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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mo ludens Jun 21. 2024

<시간은 돈, 돈은 만물의 척도>

영화 <인타임>에 대한 해석

돈과 시간

영화 <인타임>에서 볼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돈이다. 영화 속에서 사람들은 돈 대신 손목에 표시되는 시간으로 지불한다. 우리는 흔히 이런 말로 시간과 돈의 관계를 표현한다.


<시간은 돈이다>


이 말은 미국 독립선언문을 작성한 벤자민 플랭클린 (Benjamin Franklin, 1706-1790)이 남긴 문장이다. 무엇보다 돈의 중요성을 잘 아는 현대인들에게 시간은 돈에 비유했을 때 비로소 그 중요성이 강조된다. 돈과 시간의 관계를 연결하기 위해서 하나의 개념이 더 필요하다. '기회비용(opportunity cost)'은 어떤 일을 하도록 선택하는 경우 다른 것에 대한 선택의 기회를 상실함을 의미한다. 결국 올바른 판단을 하기 위해 모든 가능성에 대해 경제적 분석을 내린다는 것을 말한다. 입시를 치르는 학생에게 흔히들 하는 조언이 있다. "딱 3년만 고생하면 인생이 바뀐다.", "나중에 이 3년을 따라잡으려면 30년이 걸린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등등의 이런 말은 공부를 하는 것을 포기하는 순간 벌어지는 '자명한' 미래에 대한 경고다. 그런데 정말로 이것은 '자명한' 것일까?

세상이 변화하지 않는다면 '자명한' 일은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 세상의 변화가 느린 경우 '자명한' 일은 거의 그렇게 일어난다. 현재의 권력은 자명한 것은 더욱 확고하게 만들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자명한' 기준은 무엇일까?

<아테네 학당>, 라파엘, 1510-11

불변의 기준을 제시한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그림의 한가운데서 손가락 하나로 하늘을 가리키고 있다. 그에게 진리는 오직 단 하나. 이데아는 유일한 것들만이 있는 세계이다. 이데아는 변하지 않는 기준 그 자체다. 우리가 사는 이 그림자 세계에서는 절대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 가능한 세계가 불변하는 자명한 것들이다. 그림 왼편 앞부분에서 작은 칠판을 앞에 두고 책에 뭔가를 적고 있는 붉은 옷을 입은 인물은 피타고라스다. 피타고라스는 우주의 본질은 숫자라고 했고 플라톤은 이 숫자의 세계를 이데아를 구상하는 틀로 삼았다. 플라톤이 가리키는 세계는 '손가락'의 세계다. 손가락은 라틴어로 'digitus'로 티지털의 어원이 된다. 모든 것은 손가락으로 셀 수 있는 것들로 환원된다. 한 학급에 30명의 학생들은 각기 다른 개체와 인격이지만 30이라는 숫자로 간단히 표현된다. 이 30이라는 숫자는 각 학생들의 개성과 특색을 다 지워버리는 힘이다. 여기에서 남들과 다른 개인의 고유한 것은 비교불가능한 모호한 것이므로 기준에서 배제된다.


<사유는 아주 다른 것으로 진입할 수 있다. 사유는 같은 것을 중단시킬 수 있다. 그래서 사유는 사건성을 지닌다. 이에 반해 계산은 같은 것의 무한한 반복이다. 사유에 의해 계산은 어떤 새로운 상태도 낳을 수 없다. 계산은 사건을 모른다. 반면, 진정한 사유는 사건적이다. 프랑스어 티지털은 numérique 다. 수적인 것은 모든 것을 셀 수 있고 비교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든다. 그래서 같은 것을 영구화한다.> - 한병철의 <타자의 추방>, p. 12 -


숫자로서의 시간, 돈으로서의 시간은 모든 삶을 하나의 기준으로 평가하려는 폭력과 같다. 삶이 주는 미묘한 감정과 의미는 계산되지 않고 계산되지 않는 것은 천문학적 금액으로 측정되거나 혹은 아무런 가치를 가지지 못한다.


