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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mo ludens Jul 19. 2024

죽음의 두 이름, 허무와 충동

영화 <인타임>에 대한 철학적 해석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가장 이해하기 힘든 인물은 해밀턴이다. 그는 영생의 삶을 포기하고 빈민가로 내려와 자신의 생명을 윌에게 넘겨준다. 그가 남긴 "Don't waste my time!" (내 시간을 헛되이 쓰지 말라)는 말은 윌을 통해 사회혁명으로 드러난다. 아래로 내려온 신적 존재의 자기희생을 통해 '아래로부터의 혁명'이 시작되었다. 한편 윌에게 납치당한 실비아는 스톡홀름 증후군인지 알 수는 없으나 그의 혁명에 동참한다. 그녀는 자신이 타고난 상황에 대한 불합리를 서서히 알게 되고, 영원이 아닌 하루의 가치를 깨닫게 된다. 그녀의 변화는 '안으로부터의 혁명'의 성공이다.


불변, 허무의 시작

우리는 누구나 '영원'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영원'이라는 것의 속성을 이해하는 것만 같다. 하지만 '영원'이라는 것은 우리가 떠올리기 쉽지 않은 개념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영원'의 대부분의 속성은 '지속'에 가깝다. 영원은 aeternitas라는 라틴어에서 기원했으며, 지속은 durare (지속하다)에서 파생한 duration을 의미한다. 유한한 삶을 사는 인간에게 있어 가장 두려운 것은 죽음이고,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죽음으로부터 초월한 가상의 대상을 만들어낸 것이 신이다. 신은 영원성 그 자체이며 죽음의 지배에서 벗어나 있다. 인간은 이러한 신의 형상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본받으려 했다. 순간의 존재가치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닌 지속과 영원의 존재가치를 추구하는 것을 장려하고 그것을 도덕과 숭고함에 녹여냈다.


삶 안에서 인간은 하루하루는 변화를 느끼기보다 스스로를 영원한 존재로 착각하기 쉽고, 10년은 거대한 변화로 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이러한 시간과 변화에 인식의 간극은 인간 스스로의 유한함을 확인시켜 주는 꼴이 되었다. 이렇게 영원성에 대한 강력한 동경은 오히려 유한한 삶을 자각하는 허무주의로 이어졌다. 이로 인해 가상의 세계를 만들어낸 것이 내세이고, 내세는 이번 생의 결산을 통해 결정된다. 한편 삶 속에서 인간은 스스로의 영원성을 과시하고 싶어 하는데 '동안 신드롬'이라는 것은 바로 영원의 대용품인 '지속'의 상품이다. 주름 하나 없는 피부와 나이를 잊은 듯한 탄력 있는 몸은 늙지 않는 신의 속성을 일부 수여받은 것과 같이 추앙된다.

영화 <인타임>의 대부호 필립 웨이스의 장모, 부인, 딸

영화에서 필립 웨이스는 윌에게 자신의 세 여인을 소개한다.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이 세 여인은 그의 장모와 부인 그리고 딸이다. 영화의 설정상 모든 인간은 25세에 노화를 멈추고 같은 외형을 지닌 채 살아간다. 하지만 이러한 외형을 유지하고 젊음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자본의 힘이다. '동안 신드롬'의 정체는 인간의 가치를 타고난 유전자의 영구불변한 존속을 떠올리게 하는 불멸에 대한 동경과 맞닿아있다. 잡티 없고 주름 없는 얼굴, 노화되지 않는 신체를 유지하기 위해 주름과 노화를 만들어내는 모든 것을 회피하려 한다. 스트레스는 노화의 근원이고 스트레스 자체를 피하려는 노력, 그것은 허무로의 여행이었다. 영화에서 100년 이상의 시간을 얻는 윌은 실비아와 이런 대화를 나눈다.


실비아: 무슨 일 해요?

윌: 아직 생각 중이에요.

실비아: 그러시겠죠. 서두를 거 없잖아요.

윌: 하긴, 100년 후에 해도 안 늦으니까.


유한한 인생을 사는 인간에게 한정된 시간은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 사이의 긴장을 만들어낸다. 끊임없는 선택을 통해 하고 싶은 일에 쏟을 수 있는 시간을 늘리고자 다들 그렇게들 노력한다. 하지만 갑작스레 무한의 시간의 주어진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까? 그토록 원하던 휴식을 하루, 이틀... 일주일 그리고 한 달을 보내고 나면 무료함이 찾아온다. 여행이 일상이 되는 순간 여행의 신비로움과 낯섦은 이내 익숙함이 되어버린다. 유한한 시간을 살던 시절 우리는 해야 할 일을 내일로 미루다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할 기회를 잃곤 했다. 하지만 이제 무한의 시간의 주인이 된 순간 오늘 하고 싶은 일을 내일로 미룰지도 모른다. 기회는 여유 속에서 영원히 잠재태로 남게 된다. 이것은 나태의 저주라고 한다.


