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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mo ludens Jun 19. 2024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 13장

전통과 혁신 I - 15세기: 이탈리아

15세기 초는 이탈리아와 플랑드르 지역의 미술가들에게 새로운 도전이 시작된 시기이다. 중세의 끝에서 조토와 같은 미술가는 새로운 미술의 시작을 위한 단초를 제공했다. 이러한 변화의 조짐은 이탈리아의 풍요로운 도시 피렌체에서 꽃 피웠다. 피렌체에서 새로운 미술이 꽃을 피운 데에는 한 가문의 영향이 지대했는데 그 가문이 메디치 가문이다. 메디치 (Medici) 가문은 이름에서 드러나듯 의료 약품을 거래하며 부를 쌓기 시작했다. 이후 무역과 상업으로 얻은 자본을 아낌없이 예술가를 후원하는데 쏟아붓는다. 로렌초 데 메디치(Lorenzo de'Medici, 1449-1492)는 자신의 할아버지인 코시모 데 메디치(Cosimo de'Medici, 1389-1464)로부터 시작된 메디치 가문의 명성을 예술을 통해 드러내고자 했다. 그는 보티첼리, 레오나르도 다 빈치, 라파엘, 미켈란젤로 등의 걸출한 예술가들을 후원했다. 이 예술가들이 단지 기술적 진보만이 아니라 인문학적 지식을 쌓을 수 있도록 도서관을 만들고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르네상스 예술의 이론을 세운 자 -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 (Leon Battista Alberti, 1404-1472)

알베르티는 전형적인 르네상스맨 (Uomo Universale)이다. 박식하기로는 법학, 고고학, 수학, 희곡, 시학, 회화, 조각, 음악, 건축에 이르는 방대한 분야를 섭렵할 정도였다. 물론 섭렵에서 끝나지 않고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 그의 주요 저작으로는 브루넬레스키에게 헌정한 회화론(Della pittura, 1435/6)과 종교론 (De religione, 1429-32), 조각론 (De statua, 1435-6), 건축론(De re aedificatora, 1452)이 있다. 

왼편: <회화론>; 오른편: <건축론>

회화론에서 그는 사물의 입체성을 만들기 위한 과학적 방법에 대해 설명한다. 브루넬레스키로부터 시작한 과학적 미술방법론은 알베르티에 와서 더욱 공간적 법칙으로 구체화됐다. 또한 (h)istoria라는 개념을 설명하는데 회화에서 입체감, 색채, 선, 객관성과 조화 이외에도 이야기 혹은 서사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성전세>, 마사초, 1425-28

알베르티는 마사초의 <성전세>를 예로 들며 인물들의 손과 얼굴의 방향을 보면 이야기의 순서가 정해지는 것에 주목한다. 주황색 옷을 입고 관찰자에게 등을 돌리고 있는 세리가 왼손을 예수에게 향하며 이야기를 건네고 있다. 예수는 오른손으로 베드로를 가리키고 있고 베드로는 손가락으로 화면 왼편 가장자리에서 물고기를 손질하는 베드로를 가리킨다. 세리는 오른손으로 화면 우측을 가리키는데 그곳에는 베드로가 세리에게 세금을 건네고 있다. 알베르티는 이러한 이야기의 전개를 객관적으로 전달하는 방식을 긍정한다.


건축 - 순수하고 수학적인 원리에 근거한 객관성과 조화, 비례와 대칭을 추구하는 학문

알베르티는 루첼라이(Rucellai) 가문의 의뢰로 현재 피렌체 중앙역 옆에 위치한 산타 마리아 노벨라의 파사드 (1470)의 설계를 맡는다. 

산타 마리아 노벨라 정면 파사드

알베르티는 기존 교회의 입면을 구성할 때 아래와 위의 두 단으로 기획한다. 아랫부분은 윗단의 두 배, 즉 정사각형 두 개를 붙여 만들고 정사각형을 4 분하여 윗단 양쪽의 귀부분을 계획한다. 모든 구성은 정사각형을 기준으로 기하학적 작도를 통해 만들어진다. 