객관적 평가의 허구성

인간을 평가할 때 연봉, 재산, 키, 아이큐, 신체사이즈 등의 객관적 지표는 인간에 대한 비인간적 대우를 묵인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보통 이런 지표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이왕이면'의 논리를 꺼내든다. '이왕이면 연봉이 높은', '이왕이면 키가 큰', '이왕이면 아이큐가 높은', '이왕이면 신체조건이 좋은'과 같은 말에는 객관적 평가에 스스로의 평가를 굴복시키는 것이다. 객관적 평가는 스스로 한 사람에 대한 평가를 내리기에 부족한 경우 다수의 평가에 의존하여 안정감을 누리려는 게으름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논리는 객관성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맞춤형 판단을 요구한다. 한 인간의 가치는 그 사람의 과거에 의해 결정된 현재로만 평가될 수만은 없다. 마이클 샌델 교수는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결과주의', '능력주의'를 비판한다. 그가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는 부분은 '공정한 평가'라는 착각이다. 인간에 대한 평가를 '공정'하게 내리고자 하는데서 발생하는 착각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생존한 자들에게 영광을 돌리려 한다는데 있다. 인간이 만들어낸 입시라는 가상의 생존상황은 실제 변화를 반영하지 못한다. 이 생존은 미래에 다가올 위기에 대한 대처능력에 대한 것인데 입시와 같은 가상의 생존상황은 현재의 기준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누구의 죽음'과 '한놈의 죽음'

영화에서 윌이 일하는 공장은 시간을 저장하는 도구를 만든다. 이 공장에서 노동자들은 자신들은 평생 가져보지도 못할 혹은 가질 가능성이 없는 일종의 지갑 혹은 돈가방을 만든다. 대부분의 노동자는 며칠 정도의 시간만이 있는데 굳이 시간을 써서 넣을 돈이 없는 지갑을 살 필요가 없다. 이 공장에서 한 사람이 복도에 쓰러져있다. 쓰러진 사람에게 윌의 친구 보렐은 "또 한놈 갔네"라고 말한다. 디지털의 세계에서 동료 노동자의 죽음은 숫자 1의 감소에 불과하다.

트롤리 딜레마

영국의 철학자 필리파 풋(Philippa Ruth Foot, 1920-2010)이 제시한 이 모델은 광산을 이동하는 차(trolley)의 선로를 바꾸는 것으로 피해자의 숫자가 달라진다면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하겠느냐는 윤리적 질문을 다룬다. 공리주의적 해석을 위한 예로 많이 쓰이는 이 질문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다수를 구하는 쪽으로 선택을 해야 한다는 답을 한다. 사람의 목숨을 숫자로 세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모델일 뿐 실제는 그와 다르다. 만약 소수의 희생자가 있는 쪽에 자신의 지인, 가족, 친구가 있다면 과연 다수를 구하는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만약 다수의 희생자가 범죄자나 살인범들이라면? 이렇게 대상에 대한 약간의 구체성만 들어가도 우리의 판단은 양적 공리주의로 판단하기 어려운 것으로 변한다.

공리주의는 우리의 도덕적 판단을 가볍게 해 주었다. 합리적 사고에 의한 효율적 판단은 인간의 질적 가치를 희생하여 간단한 수학적 계산으로 상황을 단순화한다. 이 순간 ‘누군가’는 사라지고 ‘한놈’만 남는다.


한 놈들의 합은 한 분

영화의 각 구역들 사이의 차이는 정확히 기술되지 않는다. 다만 통행료를 기준으로 구역 사이를 이동할 때마다 요구되는 시간은 커진다. 첨엔 한 달, 두 달…1년…각 구역 주민들의 임금이 얼마인지는 이를 기준으로 짐작할 따름이다. 윌이 하루동안 일하고 받는 임금은 점차 줄어만 간다. 이유를 묻자 할당량이 늘었다고 한다. 생산량보다 할당량이 늘어서 임금은 줄어드는 것, 인플레이션이다. 노동자의 노동의 가치는 점차 줄어만 간다는 뜻이다. 노동자는 노동을 통해 돈을 번다. 다시 말해 시간을 들여 일을 하고 시간을 받아간다는 말이다. 노동에 투여한 시간과 임금으로 받는 시간 사이의 차이만큼이 일에 대한 노동자의 가치다. 팔뚝에 표시된 13자리의 숫자는 년, 월, 주, 시, 분, 초로 구성되는데 윌이 임금을 받고 난 후에 그의 시계에 찍힌 시간은 1주 4시간 50분이다. 이후의 대사를 보더라도 윌이 사는 구역의 평균 자산은 일주일 남짓이다. 이곳에 재림하게 되는 해밀턴의 팔뚝에는 116년이라는 숫자가 찍힌다. 1년은 52주, 116년은 약 6000주로 해밀턴은 6000여 명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후 1 구역의 보스 격인 필립 웨이스는 1000시간짜리 저장소를 가지고 있다. 6만여 명의 생명을 손바닥만 한 도구에 넣고 다니는 그는 실로 영원에 준하는 시간을 가진 존재다.