영생의 축복? 아니 저주!

우리가 영원히 살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은 신의 축복일까? 아니면 저주일까? 영생은 신의 상징이다. 사실 삶을 뜻하는 생(生)은 신에게 쓸 수 없는 말이나 영원히 존재하는 신의 권능은 인간이 가진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눈을 돌리게 해 준다. 

빅토리아 시대의 아일랜드 작가 브램 스토커(Bram Stoker, 1847-1912)는 1897년 공포소설 <드라큘라>를 펴낸다. 소위 뱀파이어물로 성장하는 영생하는 흡혈귀에 대한 신화는 그 자체로 영생하는 신에 상응하는 악의 존재로 빛에 해당하는 신에 대한 어둠을 의미한다. 결국 신성을 모방하기 위해 희생물을 찾는 이 빌런 캐릭터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다른 이의 죽음을 통해 얻으려는 착취의 구조를 고발한다. 이러한 타인의 착취를 통한 영생의 구조는 영화 <인타임>에서 제시하는 시간의 착취를 통한 일부의 영생과 일치한다.

영원한 생의 길이를 얻은 뱀파이어의 운명은 자신을 둘러싼 이들과의 번번한 이별을 통한 시간 속의 고립이다. 어쩌면 신의 권능을 탐낸 드라큘라 백작이나 뱀파이어에 대한 신의 벌은 사랑하게 된 사람들과의 숱한 이별일지도 모른다. 타인의 기억 속에 살아남지 못하고 타인을 기억하기만 해야 하는 것, 그것이 신의 권능을 탐한 자에 대한 벌일지도 모른다. '마시다'라는 뜻의 세르비아어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는 밤피르는 뱀파이어 이야기가 타인의 에너지를 빨아먹는다는 착취의 구조를 비유적으로 드러낸다. 이야기에서 뱀파이어는 대부분 귀족으로 등장하는데 귀족들의 백성들에 대한 지배에 대한 저항의 문학적 표현일지도 모른다. 드라큘라라는 말 역시 루마니아어로 '용의 아들'을 뜻하는데 이 역시 고위 귀족에 대한 음습하고 부정적인, 하지만 동시에 두려운 감정에 투영된 캐릭터라고 볼 수 있다.

영화에 등장하는 zone 1에 살고 있는 부자들과 뱀파이어들의 공통점은 그들의 영생이 하층민의 희생에 의지한다는 점이다. 부자나 뱀파이어가 다수가 되는 순간 그들 사이에 경쟁이 발생하고 그것은 위로부터의 분열을 의미한다. 그들은 철저한 욕망의 통제를 통해 자신들의 영속을 도모한다. 따라서 통제된 욕망은 그들에게서 더 많은 욕망을 향한 의지를 빼앗고, 그들은 무한히 허용된 자유처럼 보이는 허구의 바다에 서서히 가라앉는다. 이들은 축복으로 보이는 지배층에 위치하는 대가로 통제된 욕망의 저주, 나태의 저주 혹은 무의지의 허무주의에 빠진다. 이 무의지를 알아차린 실비아는 말한다.


<무섭지 않아요? 이건 사는 게 아니죠. 틀에 박혀서 즐거움은 느낄 수도 없고...>


죽음의 망각? 아니 순간의 충동!

반대로 하층민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어떻게 해결되어야 하는가? 영화에서 드러나듯 하층민들의 삶은 하루 벌어 하루 사는 과정에서 죽음을 직시할 여유를 갖지 못한다. 그들은 오늘의 죽음만을 피하고자 하며 내일의 죽음에는 눈을 감는다. 윌이 해밀턴을 만난 술집에 많은 사람이 모여있는 것을 보더라도 하루의 고단한 노동의 고통을 진통제로 삭히고자 하는 그들의 절절함이 드러난다. 

그들에게 일생을 바꿀 순간의 기회는 거의 오지 않는다. 선택 가능한 것은 주어진 순간의 즐거움을 얼마나 온전히 느끼고 만족하며 살아갈 수 있느냐이다. 이 순간의 즐거움을 통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순간과 순간 사이에 묻어버린다. 부자들의 방식과는 달리 그들은 이 순간의 쾌락에 모든 것을 건다. 지금이 아니면 지금이 오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윌은 그의 절친 보렐에게 10년이라는 선물을 준다. 이 선물은 그의 친구를 죽음으로 내몬다. 독일어의 Gift는 아이러니하게도 선물이 아닌 '독'을 의미한다. 무절제한 쾌락주의로 불리는 이러한 충동은 자본주의를 굴러가게 하는 기본 덕목인 '소비'를 지향하게 한다. 

