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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mo ludens Jun 14. 2024

왜 '시간이 없어'라고 할까?

영화 <인타임>에 대한 해석 #1

영화의 주인공 윌 살라스(저스틴 팀버레이크)는 전형적인 프롤레타리아로 하루하루 돈걱정에 시달리는 인물이다. 영화에서 세계는 여러 구역으로 나뉘어 있다. 가장 부유한 사람들이 사는 1 구역은 "뉴 그리니치"로 거의 대부분의 시간은 이곳에 있다. 여자 주인공 실비아(아만다 사이프리드)의 아버지 필립 웨이스는 뉴그리니치 최고의 부자로 보이는데 백만 년의 시간을 금고에 보관하고 있다. 윌 살라스가 사는 지역은 영화에서 약간의 혼동을 주는데 관리구역에서의 모니터를 기준으로 12 구역인 듯하다. 주인공이 자동차를 타고 구역을 이동하는 장면을 기준으로 13 구역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도 있다. 이 숫자에 대해 감독은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자 했을 것이다. 12 구역은 다른 구역들과는 다르게 땅의 중간에 위치하여 항구를 가지지 않는다. 탈출할 곳이 없다는 이야기로 '완전한 통제'상태에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12는 시간에서 가장 큰 수로 낮은 수부터 우선순위를 매긴다면 가장 낮은 시간, 가장 천한 지역, 가치 없는 인간들을 모아놓은 지역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영화 <설국열차>의 꼬리칸이 바로 주인공 윌 살라스가 사는 곳이다.

시간이 없다. 왜 이렇게 됐는지... 생각하는 시간조차 내겐 사치일 뿐


영화 <인타임>은 위의 대사와 함께 시작한다. 우리는 왜 시간이 없을까? 그렇다면 시간을 만들어낼 수는 있는 걸까? 시간이 있고 없고는 누가 정하는 걸까? 영화에서 주인공은 시간이 없다. 시간이 없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


시간의 존재

시간은 "있음"과 "없음"의 대상일까? 우리는 시간을 볼 수 없다. 들을 수도 없다. 느낄 수도 없다. 시간이 "있음"과 "없음"의 구분인지도 확실치 않은데 "시간이 없다"라는 말은 가능할까? 시간의 본질에 대해서 철학자들은 오랜 시간 동안 고민하고 연구해 왔다.

<아테네 학당>, 라파엘, 1510-11

에페소스 출신의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Heraklit, bc. 520-460)는 <panta rhei(만물은 유전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만물의 본질은 흐르는 물과 같다는 그의 철학적 견지는 모든 것이 시간 속에서 변화하는 진리의 속성을 통찰한 것이다. 라파엘의 <아테네 학당>에서 가운데 앞쪽의 책상 앞에 앉아 왼팔로 머리를 괴고 있는 심각한 표정의 인물이 헤라클레이토스이다. 라파엘은 자신의 존경을 담아 위대한 철학자의 얼굴에 미켈란젤로의 모습을 그려 넣었다.


과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는 실재하지 않는다. 과거는 있는 것인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322)는 운동의 측면에서 시간을 다루는데 우리가 시간을 인식하는 것을 과학적으로 접근한 최초의 철학자이다. 물체의 이동을 통해 우리는 시간을 인식할 수 있는데 시간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물체의 이동, 즉 인과관계를 인식하기 위한 개념이지만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가 구분되어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아테네 학당>의 중앙에 두 인물 중 오른편의 푸른 옷을 입은 인물이 아리스토텔레스인데 그는 진리가 이 땅 위에 있다고 하여 손바닥을 수평으로 하여 땅과 평행하게 만든다. 그리고 왼손에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마찬가지로 수평방향으로 들고 있는데 이 땅 위의 행복을 영위하는 법에 대한 책임을 의미한다.

시간은 불변하는 영원의 움직이는 모습이다.

한편 그의 오른편에서 붉은 옷을 걸친 인물이 플라톤(Platon, bc 424-347)은 시간을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 한다. 존재는 불변하는 이데아에 속한 것인데 우리가 사는 그림자의 세계의 변화는 시간의 양상으로 나타나는 그림자의 일렁거림일 뿐 본질은 변화의 속성, 즉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다.


시간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아무도 내게 묻지 않는다면 나는 그것을 알고,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나는 그것을 알 수 없다.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는 그의 <고백록>에서 시간에 대해 논한다. 그는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구체적 구분을 언급한 첫 번째 철학자이다. "과거는 기억, 현재는 관조(관찰) 그리고 미래는 기대(희망)"이라는 그의 깔끔한 정리는 우리가 어렴풋이 느끼는 시간성에 대한 개념에 상당히 접근한 듯하다.


절대적 시간, <우리의 시간>

우리가 '시간'이라고 부르는 일반적인 개념은 나와 너, 우리가 함께 공유하는 개념이다. 9시까지 출근을 하고 12시에 점심을 먹고 5시 30분에 퇴근한다고 할 때 이 시간은 한 사회나 일정한 지역에 통용되는 기준이다. 우리는 이러한 시간을 절대적 시간, 정량적 시간이라고 하고 고대 그리스인들은 크로노스(Kronos)라고 명명했다.