실제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도 사람마다 각기 다른 임금이 적용된다. 누군가는 고등학교 때까지의 성적으로 결정된 대학과 학과에 따라 안정된 삶과 임금이 보장되고 누군가는 단 하나의 시험으로 변리사, 회계사, 건축사 등의 전문직에 종사하게 되어 일반 노동자에 비해 높은 임금을 책정받게 된다. 이들의 노력이 보장받는 것이 이상하거나 부당한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의 구조가 소수에게 더 많은 임금을 책정하는 것이라는 시스템에 대한 이야기이다. 문제는 다수의 노동자가 소수의 자본가가 되기 위한 투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왜곡된 인식이다. 마이클 샌델 교수가 지적하듯 이러한 성공주의, 능력주의는 성공의 결과가 그 사람의 인생 전반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자리 잡는다. 부당한 방법으로 성공한 사람들에 대한 의심보다 정당한 방법으로 가난한 자들에 대한 멸시가 주를 이룬다.

우리가 구매하고 소비하는 물품들을 살펴보자. 와인은 포도를 만드는 땅과 태양 그리고 농부의 노동력과 포도를 와인으로 뽑아내는 전문가의 기술로 만들어진다. 이렇게 만들어진 와인의 가격은 편의점에서 구매할 수 있는 몇 천 원짜리부터 몇 만 원, 몇 십만 원짜리 와인까지 다양하다. 많은 사람들이 이름은 알지만 맛은 모르는 와인 "로마네 꽁띠"는 빈티지마다 가격이 다르지만 한 병당 가격이 천만 원을 훌쩍 넘기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렇다면 몇 천 원짜리 와인과 수 천만 원짜리 와인의 가격은 왜 그렇게나 다를까? 그 정도의 가치의 차이나 날까?

로마네 꽁띠 한 병은 일반 노동자의 반년 혹은 일 년의 노동가치와 같다. 이 노동자의 삶에 대한 전반적 평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런 비교는 흔하다. '사람'을 '임금'으로 판단하는 디지털적 평가는 얼마만큼의 '한놈'들이 '한분'과 같은 가치를 갖게 되는지 쉽게 비교하게 해 준다. 그렇다면 그들이 소유한 돈과 그들이 소유한 시간의 관계는 어떨까?


같은 시간 다른 시간

우리의 삶에는 두 가지 시간이 존재한다. 이전 시간에 다룬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의 시간은 '거래 불가능한 시간'과 '거래 가능한 시간'으로 재정의될 수 있다. 모두에게 적용되는 객관적이고 정량적인 크로노스의 시간은 타인에게 양도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것을 재화로 바꾸는 과정에서 우리는 '거래 가능한 시간'의 영역을 발견한다. 자급자족을 하던 시절 우리는 자신이 입을 옷, 먹을 음식, 살 집을 각자가 만들어야 했다. 점차 사람들이 모여 살며 마을을 이루어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면서 직업이 생겨나고 거래의 개념이 만들어졌다. 쌀 한가마를 사는 거래 행위는 내가 쌀 한가마를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을 사는 것과 다르지 않다. 신발 한 켤레의 합리적인 가격은 내가 그것을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에 대한 합당한 비교평가이다. 더 많이 쳐주면 비싼 것이고 더 적게 쳐주면 싼 것이 된다. 따라서 많은 물건을 소비하는 것은 많은 시간을 사들이는 것과 같다. 고된 노동의 결과로 얻은 임금을 더 많은 소비로 채우고자 하는 행태는 자신이 들인 시간을 회수하고자 하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통장의 잔고는 시간을 회수할 수 있는 능력을 나타내는 것이고 누군가는 이 능력 자체만을 키우는 짠돌이의 삶을 선택하기도 한다.