왼편: 산타 마리아 노벨라 입면과 내부 공간의 경계; 중앙: 생드니 성당 입면; 오른편: 고딕 성당의 단면도

산타 마리아 노벨라의 기존 교회는 주랑(nave)이 측랑(aisle) 보다 높은 전형적인 중세 교회의 구성을 보인다. 최초의 고딕 성당 생드니의 입면을 보면 정면 파사드에서 내부 공간의 높이 차이가 드러나지 않는다. 중앙부의 뒤편에 뾰족하게 주랑의 지붕이 후퇴한 것이 보인다. 알베르티는 내부 공간의 높이와 정면 파사드의 불일치성을 해결하기 위해 기하학적 작도를 통해 해결법을 제시했다. 

왼편: <산탄드레아 성당>, 알베르티, 1472-94; 중앙: <산 세바스티안 성당>, 알베르티, 1460-70'; 오른편: 오랑쥬의 로마 개선문, 기원전 27-기원후 14

산탄드레아 성당(Sant'Andrea)과 <산 세바스티안 성당에서 알베르티는 로마의 개선문을 파사드의 원형으로 가져온다. 산탄드레아에서 네이브의 높이는 후퇴한 반원아치의 덮개 형식으로 내부 공간의 높이와 조율했고 산 세바스티안 성당에서는 일체화된 마스크를 파사드에 덮었다. 알베르티는 로마의 고대 건축의 요소들을 당대 건축 언어로 번안하여 자신이 목격한 건축 요소들의 문제점을 해결해 나갔다. 그에게 혁신은 기존 문법들의 재조합 혹은 절충이다.


대저택 - 팔라초 (Palazzo)

루첼라이 가문을 위해 알베르티는 또 다른 프로젝트에 착수한다. 그것은 팔라초, 즉 대저택이다. 원래 궁전을 가리키는 palace였으나 성장한 부르주아들은 궁전과 같은 자신들의 저택을 건축가들에게 의뢰했다. 

왼편: 로마의 콜로세움; 중앙: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 오른편: 팔라초 루첼라이, 1455

팔라초 루첼라이는 알베르티가 로마의 콜로세움에서 보이는 슈퍼포지치온(Superposition), 즉 다층의 기둥 쌓기를 적용했다. 반원부착기둥으로 구성된 콜로세움과 달리 팔라초 루첼라이에는 사각부착기둥으로 변화해 적용했다. 또한 2,3층부의 창문은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의 양측 탑의 창 모양을 변형하여 구성했다. 이렇게 알베르티는 고딕 건축의 요소와 고대 로마의 건축 요소를 새로운 혁신의 자원으로 이용했다.


<알베르티는 소위 '야만적인' 첨형 아치를 부드럽게 만들고 또 고전적인 기둥 양식의 요소들을 재래의 인습적인 형식 안에 채택함으로써 단지 고딕식 설계 방식을 고전적 형식으로 '번안했을' 뿐이었다.>,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 中


프라 안젤리코 (Fra Angelico, 1395/99-1455)

프라 안젤리코의 본명은 귀도 디 피에트로(Guido di Pietro)이다. 그가 워낙 헌신적이고 열정적인 활동을 했기에 '천사의 은총을 받은' 듯하여 주변에서 그를 이렇게 불러주었다. 미술가 활동을 마치고 이후에는 피렌체 근교 피에솔레(Fiesole)의 성직자로 일하다가 이후에 수도원장직까지 맡았다.

왼편: <수태고지>, 프라 안젤리코, 1450; 오른편: 프라 안젤리코와 로지에 반 더 바이덴(Rogier van der Weyden)의 <그리스도의 매장>

프라 안젤리코의 미술은 다른 이탈리아의 미술가들과 같이 기본적인 원근법과 투시법에 대한 연구가 깔려있다. 또한 왠지 모를 단순한 느낌과 뿌옇다고 할 정도의 밝은 색채가 특징이다. <수태고지>에서 가브리엘로 성모는 건축물 안에 위치하는데 이 건축물은 꽤나 그럴듯한 투시도법으로 재현되어 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맞지 않는 소실점이 맞지 않는 어설픔을 발견할 수 있다. 바닥을 채우고 있는 풀과 꽃의 묘사도 다소 평면적이라는 지적도 피해 갈 수 없다. 비슷한 시기의 로지에 반 더 바이덴의 작품을 보면 북유럽 르네상스의 특징인 현실적인 묘사가 눈에 띈다. 구도에서도 프라 안젤리코는 안정적인 삼각형 구도를 진중한 분위기에 적합하게 적용하는 반면 로지에 반 더 바이덴은 중심이 살짝 기운 자연스러운 구도를 택한다.

