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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mo ludens Mar 06. 2024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 1장

신비에 싸인 기원

원시 부족의 미술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라스코 (Lascaux) 벽화는 1940년 프랑스 남서부의 몽티냑 (montignac) 에서 발견되었다. 당시 아이들이 강아지를 찾으러 바위 틈으로 들어갔다가 우연히 발견한 동굴 속에서 일련의 그림을 목격한 것이 2만년 넘도록 숨겨져있던 미술의 기원이 세상에 드러난 순간이었다.


미술의 기원

미술의 정의를 내리는 일에 저자인 곰브리치를 비롯한 많은 미술사학자들은 주저한다. 그 이유는 미술을 정의하는 것은 굉장히 철학적인 일일 뿐아니라 사유로 미술을 정의하는 것은 동시에 그림을 그리는 행위와 동기를 포함하기엔 너무 추상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곰브리치는 서론에서 말한다.

미술 (Art)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미술가들이 있을 뿐이다.


그는 미술 자체라는 것 즉, 대문자로 쓰는 Art 는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르게 정의될 수 있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 개념으로서 존재를 규정하기 힘들다는 것을 인정한다. 다만 미술품이 있고, 그것을 만든 미술가가 있음은 변하지 않는 사실(fact)의 영역이다.

미술의 기원으로 원시 부족의 동굴을 꼽는 이유는 그것이 남아있는 것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기 때문이지 불변하는 미술의 본질이라는 뜻은 아니다. 다만 근대의 많은 미술가들은 원시 부족의 삶과 미술에서 자신들의 나아갈 길을 찾는다. 그것은 그들의 미술이 기원에 맞닿아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삶과 미술의 일치성이 근대에 잃어버린 것 즉, 삶과 미술의 밀접한 관계를 되돌리는 동기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원시 부족에 대한 오해

곰브리치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원시 부족 미술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는 것이다. 그는 그들의 미술 전체를 나열하듯 보여주지 않는다. 그의 목적은 분명하다. 원시 부족을 뜻하는 'primitive' 를 '미개인' 이라는 단어보다 '원시인'으로 의도하는 것이다. 결국 '원시 부족은 사고능력과 회화능력의 부족함 때문에 역사적 발전 단계에서 '미진보'의 상태에 있을 것'이라는 선입견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그것이다. 원시 미술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은 '정신적, 도덕적으로 열등하다'에 천착해서 그들의 작품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반응은 대게 이러하다. "원시 부족이 그렸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잘 그렸습니다!". 결국은 '~치고는 잘했다' 정도의 평가이다. 하지만 원시 부족의 미술을 본 대부분의 사람들은 느꼈을 것이다. 그들이 우리보다 더 잘 그린다는 사실을. 아니 적어도 나보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는 오해는 시대와 장소의 차이가 개인의 차이보다 크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원시 부족의 미술가는 현대의 우리보다 그림을 잘 그리며, 그것은 시대의 차이가 아니라 개인의 능력을 연마함의 정도의 차이이다. 다만 그 기술을 갖기까지의 효율적인 도구와 교육 등의 사회 제반 시스템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원시 미술을 연구하는 이유

라스코 벽화에 대한 설명을 이어가는 곰브리치는 그림의 목적을 정확히 알 수 없음이 기본이고, 그 목적을 추론해나가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결국 고고학자들과 미술사학자들, 인류학자들 등의 협업없이 추론은 부실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유물들에 가장 그럴듯한 해석을 붙인다면 아마도 이 유물들이 그림의 위력에 대한 보편적인 믿음의 가장 오래된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우리는 원시인부터 지금까지 인류라면 고개를 끄덕일만한 '보편적인 믿음'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이 보편적인 믿음은 단 한가지로 수렴되는 '본질'과는 다르다. 유물과 유물이 지시하는 대상과의 관계가 이루는 '유사성' 혹은 '상징성'의 기호학적 해석에 기반한다.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가 그 해석의 주체이며 모든 것은 해석으로 남을 뿐이다.


원시 미술의 부활

원시성에 대한 회귀는 엉뚱한 곳에서 촉발된다. 화가 고갱은 타히티 (tahiti)섬을 방문한다. 그 곳에서 문명의 참상을 목격하고 '문명의 야만성'을 발견한다.


그는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미술이 겉멋에 빠져 피상적으로 되어가는 위험에 처해 있으며 유럽에서 축적되어온 천박한 모든 재능과 지식이 인간의 가장 귀중한 능력, 즉 강렬하고 예리한 감성과 그것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법을 빼앗아버렸다는 확신을 굳히게 되었기 때문이다.

-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 551 쪽 -

그는 날이 갈수록 점점 더 ㅇㅇ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 폴 고갱, 1897-98

문명은 '나'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을 중심으로 발전한다. 그 속에서 '나'는 나이기를 표현하는 것이 아닌, 집단 속의 구성원으로서의 지위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결국 예절과 격식이라는 사회적 표현수단이 개인을 평가하는 잣대가 되어 우리의 도덕성은 사회의 약속에 의해 평가되고 이러한 '선'이 '미'가 되고 그것이 '진리'가 되는 진선미의 일치성이 완성된다. 고갱은 이러한 문명의 폭력성에 '메스꺼움'을 느낀다. 이후 사르트르가 느끼는 '구토'와 같은 맥락을 지닌다.

고갱은 타히티 섬의 원주민을 관찰하고 미술의 원시성을 발견한다. 기독교의 창세기의 장면에서 아담은 백인남성이다. 하지만 이 그림의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타이티 원주민 남성이다. 왼편 뒤쪽의 푸른색 석상은 최후의 심판에 등장하는 천사도 그리스도도 아니다. 원시부족의 미신적 신 이상 이하도 아니다.

<아비뇽의 처녀들>, 파블로 피카소, 1907

피카소는 <아비뇽의 처녀들>에서 또 다른 원시성을 발견한다. 양측에 위치한 세 여인의 얼굴은 아프리카 부족의 마스크나 조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표현이다. 그는 기존 회화가 표현하는 '재현의 정확성'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 그 이전의 선배들 세잔과 마티스를 이어받아 습관적 투시도법을 부정하고 평면을 강조하며, 입체성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이루어낸다. 그가 발견한 원시성은 이후 큐비즘으로 발전한다.


심리학적 접근

피카소가 <아비뇽의 처녀들>을 그린 1907년 독일의 빌헬름 보링어 (Wilhelm Worringer)는 '추상과 감정이입' (Abstration und Einfühlung)이라는 논문을 발표한다. 이 책에서 보링어는 원시성으로서의 추상성과 근대성의 산물인 추상성에 대한 접점을 발견하고 그것을 '추상충동'이라 부른다. 원시인들이 자신들을 둘러싼 환경으로부터 느꼈던 것에 대한 반응과 근대인이 도시에서 느끼는 반응의 공통점을 찾고 그 보편적 표현으로서의 '추상'을 이야기한다. 예측불가능에 의한 불안함을 극복하기 위해 변화하지 않고 안정된 기하학적 추상표현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가 이 논문을 발표하기 이전에 많은 예술가들, 특히 세잔은 자연에서 추상적 '모티브'를 발견했고 그것을 자신들의 미술로 표현했다.

원시 미술은 가장 오래된 동시에 가장 현대적인 인간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근원적인 우리의 본능을 표현한 하나의 가능성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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