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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mo ludens Jun 28. 2024

<Carpe diem> 시간을 헛되이 쓰지 말게!

영화 <인타임>에 대한 철학적 해석

무료하고 따분하기만 한 빈민가의 술집에 활력이 돈다. 노동의 고단함을 잊기 위해 친구와 술 한잔을 마시러 온 윌은 여러 사람의 주목을 받는 여유로운 미소의 미남 해밀턴을 목격한다. 윌은 해밀턴이 처한 위험성을 가장 잘 알고 있다. 윌은 스스로 위험을 자처하여 위기에 처한 해밀턴을 돕는다. 해밀턴과 윌은 버려진 건물에 몸을 숨겨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윌은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고급 위스키를 마시며 그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대해 알게 되고 해밀턴의 고뇌를 듣게 된다. 윌이 이해할 수 없는 그의 고뇌는 무한한 삶의 허무성이자 유한한 삶의 가치였다. 이튿날 윌이 잠에서 깼을 때 해밀턴은 이미 떠나고 없었고, 창문에는 의미심장한 문장이 하나 남겨져 있다.


Don‘t waste my time! (내 시간을 헛되이 쓰지 말게)


시간은 충분하다

윌과 해밀턴이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눈다. 윌과 해밀턴은 서로의 나이를 묻고 윌은 28세, 해밀턴은 105세

임을 확인한다. 이 영화에서는 설정상 외형으로 나이를 가늠할 수 없다. 빈민가 생활의 달인 윌은 오늘처럼 행동하면 106세까지 살지 못한다고 조언하고 해밀턴은 대답한다.


<허나 누구나 죽게 되어있어. 몸은 멀쩡해도 정신이 죽는 거지.>


해밀턴은 육체적 죽음만을 죽음이라고 받아들이는 윌에게 충격을 준다. 아니 어쩌면 정신이 살아있음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것을 자각한 충격일 수도 있다.


<때가 되면 죽어야 하는 거야.>


연이은 충격적인 발언. 하지만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다. 하지만 윌은 이 말에 반응한다. 오래 살아서 불만인 듯한 그의 발언에 불만을 표시한다. 여기서 해밀턴은 시스템의 비밀을 폭로한다.


<소수의 영생을 위해선 대다수가 죽어야 하지.... 모두가 영원히 살면 땅이 모자라지.>


윌은 자신이 아무것도 몰랐음을 알게 된다. 해밀턴의 폭로는 죽음의 합리성이다. 타임존이 생겨난 이유와 빈민가의 물가가 같은 날 폭등한 이유는 사람들의 죽음을 관리하는 세력이 있다는 말이 된다. 그들의 시간을 뺐어서 죽음을 만들어내야 다른 빈민들이 생활할 공간이 확보되어 또 다른 빈민의 생존이 보장된다. 그리고 그들이 빼앗긴 시간은 고스란히 소수의 부자에게 돌아간다. 대다수 빈민들의 노동과 삶은 소수의 삶을 위해 희생되는 것이다. 그리고 궁극적인 비밀을 폭로한다.


<사실 시간은 충분해. 아무도 일찍 죽을 필요가 없지.>


혁명의 시간

해밀턴은 윌에게 자신과 같이 시간이 많다면 뭘 하겠냐고 묻는다. 윌은 대답한다. "시계를 그만 보겠죠.... 헛되게 쓰진 않을 거예요." 윌에게는 18시간, 해밀턴에게는 116년의 시간이 남아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시간을 훔치지 않겠다는 말을 나눈 후 윌은 다시 독한 위스키를 마시고 이제 마실만 하다는 말을 남긴다. 해밀턴의 독한 진실의 말을 삼킬만하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감독은 술을 건네는 장면을 의도적으로 연출한다.

이 장면은 해밀턴의 건넨 진리의 말이 윌에게 전해졌음을, 그리고 다시 그것이 해밀턴에게 되돌아갔음을 의미한다. 해밀턴의 말의 의미를 확인하는 것이다.

왼쪽: <아담의 창조>, 미켈란젤로, 1511; 오른쪽: 영화 <E.T.>의 한 장면

영화 <E.T.>에서 이티와 주인공 소년 엘리엇은 손가락을 마주침으로 서로에 대한 이해를 확인한다. 이티의 뜻은 Extra-terrestrial, 지구 외-존재라는 의미이다. 이 땅의 밖에서 이 땅에 온 존재는 과거에 '신'으로 불렸을 것이다. 외계인을 의미하는 에일리언(alien)은 '생소한' 존재를 의미한다. 외계인의 의미는 과거에는 외국인을 의미했고, 다른 문화, 다른 민족을 의미했다. 지구인이 달을 밟고 난 후 외계인의 범주는 우리 행성을 벗어났지만 그 이전에 우리에게 외계의 범주는 보다 좁았다. 외계인과는 언어적 소통이 불가능하다. 그들이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방법은 언어외적 방법을 통해서 뿐이다. 그것은 반복된 행동을 통한 '신뢰'의 확보, 구축된 믿음이다.