<그리스도의 변용(transfiguration)>, 왼편: 프라 안젤리코, 1441; 오른편: 라파엘, 1516/20

<그리스도의 변용>에서 프라 안젤리코는 그리스도의 신체를 콘트라포스토(Contrapposto)를 이용하여 자연스럽게 그렸고 주변의 성인들과 아래의 사도들을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공간적으로 배치했다. 인물들의 제스처와 표정은 다양하게 표현했으며 그리스도의 양 옆의 모세와 엘리야는 이야기가 일어나기 한참 전의 인물이므로 머리만 둥둥 떠다니는 표현법을 선택했다. 80여 년 후 라파엘은 프라 안젤리코의 공간구성을 비슷하게 수용하고 신비적 힘을 가진 그리스도와 엘리야, 모세를 공중에 띄우는 방법으로 표현했다. 또한 산 아래에서 벌어지는 연결된 이야기를 화면 하단에 그리고 인물들의 손가락과 시선 등을 통해 상단과 하단의 분리된 공간을 연결한다. 여기서 알베르티가 말하는 istoria를 라파엘이 수용했음을 알 수 있다.


파올로 우첼로 (Paolo Uccello, 1397-1475)

우첼로는 단축법과 투시법을 연습하는데 엄청난 시간을 작품에 투자했다. 미술사의 아버지인 조르조 바사리는 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Oh che dolce cosa è questa prospettiva!» [이 얼마나 감미로운 정경(투시도)인가!]

<산 로마노 전투>, 파올로 우첼로, 1436-40

피렌체 군과 시에나 군의 전투를 다룬 <산 로마노 전투>에서 우첼로는 브루넬레스키가 남긴 '인공 투시법(perspectiva artificialis)'과 자신이 개발한 '자연 투시법(perpectiva naturalis)'을 모두 적용했다. 브루넬레스키의 인공 투시법은 화면 아래에 쓰러진 병사와 무기들을 통해 드러나고 뒷 배경과 다른 인물군들에는 각기 다른 소실점들을 갖는데 다양한 소설점을 갖는 것을 '자연 투시법'이라 한다. 실제로 우리의 눈은 파노라마와 같이 넓은 시야를 한 번에 가질 수 없기 때문에 그가 이러한 다초점을 한 폭의 그림이 넣은 것은 오히려 초현실적인 느낌을 주기도 한다. 


안드레아 만테냐 (Andrea Mantegna, 1431-1506)

만테냐는 필리포 리피, 파올로 우첼로, 도나텔로 등의 토스카나의 미술가들을 예술적 혁신을 경험했고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를 통해 원근법을 연구했다. 그는 공간배치와 명확한 묘사, 인물의 기념비적인 형태에 두각을 나타냈으며 회화에 등장하는 건축물과 의복 등에 관한 고증을 즐겼다. 따라서 그는 "회화의 고전주의자"라는 별명을 갖는데 이것을 '고고학적 고전주의'라 부른다.

<처형작으로 끌려가는 야고보>, 안드레아 만테냐, 1455경

만테냐는 위의 작품에서 로마의 개선문을 뒷 배경으로 두고 화면의 중앙을 개선문은 한쪽 발로 잡았다. 이야기는 개선문의 통로 앞쪽에서 위치한 화면의 전면 왼쪽에서 일어난다. 야고보는 무릎을 꿇은 인물에게 축복을 전해주고 있고 그 옆의 병사는 이를 말릴 생각이 없고 오히려 두 손을 들며 이 상황을 허용한다. 전면의 우측 모서리에는 시민들을 통제하는 병사를 통해 많은 시민들이 화면 바깥에 더 있음을 암시하여 실제 보이는 그림보다 더 큰 공간을 상상하게 한다. 만테냐는 전체적인 시점을 그림의 땅바닥에 두어 우리를 마치 극장에서 무대를 올려다보는 관객으로 만든다. 우리는 제한된 무대 너머의 공간은 허용되지 않는데 그림에서는 사람들과 건물들에 가로막혀 시선 자체가 차단되어 있다. 만테냐는 이러한 공간적 배치와 시점을 선정을 통해 그림의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성 크리스토퍼의 시신 운송>, 안드레아 만테냐, 1450

