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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mo ludens Jun 07. 2024

사랑, 나만의 이유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 대한 해석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는 다양한 대상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한다. 연인 사이의 사랑, 도시에 대한 사랑, 예술 작품에 대한 사랑, 시대에 대한 사랑 등 인간이 하고 있는 사랑의 본질적 감정에 대해 고민하게 해 준다. 영화는 주인공 길 펜더의 약혼녀 이네즈와 1920년대의 뮤즈 아드리아나, 현재의 골동품가게 종업원 가브리엘을 통해 이러한 사랑에 대한 견해를 이끌어간다. 과거에 존재하는 아드리아나는 이네즈와의 사랑의 거짓을 밝히고 가브리엘에 대한 호감으로 향하게 하는 가교 역할을 한다. 길은 아드리아나와의 감정교류와 대화를 통해 '현재의 결핍'이 아닌 '현재, 그 자체'의 가치를 깨닫게 된다.


사랑의 이유

영화에서 피카소는 그의 연인 아드리아나의 초상화에 대해 거트루드 슈타인과 의견 충돌을 보인다.

<해변에서 공을 가지고 노는 여인>, 파블로 피카소, 1928

피카소는 1928년 <해변에서 공을 가지고 노는 여인>을 여러 점 발표한다. 대체적으로 비슷한 신체를 표현하는데 배경이나 부가적 묘사에 약간씩의 차이는 있다. 영화에서는 저 여인을 아드리아나에 대한 초상화라고 이야기한다. 이에 대해 슈타인은 피카소를 강하게 비판한다.


슈타인: "피카소에게 이건 아드리아나가 아니라고 했어요. 보편성만 있지 객관성이 없어."

피카소: "잘못 본 거예요. 아드리아나를 몰라서 그래. 움직임과 화법을 봐요. 정확히 담아냈어요."

슈타인: "그렇지 않아요. 그림을 봐요. 넘쳐흐르는 성적 암시에 쌓여 있는 성욕, 아름답지만, 미묘함과 은은한 관능미가 없잖아요. 아드리아나의 첫인상이 어때요?"

길 펜더: "기가 막히게 사랑스럽네요."

슈타인: "네, 근데 미묘한 아름다움이죠."

헤밍웨이: "맞아요, 슈타인 부인. 작가가 객관성을 잃을만하네요."

슈타인: "저걸 피갈 광장의 색기 넘치는 창녀예요."


슈타인과 피카소의 첨예한 갈등의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과연 피카소의 그림이 '아드리아나'를 잘 드러내고 있느냐의 문제이다. 그렇다면 피카소는 아드리아나의 '무엇'을 드러내야 할까? 이 부분에서 슈타인은 '객관성'을 드러내야 한다고 주장하고 피카소는 '주관성'이라 한다. 피카소의 변명에 힘을 싣자면 슈타인이 그림을 비판하는 이유는 "아드리아나를 몰라서"이다. 피카소의 사랑의 이유를 슈타인은 모른다. 슈타인은 피카소 자신만이 아는 이유에 '객관성'을 담아 모두가 볼 수 있게 드러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사랑의 이유'가 본질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에서 큰 차이를 보이지는 않지만 그 이유를 표현하는 그림은 객관성을 담아야 하는지 주관성을 담아야 하는지가 첨예한 갈등의 핵심이다. 이 문제는 초상화(portrait)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 질문으로 사물과 본질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이 사람은 그 사람!

초상화는 라틴어 pro - trahere의 합성어로 '앞으로 끄집어내다'라는 의미이다. 대상 인물을 그린다는 것은 그 인물을 '우리 눈앞으로' 내놓는 것이다. 여기서 회화의 기본적인 역할인 '재현'이 작동한다. 초상화는 한 인물의 순간을 포착하여 영원한 재현의 상황에 놓는 것이다. 우리가 영정사진을 놓고 이미 죽은 사람을 떠올리는 것은 그 인물의 한 순간을 포착해서 여러 다른 시간으로 소환하기 위함이다.