<크로노스에게 거세되는 우라누스>, 조르조 바사리 & 크리스토파노 게라르디, 16세기

하늘의 신 우라누스와 땅의 신 가이아 사이에서 태어난 크로노스의 신화는 하늘과 땅이라는 공간이 붙어있다가 떨어지면서 시간이 탄생했다고 여긴 그리스인의 생각을 드러낸다. 태초에 카오스가 있었고 땅이 등장하고 땅이 하늘을 낳고, 땅과 하늘이 시간을 낳는 구조이다. 그림에서 아다만트(adamant)의 낫을 들고 있는 신이 크로노스인데 그는 농경의 신이기도 하다. 사실 크로노스는 농경의 신인데 이후 발음의 유사성으로 시간의 신이 덧씌워졌다는 연구가 있다. 하늘과 땅이 열리면서 농경의 신이 등장한 것은 성경에서 땅으로 추방된 최초의 인간, 아담(adam)의 직업이 농부라는 사실과 일치한다는 점과 크로노스의 무기와의 이름이 유사하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아담은 흙(adamus)이라는 히브리어에서 유래하는데 모든 '문명'에서 그들의 시작은 '정착'과 '농경'이라는 사실과 이러한 신화의 유사성은 매우 자연스럽다.

왼쪽: <아들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프란시스코 데 고야, 1819-23; 오른쪽: <페스트>, 아르놀트 뵈클린, 1898

고야는 로마신화에서 자신의 아들을 잡아먹는 괴물 사투르누스(그리스신 크로노스)를 그린다. 광기에 사로잡힌 듯한 눈빛과 헝클어진 머리카락은 가차 없는 시간의 속성을 잘 보여준다. 절대적인 시간은 한 개인을 기다려주지 않고 매몰차게 흘러간다. 건조하고 냉정한 이 절대의 시간은 죽음의 신과 같이 낫을 들고 우리의 생명을 앗아간다. 절대적 시간을 우리는 객관적 수치 서기 2024년으로 표기한다. 우리는 이 절대적 시간을 측정할 시계를 만들었고, 이 시계의 기준이 되는 곳이 바로 영국 런던의 그리니치(Greenwich) 천문대였다. 이곳을 기준으로 사용한 시간이 그리니치 표준시(GMT, Greenwich Mean Time)이며 세계가 각자의 기준 시간을 사용하다가 1884년 국제회의에서 처음으로 정한 세계 표준시가 바로 그리니치 표준시이다. 이제 세계는 동일한 절대적 시간 기준을 갖게 되었다. 이 절대적 시간에서 "시간 없음"은 정말로 다 소진된 시간, 약속된 시간의 종료를 의미한다. 2024년 6월 14일 오전 10시에 도착하는 기차는 나를 위해 10시 10분까지 기다려주지 않는다. 이 시간이 나를 위해 10분 연기된다면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의 10분을 내가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이것이 가능하려면 나의 10분의 가치가 나머지 모든 승객의 10분의 합보다 커야 한다. 영화 속의 부자들은 자신들의 시간으로 나머지 승객의 시간을 지불할 수 있다. <Time is Money>, 이 절대적 시간은 "돈"이다.


시간의 또 다른 이름, 기회

“시간 없음”에 대한 또 다른 의미를 분석해 보자면, “시간”이라는 것이 하나의 개념인지 여러 개념을 총칭하는 상위개념인지에 대해 알아야 한다. 우리가 이른바 “시간”(時間)이라고 부르는 것은 때와 때 사이를 의미하는 것으로 순간과 순간 가운데 존재하는 일정 기간을 의미한다. 여기서 시간은 인터벌(interval)의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순간은 모먼트(moment)의 의미를 갖는다. 다시 말해 시간을 때와 때 사이라고 부르는 것에 시간의 두 가지 개념이 혼재하는 아이러니를 확인할 수 있다. 사실상 순간이라는 것은 우리의 기억에 이미지와 같이 남겨진 사건의 단면이며 실재하지 않는 것이다. 반대로 영원이라는 것은 순간과 동일한 구조를 갖는 개념으로 변화의 지속 혹은 종료 상태를 나타낸다. 순간과 영원은 동일한 전제조건, 즉 절대적 기준을 필요로 한다. 순간은 더 이상 수렴할 수 없고, 영원은 더 이상 발산할 수 없음이 근거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이 순간과 영원의 절대성이 깨어지는 시간이 있다. 이 시간은 모두에게 동일하게 주어지지 않는 시간, 나에게만 의미를 갖는 시간, 언제라는 약속이 통하지 않는 시간, 이 시간의 이름은 '기회'이다.

<카이로스>, 프레스코화의 일부, 프란체스코 살비아티, 1552/54

또 다른 시간의 신 카이로스(Kairos)에 대해 기원전 3세기 펠라의 포세이디포스는 이렇게 기술한다.