<성 크리스토퍼의 시신 운송>에서 도드라지는 점은 화면의 전면에 기둥과 보가 지나가며 마치 그림 앞에 액자의 틀과 같은 것이 존재하는 듯한 착각을 의도한 것이다. 만테냐는 역사적 장면으로 들어가는 우리에게 하나의 문을 제공한다. 이러한 화면의 깊이감과 장면에 대한 몰입감을 높여주기 위한 방식은 도나텔로가 부조에서 흔히 쓰던 기법이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Piero della Francesca, 1412-1492)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는 여러 화가들의 장점을 수용한다. 브루넬레스키의 기하학적 관점, 스승 마사초의 간결함, 프라 안젤리코의 밝은 빛의 효과, 플랑드르 화가들의 사실적 묘사. 그는 극도로 엄격히 원근법을 연구했고 인물에 대한 조형적 연구 또한 게을리하지 않았다. 

왼쪽: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꿈>,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1460; 오른쪽: <그리스도의 부활>, 1463

미술가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꿈>에서 새로운 시도를 도모한다. 프라 안젤리코에게서 보였던 밝은 빛의 효과를 특정 지점에 집중한 것이다. 그림의 전면에 보이는 병사의 어두운 뒷모습은 광원이 앞쪽에 있음을 의미하지만 다른 인물들에 비친 빛을 보면 빛은 오히려 이 앞쪽의 병사 쪽에서 비쳐야 한다. 빛의 정확한 위치를 찾아보자면 막사의 지붕의 높이에 인물들의 한가운데이다. 마치 미술관에서 작품을 비추는 핀포인트 조명과 같은 빛의 효과를 미술가는 의도했다. 날아드는 천사를 통해 단축법을 표현했고 병사들을 통해 공간감을 표현했다. 이보다 3년 후에 그린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미술가는 오히려 프라 안젤리코의 밝은 빛에 가까운 특징을 보여준다. 또한 뒤편의 나무들에 대한 표현에서 프랑드르 미술가들과 같은 묘사가 보이고, 화폭의 모서리를 채우는 건축물의 액자와 같은 기능과 내려다보는 그리스도의 시선은 마사초의 <성 삼위일체>를 떠오르게 한다.


산드로 보티첼리 (Sandro Botticelli, 1431-1498)

보티첼리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함께 베로키오의 공방에서 수련했다. 둘은 메디치가의 후원을 받으며 미술가로 성장했다. 미술에 대한 기술적 발전뿐 아니라 메디치가에의 인문학적 지원에 의해 고대 그리스, 로마에 대한 문학적, 철학적 공부도 겸했다. 

왼쪽: <비너스의 탄생>, 산드로 보티첼리, 1484; 오른쪽: 카리톨리니의 비너스, 후기 헬레니즘, 로마 복제품

화면의 중심에는 비너스가 조개(가리비) 위에 서있다. 그녀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아프로디테 혹은 비너스로 불리는 미의 여신이다. 그녀의 탄생 설화는 바다에 떨어진 그녀의 아버지 하늘의 신 우라누스의 타액에서 거품이 일며 그녀가 등장하는 것이다. 그리스어의 아프로스는 거품을 뜻하여 아프로디테는 거품에서 태어난 여신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그녀는 태어나자마자 바다 한가운데 조가비 위에 서 있었고, 화면 왼편에 위치한 서풍의 신 제피로스가 입안 가득 바람을 모아 그녀를 해안가로 밀어준다. 그는 자신의 아내인 봄의 여신 클로리스를 안고 날아온다. 그와 그녀의 주변으로 봄의 상징인 꽃이 나부끼고 그가 입에서 부는 바람은 비너스의 머릿결과 육지에서 그녀를 기다리는 계절의 여신 호라이가 잡고 있는 붉은 천의 펄럭거림으로 눈에 보이는 듯하다. 비너스는 헬레니즘 시대의 조각들처럼 자연스러운 자세, 콘트라포스토(Contrapposto)를 취하고 두 손으로는 중요부위를 가리고 있다. 사실 비너스는 자신의 남편을 두고 바람을 피울 만큼 사랑이 많은 여신인데 부끄러워하는 자세는 그녀답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많은 설화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비너스에 대한 다양한 수식어가 존재하는데 그 가운데 정숙한 비너스(venus pudica)는 그녀를 지고지순한 사랑의 여신으로 묘사한다. 

