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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mo ludens Jul 26. 2024

생각하지 않는 죄

영화 <인타임>에 대한 해석 #5

영화에서 공정한 사회를 위해 활동하는 감시자는 타임키퍼의 역할이다. 그들은 정상적이지 않은 시간의 흐름을 추적하고 올바른 방법으로 획득하지 않은 시간을 원상태로 돌리는 역할을 한다. 현대사회의 금융감독원이 주식시장의 올바른 거래를 감독하는 것과 비슷하다. 타임키퍼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공직자 윤리'와 같다. 과연 가장 깨끗해야 하는 타임키퍼는 윤리적 무결함을 통해 공동체의 균형잡이가 될 수 있을 것인가?


무엇을 위한 지킴이?

영화에서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한 두 캐릭터가 등장한다. 하나는 타임키퍼이고 다른 하나는 미닛맨이다. 타임키퍼와 달리 미닛맨은 활동 범위의 한계가 명확하다. 미닛맨은 빈민가에 머물며 폭력배와 같이 행동한다. 이들은 시스템이 온전히 작동하기 위한 필요악의 존재다. 이들이 없으면 빈민가에서 일어나는 비정상적 행위를 감시하는 것이 힘들어진다. 이곳까지 타임키퍼가 활동하는 것은 행정력의 낭비로 여기는 듯하다. 이곳 주민들의 범죄 따위야 사회 전체를 흔들 정도는 아니기 때문에, 적당한 폭력과 겁박으로 충분하다. 사회의 균형을 위해 공적 조직을 완전히 갖추는 대신 큰 범죄 조직과 정부의 결탁은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정상국가로 자기매김 하기 위해서 공적 감시 시스템의 완비는 필수적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범죄와의 전쟁이라 불리는 대표적 사건을 통해 사적 시스템을 제거하기 위한 노력을 했고 우리 사회에서 소위 깡패는 눈에 보이는 곳으로부터 점차 사라져 갔다. 이러한 세력들을 완전히 소탕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고 실제로 그들은 정치권력을 휘두르는 자들과 결탁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의 행태는 마피아가 시칠리아 섬의 주인 행세를 하는 것과 유사하다. 이 구역은 그들의 것이고 그들은 이 구역의 법 그 자체다. 국가 속에 또 다른 국가가 있다.

미닛맨들은 불량배와 같이 빈민가 주민들을 겁박하고 때론 강압적으로 시간을 빼앗거나 '시간 뺏기 게임'을 통해 목숨을 빼앗기도 한다. 하지만 중앙정부의 손이 닿지 않는 이곳에서 그들은 작은 소요로 큰 소요를 막는 최소한의 치안 역할을 한다. 이들 이외에 다른 사람이나 세력의 폭력을 허용하지 않는다. 많은 남미국가에서 마약 카르텔이 지배한 곳에서 평화와 비슷한 것이 유지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폭력의 독점적 소유는 평화를 유지하는 것처럼 보이나 일방적 폭력에 대한 공동체의 침묵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것이 근대 국가와 다른 점은 근대국가는 합의된 권력 양도롤 통한 국가 기관의 폭력 관리에 있고 헌법으로 이에 대한 견제가 명시되어 있다. 하지만 미닛맨들의 폭력은 동의되지 않은 독점적 폭력이다. 그렇다면 중앙 정부는 왜 이들을 방관할까?


작은 필요악

미닛맨은 빈민가 주민들의 몇 시간을 뜯어낸다. 그들이 관리하는 시간의 단위는 그들의 이름에도 등장하듯 '미닛(minute)', 즉 '분'이다. 이렇게 야금야금 긁어모은 시간으로 그들은 노동에서 해방된다. 이 베짱이들은 무리를 지어 다니며 기껏 노동하지 않고자 할 뿐이다. 이들이 엄청난 목적이나 야망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다만 이들의 역할은 혹시나 발생할 시간의 과도한 유입을 발견하고 고발하는 일이다. 영화에서 해밀턴의 100시간을 발견한 이들은 당연히 이 시간을 소유를 용납하지 않는다. 만약 빈민가에 이 시간이 풀려난다면 막대한 인플레이션으로 빈민가의 물가는 폭등할 것이다. 그렇다면 참기 힘든 생활고에 견디다 못한 주민들은 폭도로 바뀌고 혁명을 일으킬 것이 자명하다. 미닛맨의 존재는 이 위기를 견제하기 위해 정부가 허용한 필요악 세력이다. 이 미닛맨들은 빈민가에서 생겨날 수 있는 정당한 영웅의 탄생을 막는 역할도 한다. 영화에서 자세한 설명을 하지는 않지만 윌의 아버지가 시도했음을 짐작할 수 있는 과거의 혁명적 움직임을 제지한 것도 미닛맨과 타임키퍼로 보인다.