크로노스의 시간이라도 해서 모두 '거래 가능한 시간'인 것은 아니다. 우리가 영생할 수 없는 것이 그 증거다. 영화에서 소위 부자들은 영생할 수 있다. 시간을 계속 벌어들이기만 하면 삶은 영원히 연장되기 때문이다. 사실 영화의 이런 부분은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이해될 수 있다. 카이로스의 시간은 주관적, 질적 시간, 다른 말로는 '기회의 시간'이다. 부를 통해 수많은 '기회'를 사들인다면 한 사람의 일생에서 이루어내기 힘든 성취를 달성할 수 있다. 갈수록 높아지는 스펙은 이렇게 만들어진다. 하나의 언어를 배우기 위해 A 씨는 학원을 등록해야 한다. 학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시급 만원인 아르바이트를 하고 두 달 동안 번 돈으로 한 달의 학원비와 생활비를 마련한다. 1년 과정의 학원비를 위해 2년을 투자해야 한다. 이 시간을 줄이기 위해 일하며 공부한다. 시간을 버는 방법은 하루를 길게 만드는 것, 잠을 줄이고 쉬지 않는 것이다. 한편 B 씨는 다른 나라에서 생활하며 빠른 시간 안에 언어를 습득한다. 어차피 돈은 충분하기 때문이다. 빠진 돈은 좋은 직장을 구해서 금방 충당할 수 있다. 그들은 돈으로 카이로스의 시간, 즉 기회를 구매한다.


<돈은 만물의 척도이다>

영화에서는 25세가 되는 순간 팔뚝의 시간이 흐르기 시작한다. 25세라는 설정은 사회 진출의 시간을 의미하는 듯하다. 대학을 마치고 구직활동을 통해 직업을 갖는 시기를 가정한 듯한데 이 시점에 두 주인공 윌과 실비아는 각기 다른 경험을 한다. 윌은 길거리에서 실비아는 아늑한 침대 위에서 이 시간을 맞이한다. 그들에게는 1년이라는 시간이 주어지는데 윌은 일주일 만에 빚을 갚기 위해 그 시간을 다 써버리고 이후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삶을 산다. 반면 실비아는 먼저 거울을 본다. 평생 간직할 모습을 확인하고 아버지로부터 10년의 시간을 선물 받는다. 그녀에게 생존에 대한 걱정은 없다. 그들의 시간은 전혀 다른 시작을 같게 된다. 실비아는 묻는다. "내가 싫지? 내 출신이..." 이에 대해 윌은 대답한다.


<타고난 거니 누구 탓도 아니지.>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이런 차이가 생겨났을까? 누구의 탓도 아니라면 무엇의 탓일까? 윌은 성숙한 자로 자본가에 적개심을 가진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다. 그는 마르크스와 같이 시스템의 문제를 지적한다. 잉여가치로 인한 지배구조의 탄생과 혁명을 통한 구조를 혁파하려는 마르크스 사상을 장착한 인물이 윌이다. 윌은 실비아와 함께 이 시스템의 붕괴를 시도한다. '타고난 것'에 대한 의문제기는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끊임없이 시도해 온 질문이다. 계급에 있어서 '타고난 것'은 거의 극복되었다. 봉건사회와 귀족사회의 틀을 깨며 핏줄에 의한 '타고난 것'은 여러 혁명을 통해 공적인 가치를 잃었다. 여전히 남아있는 사적인 평가, 즉 집안이 어떤지 유전자가 어떤지에 대한 것은 각자의 평가로 남겨졌다. 하지만 영국의 자유주의자 존 로크(John Locke, 1632-1704)조차 인간의 평등에는 도달했으나 부에 대한 평등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의 철학에서 '사회계약'이 발생한 전제조건은 재산에 대한 소유권을 지키기 위해 발생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타고난 것(born to be)'은 극복했으나 '갖고 난 것(born to have)'은 극복하지 못했다. '갖고 난 것'은 우리의 가치를 결정하는 핵심적인 요소가 되었고 이 유물론(materialism)의 승리는 우리의 정신적 가치조차 수치화할 수 있는 것들의 결과로 만들었다.


<시간은 돈이요, 돈은 만물의 척도다.>


슬픈 일이다. 이 슬픔을 극복하기 위해 영화에서 한 인물이 빈민가에 등장한다. 구세주인가 혼돈을 일으키는 자인가? 해밀턴의 의미에 대해 다음 시간에 다루어 보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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