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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mo ludens Nov 03. 2024

<멋진 신세계> #4

5장 누구나 행복한 시대

모두를 위한 행복의 조건

5장의 시작은 "내분비외분비 연구 목장"의 수천 마리의 소의 울음으로 시작된다. 이 소들은 시민들을 위한 호르몬과 우유를 공급해 주어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기반이 된다. 모두를 위한 행복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러한 수천 마리의 소가 필요하다. 저항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고 그러한 삶에 만족하는 튼튼한 저변이 갖춰질 때 이상적 사회는 가능하다. 이 사회에서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가치는 "사회 진화론(social Darwinism)"이다.

허버트 스펜서

사회적 진화론이란 용어를 '다윈주의'라고 부르지만 사실상 허버트 스펜서(Herbert Spencer, 1820-1903)는 철학자이자 사회학자 오귀스트 콩트(Auguste Comte, 1798-1857)에 영향을 받아 사회를 하나의 '유기체'로 바라보는 관점을 가졌다. 스펜서는 다윈의 <종의 기원>(1859)을 읽고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했다. 콩트가 "사회문화적 진화(sociocultural evolution)"이란 개념을 만든 데 대해 스펜서는 실증주의가 이념화되는 것을 거부하고 과학적 방법으로 사회의 진화를 설명하기 위해 "사회적 구조(social structure)"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스펜서는 사회적 구조를 개선하여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는 것이 '선'이라는 공리주의적 기준을 옹호했다. 그가 말하는 '절대 윤리(Alsolutes Ethics)'에서 개인은 타인을 위한 이타적 행위에서 즐거움을 얻을 뿐 아니라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 것을 피하려고 하는 '긍정적 자선'과 '부정적 자선'을 모두 행하여 다른 사람들의 자유와 양립할 수 있는 최대한의 자유를 누릴 권리를 갖는다. 그의 '사회 유기체론(social organism)'은 "모두를 위한 행복"의 조건을 유기체의 생존을 개인보다 앞에 두는 것을 전제로 한다.


[누구나 행복한 시대]

레니나와 헨리는 헬리콥터를 타고 데이트를 즐긴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풍경에 "개미 떼"처럼 모노레일 정거장으로 향하는 낮은 계급 사람들이 보인다. 그리고 헬리콥터에게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하는 높은 굴뚝이 보이는데 화장터 건물의 굴뚝이다. 이 굴뚝에는 '인'을 모으는 장치가 있는데 사람을 화장할 때 나오는 물질 가운데 산업적으로 가치가 있는 것을 취하기 위함이다. '인'은 묘지의 도깨비불이 생기는 원인으로 알려져 있는데 합리성과 유용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헨리와 레니나에게 이런 낭만적 상상력은 인정되지 않을 것이다.


<”죽고 난 뒤에도 사회를 위해 내 몸이 유용하게 쓰인다는 생각을 하면 기분이 참 좋아요. 식물을 자라게 하잖아요. … 모든 인간은 물리-화학적으로 동등하니까요. 입실론이라도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고요. … 모든 사람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일해요. 우리는 입실론 없이 살아갈 수 없어요. … 한 가지 확실한 건 그 사람이 누구 건 간에 살아 있는 동안은 행복했을 거라는 사실이에요. 지금은 누구나 다 행복한 시대니까.”>


이들에게 모든 인간은 존재의 가치가 있다. 따라서 자신의 존재의 가치를 가지고 인정받고 사는 모든 사람은 행복할 수 있다. 얼핏 합리적이고 이상적 이어 보이는 이 논리는 인간의 행복의 조건을 '쓰임새'와 '역할'에만 국한해서 본다는 한계가 있다. 개인의 행복은 때론 은밀하고 이기적이며 추악한 것을 추구할 때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 하지만 스펜서의 사고는 헉슬리가 이후 6장에서 버나드 마르크스의 입을 빌어 말하듯 개인을 "거대한 사회의 하찮은 세포"정도로 여긴다. 개인의 행복 추구가 사회와 분리되어야만 한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개인의 행복 추구가 사회 안에서, 모두의 동의와 참여를 통해서만 허용되어야만 한다는 생각은 자연상태에서 개인의 존재의 가치 자체를 부정하는 격이다. 우리는 사회 계약설을 통해 자연상태에서 개인이 존재했고, 생존과 안정을 위한 계약을 통해 공동체를 구성한다는 가정을 부정하기 쉽지 않다. 물론 견해에 따라 자연 상태의 인간이 선한 존재였다는 이론과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라는 이론이 대립한다. 하지만 전제는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홀로 선 존재이고, 계약 여부는 개인의 자발적 권리 양도에 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모두의 행복"은 행복의 최소한이지 최대한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프로이트가 구분하는 슈퍼에고는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을 관통한다. 무의식에 다다른 슈퍼에고는 그것이 우리의 본능일지도 모른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은밀하고 이기적이며 추악한 욕망, 무의식에 자리 잡은 이 개인적 욕망은 행복의 최대치이자 절제를 모르는 괴물이다. "누구나 행복한 시대"를 이룩하기 위해 신세계의 건설자들은 이 지워버릴 수 없는 괴물의 존재를 완전한 통제 상태에 두어야 했다. 그것이 소마다.


[욕망의 추방, 소마]

신세계에서 모든 사람은 사회로부터 소마를 제공받는다. 소마는 괴로움을 잊게 해주는 동시에 허무함과 무료함을 달래준다. 인간은 괴로움, 허무함 그리고 무료함 등의 부정적 상태를 통해 성장한다.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발전을 위한 첫 단계이다. 소마는 이러한 사회 문제의 증상을 삭제하는 기능을 담당한다.

