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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mo ludens Oct 13. 2024

<멋진 신세계> #1

인간 배양 장치 & 장미와 사이렌 (1장, 2장)

<멋진 신세계>의 1~3장은 신세계의 사회 구조를 설명한다. 1장은 <인간 배양 장치>를 통해 사회에 필요한 인재를 만들어내는 하드웨어에 대해 다룬다. 인간의 하드웨어는 진화의 산물이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진화를 인위적으로 조작하는 기술 '보카보프스키 처리(Bokanovsky's process)'를 이용하여 사회에 필요한 인적 자원을 생산한다. 그리고 2장 <장미와 사이렌>에서는 소프트웨어, 즉 교육을 통한 인적 자원의 생산을 다룬다. 여기서 교육은 사회적 역할을 하기에 적합한 지적 교육보다는 도덕 교육에 초점을 맞춘다. <멋진 신세계>의 구성은 구조적인 부분에서부터 탄탄히 계획된다. 신세계의 최고 덕목 <동일성, 안정성, 공동체>를 지탱하는 가장 기본적이며 강력한 지지대는 1, 2장에서 설명되는 개인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통제하는 것이다.


[동일성, 안정성, 공동체]

신세계를 이끌어가는 <세계 연합국>은 3가지 표어를 통해 새로운 세계의 방향성을 설명한다. 그것은 'community, identity, stability'이다. 번역에서 순서가 바뀌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부터 일컫는 언어적 습관을 따르자면 궁극적 목적은 community를 지키는 데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동체는 라틴어의 communitas에서 유래한 말로 '영적 공동체'를 뜻하며 같은 운명을 짊어진다는 종교적 의미를 띤다.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개개인의 희생은 필수적이다. 개개인의 욕심과 욕망은 공동체에 위협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철저히 통제된다. 그것을 제거하지 않는 이유는 개개인의 욕심과 욕망이 공동체의 발전에 기여할 수도 있기 때문이며, 아담 스미스는 개인의 이익이 공동체의 이익에 기여하는 행위를 선하다고 정의하기도 했다. 공동체주의에서 경계하는 것은 개인의 이익을 공동의 이익보다 우선시하는 것이며, 이것은 공동체의 목적에 위배되는 이질적인 것이다. 정체성이라고 번역되는 identity는 '동일성'을 뜻하는데 우리가 사용하는 ID는 사용자가 자신과 동일하다는 증거를 제시하는 과정이다. 공동체에서 동일성을 유지하는 것은 공동체의 안정성을 지키기 위함이다. 따라서 위의 세 표어는 궁극적으로 공동체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선택된 개념이다. 이와 달리 현대 민주주의의 뿌리가 되는 프랑스 대혁명의 기조는 [자유, 평등, 박애]이다. 평등과 박애(egalité, fraternité)는 각각 '동등한 것', '형제애'를 뜻하는 말로 '신세계'에서도 지켜지는 듯하다. 하지만 이 둘을 제한하여 부정적인 가치로 드러나게 하는 핵심 요소는 자유(liberté)를 공동체로 바꾼 것이다. 프랑스혁명의 결과로 얻어낸 인류의 핵심 가치는 개인의 가치 (자유)와 공동체의 가치 (평등), 그리고 그 둘 사이의 균형을 이루어주는 사랑의 가치 (박애, 우애)이다. 하지만 신세계에서 개인의 가치는 희생되어야 할 것이며, 그를 통해 공동체의 견고한 발판을 마련했다.


[전반적 개념과 보편적 인간]

신세계의 행복론은 전반적인 개념의 인식에 근거한다. 전반적이라는 말은 'general'으로 라틴어의 generalis을 어원으로 한다. 이와 반대되는 단어는 specialis로 '특수한, 전문적인'이다. 신세계에서 행복하기 위한 조건은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그는 자주 이렇게 말하곤 했다. “너희에게 전반적인 개념을 알려 주려는 거다.” 그들이 똑 부러지게 제 몫을 해내게 하려면 전반적인 개념을 똑바로 파악해 두는 편이 수월했다. 물론 이 사회의 올바르고 행복한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는 지극히 최소한의 개념만 깨쳐야 하겠지만. 최소한의 개념만 아는 사람은 행복하고 만족스럽지만 모두 다 아는 사람은 사회의 필요악이다. 사회의 주축을 이루는 계층사상가가 아니라 공예가나 우표 수집가 같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왜 전반적인 개념을 알아두면 제 몫을 하는데 수월할까? 그것은 자신의 직무에 대해 의문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자신의 직무에 의문을 갖는 행위는 사상가들이 하는 것으로 최소한의 개념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다 아는 사람들 다시 말해 사회의 일반적 문제와 구체적 문제의 관계를 탐구하는 사람들로서 사회가 가지고 있는 구조적 모순을 지적하는 '필요악'이다. 이들이 통제된 상황에서 결과물을 낼 때 더욱 탄탄한 구조를 만들 수 있기 때문에 '필요'하지만 모두에 이렇게 될 경우 혁명이 일어나기 때문에 '악'이다. 신세계에 필요한 인재는 정해진 도면에 따라 필요한 것을 세상에 드러내는 존재인 공예가, 즉 플라톤이 말하는 데미우르고스(demiurgos)와 같은 생산자와 기존 질서의 결과물을 유지하고 이어가려는 수집가와 같은 존재들이다.