그렇다면 미닛맨의 존재는 필요한가? 중앙 정부는 이 필요악을 자신의 시스템을 존속하기 위해 허용하지만 이들이 없다면 시스템의 붕괴를 필연적인 것일까? 미닛맨의 존재는 시스템의 불완전성을 드러내는 동시에 감춘다. 미닛맨들이 빈민가 주민들의 불만을 잠재우는 방식은 일종의 언론 통제와 비슷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들은 길거리에서 모종의 작당을 허용하지 않고 그들보다 강력한 단체의 등장을 견제한다. 그리고 빈민가의 사소한 문제의 원인을 미닛맨들로 돌려 시스템 전체에 대한 의구심을 가린다. 시스템은 이 은폐의 기술을 통해 미닛맨의 존재를 허용한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

미닛맨이 '분' 단위의 필요악이라면 타임키퍼가 지키고자 하는 시스템은 큰 필요악이다. 시스템은 현체제의 유지를 옹호한다. 변화는 시스템의 위기를 초래하기 때문에 시스템이 만들어놓은 기준은 절대적이어야 한다. 이 절대적 기준을 수호하는 집단이 타임키퍼다. 그런데 이 시스템의 기준은 완전한 것일까? 시스템은 모두를 구원하는 유일한 방법일까? 과연 시스템에 대해 의문을 품고 '생각하는' 것은, '반항하는' 것은 공동체에 위기를 가져다줄까? 알베르 까뮈(1913-1960)는 1951년 <반항하는 인간>을 펴낸다. 이미 <시지프 신화>와 <이방인>(1942)에서 인간 존재의 실존적 가치를 다룬 바 있는 까뮈는 <반항하는 인간>을 통해 데카르트의 <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에 대한 그의 비판적 의식을 드러낸다. 그에게 '생각'은 '반항'이며 이 반항적 사고와 행위를 통해 인간은 세계의 부조리에 맞서 싸우며 스스로의 실존을 외친다.


오귀스트 로댕 (1840-1917)은 '생각하는 사람'을 1904년에 만들었다. 이 작품은 그가 죽기 직전까지 37년간 몰두한 평생의 걸작 '지옥의 문'(1880-1917)의 일부이다. <지옥의 문>은 단테의 <신곡>의 '지옥 편'에 영감을 받았다.

왼편: <생각하는 사람>, 오귀스트 로댕, 1904; 오른편: <지옥의 문>, 오귀스트 로댕, 1880-1917

<지옥의 문>의 내용은 단테의 신곡의 내용의 일부인 우골리노 백작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우골리노 백작은 13세기 이탈리아 피사의 공작이었다. 그는 당시 대주교 우발디니와 정치적으로 대립하였다. 권력 투쟁에서 배신당하고 패배한 우골리노는 자신의 자녀와 손자와 함께 탑에 갇혀 굶어 죽게 된다. 그는 죽기 전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자신의 자녀의 시신을 먹게 되고 지옥의 맨 아래층으로 떨어지는 극형을 받게 된다.

우리는 수많은 역사적 사건에서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인육을 먹고 생존하는 일들을 목격하게 된다. 그리고 이 순간 옳고 그름에 대해 논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낀다. 작가 단테 역시 이 고뇌를 잘 알고 있었다. 로댕은 단테의 작품을 수차례 읽으며 인간의 삶에서 발생하는 '지옥의 순간들'에 대해 고민했을 것이다. <지옥의 문>의 윗부분에는 이렇게 쓰여있었다고 한다.


<이곳에 들어오는 자 희망을 버려라!>


단테와 로댕이 그려내는 지옥의 모습은 우리의 현실세계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떠올리게 한다. 이 모든 순간에 인간은 '고뇌'한다. 생각하는 사람은 '고뇌하는 사람'이다. 이 고뇌는 적극적으로 선하고자 하는 고뇌다. 적당히 악을 피하려는 생각은 극악으로 통할 수 있다. 한나 아렌트는 나치 부역자 아이히만의 재판 과정을 청취하며 '악의 평범성'을 발견했다. 모든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에게 내재해 있는 이 평범한 악은 생각하지 않는 자의 악행을 고발한다. 아이히만이 하지 않은 것은 무엇일까? 영화 <인타임>에서 타임키퍼가 하지 않은 것은 과연 무엇일까?


윌: 시간 도둑을 찾는 거라면 여기 사람들 다 잡아가요.

레이먼드: 알만하군. 그게 정의다? 난 타이키퍼지. 정의 따위엔 관심 없어. 내게 중요한 건 시간뿐이지. 초, 분, 시. 근데 시간은 엄한 놈한테 넘어간 거거든.


타임키퍼 레이먼드는 '정의'에 관심이 없다. 그의 직업은 사회의 정의를 구현하기 위함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정의' 자체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그에게 주어진 직분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가 말하는 '엄한 놈'은 누구인지 고민하지 않은 채 시스템이 말하는 '엄한 자'를 고민 없이 받아들일 뿐이다. 그가 보이는 '평범한 악'은 수많은 빈민들에게 눈을 감고 결국 스스로의 죽음마저 외면한다.


<우리는 역사를 나와는 전혀 관계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거나 도서관의 낡은 서가에 꽂혀 있는 오래된 책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우리들은 매일의 삶 자체가 곧 역사다. 지금 무엇을 위해 살고 어떻게 행동하는가? 그것이 바로 매일의 역사를 만든다. 두려워하거나 허둥대지 않고 오늘 하루를 마쳤는가, 게으르게 보냈는가, 용감하게 도전했는가, 어떤 일을 어제보다 더 나은 방법으로 행했는가, 이 같은 태도들이 하나하나 쌓여 매일의 역사를 만드는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아침놀> (1881)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영화나 소설 등에서 한 개인의 삶의 일부를 옅본다. 하지만 현명한 자는 그들의 짧은 경험에서 '역사'를 바라본다. 니체가 말하는 '역사'는 시행착오 그 자체다. 실수와 실패를 경험하지 않는 인간을 부정한다. 인간은 수많은 실수와 실패를 반복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존재다. 어제보다 나은 방법을 위해 또 다른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하게 도전하는 자, 그가 바로 니체가 말하는 위버멘쉬(Übermensch)이다. 그가 바로 우리의 삶의 곳곳에 위치한 수많은 부조리를 이겨낼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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