왼편: 영화 <부산행>의 한 장면, 오른편: 미국 블랙 프라이데이의 대형 마트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자들의 행태는 절제를 잃는 순간 좀비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피에 굶주린 좀비들의 광기 어린 돌진은 격식 있는 뱀파이어의 품격 있는 흡혈과는 다르다. 그들에게는 눈앞에 있는 상품만 보일 뿐이다. 그들은 눈앞의 먹잇감에 대한 집착은 통제와 분별의 영역을 벗어나있다. 그들의 소비충동은 그들의 본질적 욕망을 찾아내는 것을 방해하고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들뢰즈의 말을 빌어 그들을 "욕망하는 기계"로 만든다. 그들이 타인에 대한 흉내내기-욕망을 충족시키는 동안 시스템은 안정을 찾는다. 시스템에 대한 비판에 더 이상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

윌은 그들에게 해방의 씨앗을 뿌리고자 한다. 그들에게 시간을 마음껏 가지라 한다. 풀려난 시간은 엄청난 인플레이션을 초래하고 이것은 시스템 전체를 붕괴시킬 거대한 폭동의 위기를 시사한다. 시스템은 이러한 하층민의 충동적 폭동을 막기 위해 아슬아슬한 물가의 통제에 온 힘을 쏟는다. 타임키퍼는 이를 위해 파견된 일종의 금융감독원의 역할을 한다.


허무를 넘어...

프리드리히 니체는 허무주의에 가장 적극적으로 대항했던 철학자이다. 그는 허무주의를 이용하여 허무를 벗어나고자 했다. 그의 독특한 설명방식은 인정할 것을 인정하는데서 시작한다. 우리는 존재의 허무를 벗어날 수 없다. 존재란 원래 허무한 것이다. 태어난 목적도 죽을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존재는 의미 없이 태어나 의미 없이 죽어간다. 의미는 우리의 태도와 마음가짐에서 비롯되고 신은 우리의 그것에 관심이 없다. 니체의 허무에 대한 해결책은 영원의 허구성을 인식하고, 순간의 영원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니체의 유명한 '영원회귀(die ewige Wiederkunft)' 사상은 우리의 삶의 모든 순간은 영원히 동일하게 반복된다는 가정에서 비롯된다. 한번 선택한 것은 영원히 반복해야 하므로 이 선택의 순간은 영원을 결정하게 된다. 다시 말해 지금 우리의 선택은 영구불변한, 미룰 수 없는 유일무이한 기회이다. 타인의 시선, 평가, 취향 등에 관심을 둘 필요가 없다. 그것이 필요한 경우는 다만 '시도'를 위해서일 뿐, 올바른 판단은 내가 '무엇'을 하느냐보다 무엇을 '어떻게' 하느냐에 있다. 바꿀 수 없는 순간의 선택, 그것을 받아들이고 온전히 즐기고 사랑하는 것. 이것을 디오니소스적 사랑, 포괄의 포괄이라 한다.

앤디 워홀, 왼편 <캠밸 수프 캔>, 1962; 오른편 <마릴린 먼로 두폭화>, 1962

미국의 예술 비평가이자 철학자 아서 단토(Arthur C. Danto)는 <예술의 종말> (1984)을 펴낸다. 단토는 앤디 워홀의 <브릴로 박스>(1964)를 이야기하며 기존 예술의 종말을 이야기한다. 사르트르와 니체를 연구하여 자신의 학문 세계를 정립한 단토는 신이 죽은 세계를 재정의하는 두 철학자의 이야기를 토대로 예술이 죽은 후의 세계를 관조할 눈을 얻었다. 

남들이 가진 것을 똑같이 가졌다는 것은 내가 가진 모든 것이 의미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모두에게 그 의미가 각각 다른 사물이 있을 뿐이다. 김춘수의 <꽃>에서 말하듯 하나의 사물이 나에게도 와 하나의 의미가 되듯, 하이데거가 '손안에 있음'(zuhandenheit)을 통해 사물과 나의 관계가 서로를 규정한다고 말하듯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은 나의 명명하기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낡은 서판과 새로운 서판들에 대하여'에서 이렇게 말한다.


Das Vergangne am Menschen zu erlösen und alles »Es war« umzuschaffen, bis der Wille spricht: »Aber so wollte ich es! So werde ich's wollen –«

– dies hieß ich ihnen Erlösung, dies allein lehrte ich sie Erlösung heißen.

(인간에게 있어 이미 지나간 것을 구원하고 일체의 "그러했다"를 바꾸기 위해 이 의지는 말한다. "나는 그러기를 원했다! 그리고 나는 그러기를 원할 것이다.)

니체에게 '의지'는 허무를 넘어설 수 있는 힘을 가동하는 에너지와 같다. 두 가지 허무주의의 위기 앞에서 스스로에게 "그러기를 원한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용기를 통해 세상과 투쟁하고 스스로 당당히 서는 것이 실존하는 우리가 허무를 극복하는 방법이다.


다음 시간에는 시스템의 대리인 타임키퍼에 대해 알아본다. 그리고 그들의 충실한 일처리가 사회를 어떻게 만드는 지를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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