[표준형 인간 생산 - 보카노프스키 처리]

신세계의 개념은 일관성이 있다. 공동체를 위해 인간을 정해진 역할에 따라 '생산'하는 방식을 이용한다. 이를 위해 고안해 낸 방식이 '보카노프스키 처리'이다. 프랑스의 모리스 보카노프스키(Maurice Bokanovsky, 1879-1928)의 이름을 딴 듯한데, 보카노프스키는 세계 평화를 보장하기 위해 Societé des Nations (국가 공동체)의 결성을 주장했고, 개인보다 국가의 법이 우선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보카노프스키 처리는 현대의 유전자 조작 기술을 의미한다.


<예전에는 하나의 난자에서 한 명의 사람이 생겨났지만, 지금은 아흔여섯 명의 사람이 동시에 만들어진다. 이것이 바로 ‘발전’이다. … “보카노프스키 처리란 본질적으로 성장을 억제하는 과정이다. 굉장히 역설적인 이야기지만, 억지로 성장을 막으면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난자가 싹을 틔우게 된다.>


여기서의 '발전'은 대량 생산기술을 의미하며, 다양한 종의 발현보다는 필요에 의한 하나의 종의 대량 생산을 뜻한다. 여기서 이용하는 방식은 '성장의 억제'이고 생존을 위해 생명이 선택하는 '생존 본능'은 억제된 곳을 피해 혹은 억제하는 요소를 견디기 위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 과정에서 통제가 어려운 자연 생식은 부정된다.


<”임신은 매우 귀찮은 일입니다.  … 사람들이 항상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여분을 확보해 두는 것이죠. … 구조적으로는 정상이지만 임신은 하지 않게 되지요.” … “ … 우리는 노예처럼 단순히 자연을 모방하는데 그치지 않고 인간의 발명이라는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세계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임신은 자연 생식의 과정으로 종의 생존을 위해 생명이 선택한 가장 최종 진화의 단계이다. 생명체는 무성생식에서 유성생식으로 진화했는데, 무성생식에 비해 유성생식이 갖는 장점은 다양한 개체의 탄생이다. 이 과정에서 종의 다양성을 보장하는 방법은 돌연변이다. 대부분의 돌연변이는 자연도태의 과정을 겪지만, 급격한 환경변화가 생길 때, 때마침 발생한 돌연변이는 다음 세대의 주연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우연한 적합성을 통한 생존을 다윈은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변화보다는 안정을 우선시하는 신세계에서 돌연변이는 가능한 제한된다. 여기서 근대의 합리성에 대한 비판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노예처럼 단순히 자연을 모방"하는 것을 "인간의 발명"보다 낮은 단계로 취급하는 관점이다. 근대의 합리성이란 인간이 모든 것을 계산하고 통제하여 미래를 예측가능한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이다. 그들은 자연발생적 도시를 백지화하여(tabula rasa) 자동차를 위한 직교체계의 도로를 만든 후 그 위에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도시를 구성했다. 인간에게 주어진 최고의 무기를 '이성'이라고 상정한 후 그것의 정점을 추구하고자 했던 그들의 의도는 인간의 또 다른 부분인 '비이성'을 철저히 억압하여 그들이 바라던 이상향을 그려냈다.


신세계에서 인간은 생산수단으로 전락하여 대량 생산의 대상이 되었고 생존을 통해 사회 안정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된다. 이 세계에서 모범적인 인간은 표준형(standard) 남자들과 표준형 여자들로 이루어진 획일적인 집단이다.