<회화의 기원>, 장 밥티스트 레뇨, 1785

고대그리스의 부타데스(Butades)라는 도공에게는 어린 딸이 있었는데 그녀의 연인은 다음날이면 전쟁터로 가야만 했다. 그녀는 당분간 혹은 영원히 볼 수 없을 그를 떠올리기 위해 벽면에 비친 그의 그림자를 따라 그린다. 이것이 회화의 기원이라는 것이 '부타데스 미토스(Mythos)'이다. 그림은 그 인물의 전부를 담을 수는 없다.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것만을 담아서 그 전체성을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회화는 한계를 갖는다. 플라톤은 가시세계, 즉 감각의 세계를 본질적 세계와 구별했다.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는 보이지 않는 것에 본질이 있다는 사고를 기반으로 한다.

<플라톤의 동굴>, 얀 산레담, 1604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는 우리의 인식의 한계를 설명한다. 동굴에 갇힌 죄수는 동굴 벽에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실재하는 사물 혹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순간 풀려난 죄수는 그림자의 정체가 횃불에 비친 사물의 실루엣임을 자각한다. 하지만 이 횃불에 비친 그림자는 사물의 어떠한 색채도 담지 못하는 단순화된 재현임을 아직은 알지 못한다. 죄수가 동굴 밖으로 나와 태양의 빛을 바라보는 순간 형형색색의 다채로움과 입체적 형태를 가진 사물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된다. 플라톤에게 회화와 조각은 사물의 진짜 모습을 표현하기에 부족하며 나아가 가짜를 진짜로 생각하게 하는 부도덕한 예술이었다.


그렇다면 초상화는 어떻게 이 사람을 그 사람으로 생각하게 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정확히 이 사람의 본질을 지시하게 할 수 있을까?

왼편: <성 마태오>, 필사본 복음서의 한 페이지, 800년경; 오른편: <성 마태오의 소명>, 카라바조, 1602

한 가지 방법으로는 더 정밀하게 그리는 방법이다. 위의 두 그림은 성자 마태오를 그린 그림들이다. 어느 그림이 이 성자를 더 잘 떠올리게 할까? 오른편의 카라바조의 마태오가 우리에게 그를 더 생생하게 떠오르게 만드는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생생함이 그의 본질을 더 잘 표현한 것은 확실한가? 왼편의 그림에서 미술가는 마태오의 진중하고 경건한 자세를 그리고자 했다. 복음서를 쓰고 있는 그의 충실하고 신중함이 그의 신앙심을 드러내고 있다. 미술가는 그의 '신앙심'을 본질로 생각했을 터다. 반면 카라바조는 글을 쓰는데 집중하지 못하고 다른 곳에 눈을 돌린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천사의 모습에 눈과 몸을 돌리고 손으로는 글을 쓴다. 카라바조는 하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복음서를 쓰는 '신의 영감'을 본질로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두 그림 모두 실제 마태오를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그린 그림이다. 실제 모델을 보지 못한 사람이 그릴 수 있는 것은 오히려 비가시적 본질을 그려낸 것에 불과하고 여기에는 보편성과 객관성만이 존재한다. 미술가는 마태오에 대한 어떠한 주관적 감상을 담아낼 수 없다. 


이 사람이 그 사람?

실제로 피카소는 슈타인의 초상화를 그려준 적이 있다.

왼편: <거트루드 슈타인>, 파블로 피카소, 1906; 오른편: 파리 작업실의 슈타인, 1910년 이전

오른편의 사진 속에 슈타인은 피카소가 그려준 그림 아래 소파에 앉아있다. 왼편의 그림처럼 피카소는 실제로 1906년에 그녀의 초상화 작업을 했는데 슈타인은 피카소가 그린 자신의 초상화를 달갑지 않게 여겼다고 한다. 하지만 점차 피카소의 예술 세계, 나아가 작가의 주관성이 예술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는 시대를 그녀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피카소의 그림을 본 슈타인은 자신이 생각하는 혹은 거울이나 사진에 드러나는 자신과의 큰 차이를 목격했을 것이다. 그녀에게 이 그림은 그녀를 온전히 담아내지 못했음을 의미하고 '객관성의 결여'라고 평가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피카소는 알고 있는 대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이다. 