미켈란젤로는 <아담의 창조>에서 흙으로 빚은 아담의 육체에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는다. 흐리멍덩한 초점 없는 눈동자의 아담은 의욕 없어 보이는 자세로 손가락을 간신히 내민다. 반면 그리스도는 적극적이고 역동적인 몸짓과 의지 가득한 눈빛으로 아담을 향해 날아간다. 미국의 몇몇 의대 교수들은 그리스도와 그를 감싸는 붉은 천에서 '뇌의 단면도'를 발견한다. 다소 무리 있어 보이는 의견일지 모르나 그리스도가 아담에게 불어넣는 것이 단순히 육체를 구동할 수 있는 움직임, 즉 무생물과 생물의 구분을 넘어서 의지와 이성이라는 보다 인간적 생명의 의미라고 해석하는 것은 충분히 납득할 만하다.

윌과 해밀턴의 만남을 아담과 신의 그것이라고 이해한다면 그들의 대화는 전혀 다른 해석을 낳는다. 예수가 로마 시기에 핍박을 받고 모진 수난을 겪은 것은 그가 혁명적 이데올로기를 가졌기 때문이다. 예수는 사회의 계급적 구조, 즉 귀족과 노예의 개념을 뒤집는다. 모두가 신 아래에서 동등하다는 것은 당시 로마의 시스템이 소수를 위한 인위적인 착취구조라는 것을 고발한 것이다. 해밀턴의 고발은 예수의 고발과 궤를 같이 한다.

해밀턴은 자신의 모든 시간을 윌에게 건넨다. 윌(Will)의 의지(will)와는 상관없이 주어진 이 시간은 이제 윌의 의지대로 사용할 수 있다. 그는 이제 해밀턴의 의지를 이어받는다. 위로부터의 혁명이 아닌 아래로부터의 혁명은 구조적 모순을 깨트릴 수 있는 올바른 방향이고 이것은 해밀턴은 할 수 없는 것, 빈민가 출신의 윌이 해내야만 의미 있는 혁명이 된다.


내 시간을 헛되이 쓰지 말게

해밀턴의 의지는 자기희생을 통해 온전히 윌에게 전해진다.

왼쪽: 영화 <인타임>의 한 장면; 오른쪽: <십자가의 예수>, 루카스 크라나흐, 1523

영화의 감독은 의도적으로 해밀턴의 마지막 순간을 십자가의 예수에 빗대어 보여준다. 그가 남긴 말 "내 시간을 헛되이 쓰지 말게."는 예수가 자기희생을 통해 우리에게 준 두 번째 삶의 시간을 소중히 보낼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죽음의 원인을 기독교는 아담의 계약 불이행에서 찾는다. 이것을 원죄라고 부르고 이것은 신과 인간의 첫 번째 계약을 어긴 벌로 이해한다. 예수는 이 계약을 갱신하러 오기로 한 약속이다. 메시아는 새로운 계약을 맺는데 원죄를 대신하여 속죄하여 옛날 계약을 파기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것이 '구원'이다. 이제 옛 약속(구약)의 시간은 지났고 새로운 약속(신약)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더 이상 아담의 죄를 물어 지울 수 없는 죄인의 굴레를 뒤집어 씌우는 억울함은 사라졌다. 우리의 삶 안에서 스스로를 증명하면 된다. 예수가 우리에게 준 시간을 헛되이 쓰지 않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간에 대한 긍정, 즉 <Carpe diem(현재를 살아라)>이다.


굳이 기독교적 의미로 해석하지 않더라도 윌이 해밀턴을 만나기 전, 그의 삶은 고민과 사색이 없었고 현실의 삶을 즐기는 여유가 없었다. 무미건조하고 재미없는 그의 삶의 이유는 그의 탓이 아니라고 해밀턴은 말해준다. 단지 시스템이 그와 빈민가 사람들의 '현재'를 빼앗았기 때문이다. 시스템은 그들을 오늘과 내일에 가두고 끊임없이 시계만을 보며 죽음에 대한 공포를 재확인하게 만든다. 그들에게는 '현재'가 없다. 그들은 단지 '생존'만을 경험할 뿐이다. '오늘을 즐겨라'라고도 해석되는 카르페 디엠은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보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을 찾아내는 것에 방점이 찍힌다. 현실을 도피하는 것이 아닌 즐기는 것은 주어진 의무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그것을 이행하는 과정에서의 선택을, 또 다른 가능성이 있다면 그 가운데에서의 선택을, 또 다른 가능성이 없고 과정 자체가 고통과 괴로움에 그친다면 의무 자체를 거부하는 선택을 긍정하는 것이다. 그것이 혁명이고, 혁명은 동의할 수 없는 의무에 대한 문제제기로 시작한다. 삶은 유한하고 유한한 삶을 의무로만 채우기에 내 삶은 너무 아깝다. '헛된 시간'은 휴식이나 놀이를 위한 시간이 아니다. '헛된 시간'은 '나를 위하지 않는 시간'이다.


해밀턴은 삶의 유한함을 긍정하는 인물이다. 무한에 가까운 삶을 사는 동안 삶의 의미를 상실한 허무주의에 빠졌다. 유한한 삶을 긍정한다는 말은 죽음을 긍정한다는 뜻이고 자신이 살던 세계에서 사라진 죽음을 찾아 빈민가로 내려온 것이다.

다음 편에서는 '죽음의 상실, 허무주의'에 대한 내용이 계속됩니다. (2주간 휴재 후 2024.07. 19. 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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