<나의 앞머리가 무성한 이유는 사람들이 내가 누구인지 금방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이지만,

나를 발견했을 때는 쉽게 붙잡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나의 뒷머리가 대머리인 이유는 내가 지나가고 나면 다시는 나를 붙잡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며,

나의 발에 날개가 달린 이유는 최대한 빨리 사라지기 위해서다.

왼손에 저울이 있는 것은 일의 옳고 그름을 정확히 판단하라는 것이며,

오른손에 칼이 주어진 것은 칼날로 자르듯이 빠른 결단을 내리라는 것이다.

나의 이름은 '기회'다.>


우리가 말하는 지혜 혹은 현명함은 앞머리가 무성하여 알아볼 수 없는 카이로스를 알아차리는 능력이며 그것이 지나가고 나서 미련과 후회를 너무 오래 갖지 않는 것이다. 이 카이로스는 모든 이에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인에게만 특정한 의미로 다가온다. 따라서 당사자가 아닌 이가 이 카이로스를 빼앗을 경우 옳지 못한 결과를 초래하므로 도덕적인 판단을 정확히 내리지 못한다면 잡지 말아야 할 카이로스를 잡는 불상사가 발생한다. 카이로스를 잡고도 다른 선택에 미련을 둘 경우 둘 다 놓치는 어리석음을 피하기 위해 욕심을 버리는 칼 같은 결단력이 필요하다. 이 모든 "카이로스"라는 이름의 자리에 '기회'를 써넣어도 무방하다.


카이로스는 '적절한 시기'나 '결정적인 순간'을 뜻하는데 크로노스의 '양적인 시간'에 대비해 '시간의 질적 측면'을 강조한 개념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카이로스의 시간을 '웅변술(Rhetoric)'에 비유하는데 적절한 시에게 적절한 것을 파악하는 능력으로 이해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웅변적 상황의 시간을 다른 사람들을 설득할 정치적 순간이라 해석하고 이것을 위한 세 가지, 파토스, 에토스 그리고 로고스를 제시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최고의 진리는 행복(Eudaimonia)이며 이것은 개인이 아닌 공동체의 행복일 경우 더욱 개개인에게도 큰 행복을 선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공동체의 행복을 위해서 우리는 정치적 과정을 겪게 되는데 정체적 과정에는 타인을 설득하는 것이 필수이고 카이로스의 시간은 바로 설득이 가능한 상황이다. 타인을 설득하는 세 가지는 파토스(감정적 정념), 에토스(말하는 이의 성품) 그리고 로고스(논리성)이다. 이 가운데서도 아리스토텔레스는 에토스를 가장 강조하는데 일시적으로 발생하는 감정적 정념보다 반복적인 경험을 통해 화자의 발언의 신뢰성을 판단하기 때문에 더욱 신중한 기준이라고 평한다. 카이로스의 시간은 우연한 대박 기회를 말하지 않는다. 노력과 실천, 인내를 통해 나에게 다가오는 시간을 의미한다. 따라서 준비되지 않는 자에게 찾아온 카이로스는 때로는 그냥 보내야 올바른 판단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에세이스트이자 철학자인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은 이 카이로스의 시간을 메시아적으로 해석하는데 영화에서도 이러한 메시아적 카이로스가 등장한다(이후 연재에서 해설). 또한 현대 철학자들은 혁명이론과도 결부시켜 이 카이로스의 시간을 해석하기도 한다.


영화의 시작에 "시간이 없다"는 말은 카이로스의 부재, 사람들에게 주어진 기회의 박탈을 의미한다. 바쁘게 일하는 현대인들은 노동을 통해 얻은 재화를 '기회'를 얻는 데 사용하기 위해 일한다. 시간을 얻기 위해 시간을 투자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다르게 말하면 '카이로스를 얻기 위해 크로노스를 바치는 것'이 노동의 의미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시간이 없다"는 말은 일을 통해 기회를 얻는다는 것이 박탈되었다는 뜻이다. 현재 청년세대의 희망 없어 보이는 미래는 그들에게 '집을 살 기회', '부자가 될 기회' 등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시간이 없다", 아니 그래 보인다. 어떻게 하면 그들에게 기회를 돌려줄 수 있을까?


영화 <인타임>은 제목처럼 '시간'에 대해 다루는 작품이다. 우리는 시간이라는 감옥 안에 갇혀 살고 어떠한 선택권도 없어 보인다. 여기서의 시간은 크로노스의 시간이다. 다만 무의미한 크로노스의 시간의 곳곳에 등장하는 카이로스는 우리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삶을 지속하게 해 준다. 주인공 윌 살라스는 우연한 '기회'에 한 인물을 만나서 삶의 무한에 가까운 시간을 부여받는다. 그리고 그것을 혼자 사용하며 살지 않고(혹은 못하고) 가장 높은 곳으로 향하여 전체 시스템을 무너뜨리려는 혁명적 시도를 한다. 그가 받은 카이로스의 시간을 모두에게 전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어쩌면 그가 모든 이를 위한 카이로스, 메시아일지도 모른다.


다음시간에는 <인타임>의 시스템적 측면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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