[신세계의 덕목]

계층별로 나뉘어 재배된 태아들 가운데 입실론의 훈련과정에 대한 설명은 충격적이다. 열대 지방에서 광부나 방직공, 철강 노동자로 일하도록 배치될 태아들은 열기 속에서 적응하도록 훈련된다. 이 훈련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


<”그것이 바로 행복의 열쇠요 미덕의 비밀이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정말로 좋아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야 말로 이 모든 훈련의 진정한 목표다. 피할 수 없는 사회적 숙명을 스스로 좋아하게 만드는 것.”>


신세계에서의 덕목, 행복의 열쇠이자 미덕의 비밀은 "숙명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숙명은 스스로 선택한 결정이 아닌 사회적 숙명이다. 다시 말해 사회적 의무가 개인의 권리보다 우선하는 가치라는 선언이다. 사회적 숙명에 대해 저항하고자 하는 마음을 없애는 방법으로 헉슬리는 조지 오웰의 '빅브라더의 감시'와는 다른, 보다 안정적인 방식을 택한다. 그것은 '스스로 좋아하게 만드는 것'이다. 개인의 자발적 복종에 의한 숙명의 수용은 종교적 방식과 일치한다. 하지만 인간의 죄를 대속하여 자발적 복종을 이끌어낸 예수와는 달리 대량 생산에 의한 '편리'를 대가로 얻어낸 자발적 복종은 정신뿐 아니라 육체적 복종조차 이끌어냈다. 이러한 새로운 시대의 메시아는 헨리 포드이며, 따라서 이 세계의 시간은 A.F. (anno Ford) 헨리력으로 흘러간다. 이 시간에 맞추어 살기 위해서는 하드웨어뿐 아니라 소프트웨어의 조작도 필요하다.


[신 파블로프 조건 반사 실험실] - 자연으로부터의 소외

2장은 새로운 공간에서 시작된다. 이곳은 '신 파블로프 조건 반사 실험실 (NEO-pavlovian conditioning room)'이다.

휑한 방의 마룻바닥에 장미와 책이 줄줄이 놓여있고 양육사들은 소장의 지시에 따라 아이들을 데려온다. 아이들은 파블로프가 개에게 하던 조건반사 실험을 인간 아기에게 시행한다. 자극과 보상이라는 방법을 통해 시행자가 원하는 방향으로 대상을 유도할 수 있게 만드는 일종의 세뇌방식이다. 일정한 조건이 주어지면 그다음 보상을 위한 행동이 기계적으로 일어나게 만드는 이러한 기재는 인간에게 보다 정교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 아기들은 자라면서 꽃과 책을 보기만 해도, 심리학에서 ‘본능적 혐오‘라고 일컫는 반응을 보이게 된다. 유아기에 훈련된 조건 반사 작용은 평생토록 변하지 않으니까. 이 아기들은 죽을 때까지 책과 식물로부터 안전해질 것이다.”>


'신 파블로프 조건 반사'의 효과는 '본능적 혐오'를 조장하여 대상을 특정 행위로부터 자발적으로 분리하도록 만든다. 단순히 겁을 주어 특정 행동을 제한하는 것보다 더 강력한 것은 혐오를 조장하는 것이라는 심리적 기제를 정확히 계산한 결과다. 이 실험의 설계자는 낮은 계급의 사람들에게 <자연을 동경하는 마음을 없애기로 결정>했다. 결국 인간을 자연으로부터 분리시키고 산업 사회를 자신들의 터전이라고 믿게 만드는 밑작업은 야생 지역에 대한 본능적 혐오감을 불러일으켰다. 실제로 유럽의 산업혁명 시기에 도시에서 녹지의 비율이 줄어들었고 도시로 몰려든 노동자들은 자연으로부터 소외되었다. 부유한 계층들은 도시 외곽 지역이나 전원에 집을 짓고 주말이나 휴일을 자연과 함께 보낼 수 있었다. '센트럴 파크'를 보유한 맨해튼을 제외한 대부분의 대도시는 아주 작은 인공 자연을 '공원'의 형태로 제공할 뿐 원시로서의 자연은 도시인으로부터 멀어졌다. 신세계의 인간들은 '태어난(nature)대로'가 아닌 '재배된(culture)대로' 살아가게 되었다.


[금서정책과 단 하나의 언어]

이 세계에서 금지된 것은 장미와 책이다. 장미는 자연과 아름다움을 상징하고 책은 자유와 다양성을 상징한다. 진시황과 나치 하에서 벌어진 '분서갱유'는 사상의 자유와 다양성을 말살하고자 한 정책이다. 이 정책의 결과로 신세계에서는 단 하나의 언어만 남을 것으로 보인다. 폴란드어, 프랑스어와 독일어는 "죽은 언어"이다.