<파르나소스>, 라파엘로, 1511

<풍요로운 빛깔과 따스한 온기가 넘치는 한없이 다정한 소마 휴식의 세상에. 다들 어쩌면 그렇듯 상냥하고 아름답고 유쾌하고 즐거운지!>


소마가 허용된 사회에서의 모습이다. "상냥하고 아름답고 유쾌하고 즐거운" 모습. 라파엘로는 바티칸의 서명의 방(Stanza della Segnatura)에 아폴론이 사는 신화 속의 파르나소스 산을 그렸다. 그곳에는 아홉 명의 뮤즈, 9명의 고대의 시인들 그리고 아홉 명의 현대(당대) 시인들이 아폴론을 둘러싸고 있다. 니체는 인간 존재의 다른 면모와 예술적 표현을 설명하기 위해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긴장과 상호 작용에 대해 설명한다. 아폴론적인 것의 원리는 질서, 이성, 조화, 명료함, 아름다움 등을 뜻한다. 반면,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본능, 열정, 혼란, 생명력 등을 의미한다. 신세계에서 소마의 기능은 사람들에게 신세계를 아폴론적인 것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신세계는 이성을 통해 질서와 조화를 이루고 명료함과 아름다운을 추구한다.


<그러나 감정의 동요나 들뜬 기색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식의 흥분은 아직 만족하지 못한 상태라는 걸 뜻하니까. 피피가 느끼는 황홀감은 헛된 포만감이나 허망함이 아니라 안정된 삶, 휴식과 안정에서 우러나오는 활력이었다. 그리고 성취감에서 비롯되는 차분한 황홀감이었다. 자기 안에서 살아 숨 쉬는 풍요와 평화였다.>


소마는 디오니소스적 황홀경을 제공하지 않는다. 여기서 만족이라는 것은 "안정된 삶, 휴식과 안정에서 우러나오는 활력", 즉 "차분한 황홀감"을 뜻한다. 이들이 말하는 "흥분"은 만족하지 못한 상태를 의미하는 부정적 용어다. 안정과 휴식을 방해하는 "흥분"은 사회를 동요시키기 때문이다. 신세계에서 추방된 인간의 욕망은 "디오니소스적인 것", 본능, 열정, 혼란, 생명력이다. 다시 말해 신세계는 정지 상태를 추구하며, 정지 상태를 위한 모든 개개인의 노력이 '풍요와 평화'라는 성취감으로 되돌아온다. 이 과정에서 추방된 욕망의 빈자리는 소마로 대체된다. 하지만 소마는 인간 욕망의 일시적 망각에 불과할 뿐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신세계에서 들리는 노래, 최신 합성 음악은 통제된 욕망의 충족을 노래한다.


<이 세상 모든 유리병 가운데

내 작고 아늑한 유리병만 한 건 없다네.>


그리고 이 통제된 욕망은 개개인이 희생되고 전체로 다시 태어날 때 완성된다. 개인의 욕망은 이 순간 부정당한다.


<오라, 위대한 존재여, 사회의 친구여,

열둘이 소멸하고 하나가 되었도다!

우리는 죽기를 간절히 바라도다.

죽음을 맞이할 때, 더 큰 삶이 시작되리니!>


[소외, 자의식의 고통]

버나드는 소마를 거부한다. 그는 속으로 생각한다. '이번에도 틀렸어. 안 봐도 뻔해.' 버나드는 소마의 약효가 지속되는 동안 발생하는 자기 상실의 시간이 주는 공허한 만족감을 안다. 그리고 이 공허한 상태에서 스스로의 컴플렉스가 고조되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타인과 동화될 수 없기에 자기를 잃고 전체로 편입될 수 없는 고통을 겪는다.


<버나드는 거짓으로 답하고 얼른 고개를 돌렸다. 아름답게 빛나는 피피의 얼굴이 마치 홀로 동떨어져 있는 자신을 비난하며 비웃는 듯했기 때문이다. … 결코 충족되지 않는 공허감과 채워지지 않는 허기 때문에 괴로워하는 지금이 훨씬 더 깊이 고립된 상태인지도 몰랐다. … 모르가나의 품에 안긴 그 순간까지도… 어쩌면 자신의 인생에서 그 어느 때보다 더 절망적으로 혼자였다. … 버나드의 자의식은 끝 모를 고통에 빠져들었다.>


버나드의 자의식은 약물을 통해 멀어져 가는 자신과 분리되며 어느 무인도 마저 잃어버린 상태, 자신의 존재 장소를 잃어버린 상태 (Ortlosigkeit)를 자각한다. 고대 그리스어의 atopos는 땅(topos)이 없는 상태이며, 아토피는 사회로부터 추방되어 머물 땅이 없는 자들, 공동체로부터 존재를 부정당하고, 소외된 자, 비순응자들을 의미한다. 버나드의 자의식이 겪는 고통은 자신이 사회의 일부이지만 어울리지 않는 존재임을 자각한 고통이다. 이 순간 버나드는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사유로 진입한다. "너 자신을 알라", 그리스어로는 gnōthi seauton, 라틴어로는 nosce ipsum인 이 말은 자신이 자신의 자의식에게 묻는 질문이다. 나는 어디에 속할 것인가! 나는 어디에 속하길 원하는가! 


우리 모두는 소외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다. 이 두려움의 정체는 내가 어디에 속할지를 선택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서 시작하여, 어디에 속하길 원하는지 모르는 무지로 나아간다. 결국 우리는 동의한 적 없는 공동체의 합의에 침묵으로 따르며 공동체를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 욕망의 나침반을 잃어버린 상태다. 니체는 고독을 통해 따스함을 느끼며, 고독을 통해 자신의 땅을 발견하는 법을 알려주었다. 디오니소스 찬가를 부르며 자신의 욕망에게 물어보자.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욕망하는가?", "나는 나를 욕망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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