보티첼리는 비너스를 그와 같은 정결한 여인, 마치 성스러운 여인인 듯이 그린다.

<예수의 세례>, 베로키오/레오나르도 다 빈치, 1475

그의 스승인 베로키오의 <예수의 세례>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 이외에 보티첼리도 참여했다는 의견이 있다. 만약 그가 직접 참여하지 않았더라도 그는 이미 이 작품을 목격했을 것이다. 여기서 세례자 요한의 자세와 위의 계절의 여신 호라이의 자세가 비슷하다. 보티첼리는 성스러운 예수와 같이 비너스를 표현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가 메디치 가문에서 배운 것은 고전에 대한 이해이고 그도 역시 호메로스를 읽었음에는 틀림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아름답고 정숙한 아프로디테를 노래하려 하네,

황금수관을 머리에 쓰고 바다로 둘러싸인 

키프로스 도성을 지배하는 신을,

여신은 서풍 제피로스의 부품 입김에 떠밀려

물살 거친 파도에 실려서 부드러운 거품을 타고 왔다네,

황금 머리띠를 두른 계절의 여신들(호라이)이 아프로디테를

기쁘게 맞이하며 그녀의 몸을 신성한 의복으로 감싸고

신성한 이마 위에 황금 관을 드렸네>

호메로스의 찬송가 中 -

왼쪽: <primavera(봄)>, 산드로 보티첼리, 1480; 오른쪽: 로렌초 메디치의 초상

<비너스의 탄생> 이전에 보티첼리는 <프리마베라>를 먼저 그린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후원자 메디치 가문을 위한 많은 암시를 남긴다. 비너스의 위에는 큐피드가 있고 왼편에는 꽃무늬 드레스를 입은 꽃의 여신 플로라가 보인다. 꽃은 피렌체라는 도시를 의미하며 그림의 곳곳에 그려진 많은 꽃은 피렌체의 영광을 뜻한다. 화면의 왼쪽 모서리에 붉은 옷을 입은 메르쿠리우스(머큐리)가 보인다. 그리스의 헤르메스에 해당하는 이 신은 전령의 신 이외에 상업과 무역의 신인데 당시 상업과 무역으로 최고의 도시로 거듭난 피렌체의 특징을 의미한다. 보티첼리와 다른 수많은 미술가를 후견 한 것은 로렌조 데 메디치(Lorenzo de'Medici, 1449-92)이다. 그는 무역과 은행 등으로 막대한 수익을 얻은 자신의 가문을 빛내기 위해 많은 미술가를 후원하고 그들이 메디치 가문을 찬양하는 그림을 그리도록 했다.

<동방박사의 경배>, 산드로 보티첼리, 1475

보티첼리는 자신의 작품에 등장하는 세명의 동방박사에 메디치 가문의 전성기를 시작한 코시모 데 메디치(Cosimo de'Medici, 1389-1464) 그리고 그의 아들 피에로 디 코시모 데 메디치(Piero di Cosimo de'Medici, 1416-1469)를 그렸고 마지막으로 로렌초 데 메디치의 암살당한 동생 줄리아노 데 메디치(Giuliano de'Medici, 1453-1478)를 그려 넣었다. 그리고 화면의 왼편 구석에서 이 장면을 구경하고 있는 남성에 로렌초 데 메디치의 모습을 넣었다. 

훌륭한 미술가 보티첼리는 그의 후원자 메디치 가문을 위한 미술을 그렸다. 하지만 그는 그의 이전 시대와 동시대의 미술가들의 고민에 자신만의 답을 그렸다. 그는 이 시기의 많은 미술가들처럼 이어져오는 전통에 혁신을 시도했으며 또 다음 세대의 미술가들에게 새로운 전통으로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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