 보이는 체리나무는 더운 계절임을 알려주기에 그들의 옷차림이 부유함을 드러내고자 함이라고 해석될 수 있다. 아르놀피니의 왼편 가구 위에는 오렌지가 놓여있는데 이 역시 플랑드르에서는 재배되지 않는 것으로 부유한 그의 삶을 보여준다. 벗어놓은 판토펠(신발)은 경건한 의식을 치르기 위한 상태임을 의미한다. 두 사람 사이에 위치한 개는 충실함, 신의를 상징하여 부부간의 신뢰를 의미한다.

두 사람 뒤로 샹들리에와 거울이 보인다. 샹들리에에는 단 하나의 촛불만 있는데, 하나의 빛만이 있음은 하나님의 참석을 의미한다. 벽면에는 화가의 참여를 알리는 [Johannes de Eyck fuit hic 1434](얀 반 에이크 1434 여기에 있었다) 글귀가 쓰여있다. 아래에 원형 거울의 주변에는 예수의 삶을 나타내는 열 가지 원형그림(톤도)이 그려져 있고 중앙의 거울에는 부부의 뒤편에서 바라본 방 전체의 모습이 비쳐있다. 거울의 중앙 어딘가에 화가가 서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화가는 이 그림을 증거, 증인의 참석을 공증하는 도구로 사용한다. 의뢰인인 아르놀피니의 결혼식의 증인과 서약의 보증인이 그림과 화가가 될 수 있고, 감상하는 사람 모두가 그의 결혼식의 간접적인 참여자가 된다.


또 하나의 해석

이 그림의 주인공은 아르놀피니의 그의 사촌 지오반니 디 니콜라이오 아르놀피니(Giovanni di Nicolaio Arnolfini)라는 견해가 있다. 그림이 그려진 1434년과 결혼식이 치러진 1447년 사이의 13년의 공백은 결혼식 혹은 약혼식이라고 하기에도 맞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의 사촌 지오반니의 아내가 사망한 1434년 아르놀피니가 사촌 부부를 위해 이 그림을 의뢰했다는 의견은 이렇게 제기되었다. 이제 그림을 다시 보자!

샹들리에의 촛불이 왼편에만 하나 켜져 있는 것은 지오반니의 생명의 불꽃만이 생생하고 반대편 그의 아내의 생명은 이미 꺼져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두 사람 사이의 개는 당시 장례풍습 중 죽은 자의 발아래에 충실한 개를 두는 것을 표현한 것이고 지오반니의 세로 방향으로 세운 손날과 그의 아내의 가로로 눕힌 왼손은 하나의 십자가를 그려 주님께 기도하는 모습을 구현한 것일지도 모른다. 생명과 하늘을 상징하는 세로 선은 아직 삶을 영위하고 있음을, 땅을 상징하는 가로선은 그녀의 삶이 종결되었음을 의미한다. 

어떤 해석이 옳은지 정확한 것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미술의 즐거움은 이러한 다양한 해석을 나누는 데 있다. 그리스의 심포지온(Symposion)은 그들이 방안에 술독을 두고 술독에 그려진 그림들에 대해 밤새 나눈 이야기에서 시작되었다. 함께 마신다는 의미의 심포지온은 학술회의 원형이 되는데 결국 사람들 사이의 다양한 견해는 삶과 미술을 풍성하게 만든다.

곰브리치는 이 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현실 세계의 단순한 구석이 마술처럼 갑자기 화면 위에 정착되었다.

그림의 주제는 더 이상 기적이나 다시 올 수 없는 누군가의 과거의 영광의 장면이 아니다. 우리의 현실 세계가 고스란히 담긴 삶의 풍경이 회화의 주제로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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