<바벨탑>, 피터 브뢰헬, 1563

성경에 등장하는 바벨탑은 신에게 도달하기 위해 지은 탑으로 신이 인간들의 오만함에 벌을 내려 탑을 부수고 언어를 쪼개었다고 한다. 발터 벤야민은 이것은 '순수한 언어(reine Sprache)'가 타락하여 언어의 혼란이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언어는 사물과 분리되어 자의적 기호로서 존재하고 끊임없는 기호들의 재생산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의미들을 우리는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이러한 거부할 수 없는 자연스러움을 '문화(culture)'라고 부르고 우리는 우리가 속한 문화 속에서 대상에 대한 이해를 수행한다. 따라서 한국 사회에서의 '장미'의 의미는 유럽의 기독교 국가에서의 '장미'와 완벽히 일치하는 의미를 갖지 않는다. 결국 바벨탑의 붕괴는 인간에게 <소통의 혼란>을 가져왔지만 동시에 <의미의 다양화>를 가져다주었다. 어찌 보면 바벨탑의 붕괴는 단 하나의 언어의 독재를 부수어 파편화시키고, 혼란을 통한 다양성의 창조를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신세계는 바벨탑을 완성한 곳이다. 신의 권능에 도전하여 그의 자리를 빼앗은 문명은 새로운 도덕의 주인이 되었다.


[교육, 도덕의 암시]

<멋진 신세계>의 2장의 주된 내용은 소프트웨어의 조작, 즉 교육에 관한 내용이다. 이곳에서의 교육은 다음과 같은 역할을 수행한다.


<”최면 학습, 즉 수면 학습의 원칙은 처음에 이렇게 발견되었다.” … “당시 사람들은 수면 학습을 지적 교육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고 싶어 했거든.” … 전체적인 내용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그 어떤 지식도 받아들일 수 없으니까. … “어떤 경우에도 도덕 교육은 합리적이어서는 안 된다.” … “무엇보다 이성이 배제된 언어가 필요하다. 따라서 수면 학습만이 해답인 것이다.”>


인간을 하나의 기계로 생각해 본다면 교육은 소프트웨어를 업데이트하는 과정이라 볼 수 있다. 신세계에서는 정보를 주입하는 과정에서 '최면 학습'은 효과가 없다고 말한다. 정보는 늘 업데이트되어야 하기 때문에 주어지는 데이터에 따라 새로운 결과가 도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덕 교육'은 일종의 "os (operating system", 즉 운영 체제와 같다. 시스템 구동의 규범으로서 도덕은 새로운 지식 정보가 들어오더라도 그것을 폐기할 기준이 된다.

<아담과 이브>, 알브레히트 뒤러, 1504

에덴동산에서 아담은 이브의 권고로, 이브는 뱀(지식의 신)의 꾐에 빠져 선악과를 먹고 만다. 이 원죄는 인간에게 주어진 죽음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선악과는 '분별의 열매'다. 이 열매를 먹고 난 후 이브는 신체의 주요 부위를 가린다. 그녀는 부끄러움을 알게 되었고, 옳고 그름에 대한 그녀의 분별을 갖게 되었다. 원죄 이전의 아담과 이브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상태, 즉 백지상태로 옳고 그름의 구분 자체가 없는 선 그 자체의 존재였다. 분별을 갖는다는 것은 기준의 주체가 된다는 의미이며 자신의 기준, 즉 주관이 생겨났다는 의미이다. 도덕, 즉 선과 악의 분별은 신이 주관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분별은 개개인의 몫이 되었고, 나에게 옳은 것이 타인에게는 그름이 될 수 있다. 선과 악은 절대적 기준의 세계, 즉 신의 영역을 벗어났다. 도덕이 이성의 영역에 있는 한 만인은 만인에 대해 자신의 '선'을 설득하고 인정받아야 한다. 따라서 이성과 합리의 영역에서 도덕은 실현될 수 없다. 도덕이 실현가능한 곳은 '비이성'의 영역, 즉 무조건적 복종에서만 가능하다.


<“결국 암시의 총체가 아기의 이성이 되는 거지. 물론 어른이 되어서도 평생토록 이 암시의 지배를 받는다. 생각하고 욕망하고 결정하는 이성적 행위는 바로 이 암시들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비판 능력을 상실한 암시의 지배를 받는 상태에서 자라난 아이들의 생각과 욕망은 '도덕의 영역' 안에 있다. 그들이 아무리 자유로운 사고와 욕망의 결과하고 생각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주어진 선택지 안에서의 자유일 뿐이다. 자크 라캉(Jacques Lacan, 1901-1981)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말로 유명하다. 라캉에게 '윤리의 뿌리는 욕망'에 있으며, 그의 욕망은 '무의식적 욕망'으로 필요나 수요와는 다르다. 결국 인간은 스스로 원하는 주체적 욕망을 갖지 못하고 "타자의 욕망"을 욕망할 뿐이다. 신세계의 시민들은 "국가가 내리는 암시"를 통해 '국가의 욕망을 욕망'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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