<꿈>, 파블로 피카소, 1932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입체파 화가인 피카소는 사물을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지 않는다. 우리는 한 시점에 보이지 않는 부분을 이미 본 적이 있다. 우리는 사물을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본 것들을 조합하여 머릿속에서 완성된 입체로 그려낸다. 피카소는 아는 것을 그리는 화가이다. 그가 초상화를 그린다면 그는 대상에 대해 더 많이 알아야 한다. 그가 아는 만큼 그림은 본질을 더 많이 담을 수 있다. 영화에서 피카소가 슈타인에게 "아드리아나를 몰라서"라고 변명한 것은 변명이 아니라 그의 주된 생각이 담긴 말이다.


나만의 이유

영화에서 길 펜더는 비 오는 파리를 사랑한다. 현재의 연인 이네즈는 비 오는 파리를 '불편한' 파리라고 부른다. 길에게 1920년대의 파리는 자신이 사랑하는 작가들이 즐비한 '자신이 가장 사랑한 시간'의 파리이다. 아드리아나에게 그 시간은 모든 이들이 느끼는 '불만족의 현재'일 뿐이다. 그녀는 그녀 자신만의 가장 사랑하는 시간이 있다. 길은 이 두 여인을 통해 자신만의 이유, 자신만이 이해할 수 있는 사랑을 깨닫는다. 모두에게 설명가능한 사랑은 사랑의 진짜 이유가 아닐 수 있다. 타인에게 설명해야 하기에 만들어낸 남을 위한 이유, 그것은 객관적 사랑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나만의 주관적 사랑의 이유로 사랑에 빠진다. 처음 사랑에 빠질 때 그 사람의 이해 안 되는 부분이 긍정성으로 다가오다가 어느 순간 부정성으로 바뀌는 것은 어쩌면 스스로의 주관적 이유를 부정하고 객관적 이유에 설득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렘브란트의 자화상, 왼편: 1640; 오른편: 1661

화가 렘브란트는 화려한 젊은 시절을 보내고 말년을 초라하게 보냈다. 우리는 우리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 인생의 황금기를 유지하고 과시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누가 봐도' 멋진 모습을 갖기 위해 많은 자원을 투자한다. '나만의' 멋을 발견하고 '나만이 아는' 나에 대한 사랑을 갖기에 주변의 쓸데없는 조언이 너무나도 많다. 스스로 만든 타인과의 비교 역시 객관성의 감옥에 자신을 가두게 만든다. 성공한 화가 렘브란트가 굳이 자신의 노년을 솔직하게 자화상으로 남길 이유가 있었을까? 왼편 자화상의 원제는 <사도 바울로서의 자화상>이다. 바울은 인간의 행복이 신의 사랑에 의한 자유에 있다고 말한다. 사회적 혹은 스스로 만든 법칙을 준수하는 것이 아닌 신이 우리를 사랑하는 이유에서 행복을 찾는 것은 타인의 시선과 평가에서 자유롭게 스스로의 가치를 세우는 '나만의 이유'를 모아가는 과정을 통해 가능하다. 


<이제야 알겠어요. 내 꿈속의 불안이 뭐였는지 설명이 돼요... 페니실린이 다 떨어진 거예요. 또 치과에 갔는데 마취제도 없었고요. 이 시대엔 항생제가 없다고요. 여기 머물면 여기가 현재가 돼요. 그럼 또 다른 시대를 동경하겠죠. 상상 속의 황금기를. 현재란 그건 거예요. 늘 불만족스럽죠. 삶이 원래 그러니까.>


길의 깨달음은 삶의 필연성, 어쩔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데서 완성된다. 모두가 말하는 '현재의 결핍'에 가리어진 '현재의 풍요로움'을 긍정하는 것은 에로스의 진정한 가치이다. 렘브란트의 노년기 자화상은 가장 아름다웠던 황금기의 자신에 대한 질투가 아니다. 유년기의 모자라지만 순수한, 청년기의 발랄하지만 저돌적인, 중년기의 성공했지만 교만했던, 노년기의 초라하지만 이 모든 자신만의 역사를 긍정할 수 있는 '자신에 대한 자신만의 사랑의 이유'. 그것이 자신의 운명에 대한 사랑, 아모르파티(amor fati)이다.


다음 주에는 영화 <인타임>을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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