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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mo ludens Nov 17. 2024

<멋진 신세계> #6

7장. 야만인 구역 말파이스

[줄거리]

레니나는 버나드를 따라 야만인 구역 말파이스로 떠난다. 말파이스는 미국의 남서부에 위치한 지역으로 스페인어로 "황무지"(badland)를 뜻한다. 멋진 신세계가 "좋음(goodness, lt. bonus)"만이 있는 곳이라면, 말파이스는 "나쁨"만이 있는 곳이고, 라틴어 malus(나쁜)의 어근을 딴 말파이스를 그에 대응되는 공간이다. 이곳에서 레니나는 신세계에는 없는 '부정성'들을 발견하게 된다. 2020년대를 사는 지금 우리에게 이 두 공간에 대한 평가는 명쾌하게 나뉘지 않는다. 헉슬리가 두 공간을 통해 제시한 것은 자연, 생명과 같은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힘과 기계와 문명과 같은 인공적 힘에 대한 것의 대립이다. 야만인 구역에서 레니나가 느끼는 불쾌감은 자신이 살아온 신세계의 규범, 즉 문화적 자연스러움에 배치되는 것들이다. 이곳에서 만난 린다와의 대화에서 신세계와 야만인 구역에 대한 그들의 비판적 시각이 여과 없이 드러난다.


[규범과 일탈]

레니나는 신세계의 규범에 만족한다. 그녀가 말파이스에 도착해서 내뱉는 첫 번째 말은 다음과 같다.


<”기묘해요정말 기묘해요.” 기묘하다는 말은 레니나가 무엇인가를 비난할 때 주로 쓰는 표현이었다.>


여기서 '기묘한'으로 번역되는 원어는 'queer'이다. 지금은 동성애를 뜻하는 단어이지만 1500년경 이 단어의 의미는 '이상한, 생소한, 별난' 등이었다. 독일어의 'quer' , 즉 '가로지르는', 영어의 cross에 해당하는 뜻을 가진 이 단어에서 파생하여 '원래 규범을 가로지르는/벗어난'의 의미로 쓰였다. 19세기 후반부터 'queer'는 성적으로 일탈한 상태를 가리키게 되었고, 1960년대 후반, 파리 68 혁명 이후부터 '사회 규범에 도전하고 차별에 반대하는' 정치적 의미로 발전했다. 

레니나는 '규범에서 어긋난' 것을 부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녀가 말파이스에서 목격한 것 가운데 가장 충격적인 부분은 '성에 대한' 인식의 차이였고, 출산과 모성 그리고 남녀 간의 이성관계에 대한 것이 주를 이루었다. 따라서 레니나가 대변하는 신세계의 관점에서 야만인들의 습성은 규범에서 벗어난, 문명적이지 못한 상태를 뜻한다. 


[자연 앞의 인간]

야만인 구역을 탐험하기 시작한 그들은 눈앞에 절벽을 마주하게 된다. 늘 문명의 도구를 통해 장소를 옮기며, 이동 과정에서 겪는 고통을 경험하지 못한 레니나는 불만을 터트리게 된다.


<레니나가 까마득한 절벽을 못마땅한 얼굴로 올려다보며 말했다. “헬리콥터를 타고 올 걸 그랬어요. 걷는 건 질색인데. 그리고 이렇게 높은 절벽 아래 서 있으면 내가 너무 보잘것없는 존재처럼 느껴진다고요.”>


문명 속에서 인간은 편리함, 신속함, 정확함을 추구하고 그것에서 안정감을 느낀다. 그런 레니나에게 까마득한 절벽은 '예측 불가능성'을 의미한다. 자연이 시련으로 다가올 때 인간은 그것에 도전하고, 도달하여 성취를 맞보았다. 독일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 게오르그 짐멜(Georg Simmel, 1858-1918)은 교통수단의 발달이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고 말한다. 그는 알프스의 예를 들며, 자동차의 등장이 알프스와 같은 지역을 "도달할 수 없는 숭고한 대상"에서 "접근 가능한 풍경", 즉 "미학적 대상"으로 바꾸었다고 말했다.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자연을 관광의 대상, 소비의 대상으로 바라보게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자연은 그 신성함과 경이로움을 잃어버리고 정복과 개발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레니나는 정확히 이러한 관점을 보여주며, 높은 절벽 아래에서 느끼는 자연 앞에서의 무력감을 불편해한다.

왼편: <바다 앞의 수도승>,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 1808-10; 오른편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 1818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 1774-1840)는 낭만주의 화가로 '자연 앞에 선 인간의 자만심'을 지적한다. 영원성을 상징하는 자연의 힘에 대비되는 유한한 인간의 한계를 극명하게 대비되는 풍경과 인간을 통해 드러낸다. <바다 앞의 수도승>에 대해 프리드리히는 스스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다.


<“그것은 바다 풍경이고그 앞에는 황량한 모래사장이 있고그다음에는 움직이는 바다가 있고또한 공기가 있다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해변을 심오하게 걷고 있다갈매기들은 마치 폭풍우가 치는 바다에 나가지 말라고 경고하려는 듯 불안하게 날아다니며 그의 주위에서 비명을 지른다이제 생각이 떠오른다그리고 당신은 또한 아침부터 저녁까지저녁부터 자정까지 묵상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그 너머의 불가해한 세계를 상상하지도이해하지도 못할 것이다! 오만한 자만으로 후세의 빛이 될 것이라고미래의 어둠을 걷어낼 것이라고 [상상]하라어떤 거룩한 형벌이든지 오직 믿음으로만 보고 인식할 수 있다마침내 알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당신의 발자국은 황량한 모래사장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그러나 그 위로 순한 바람이 불면 네 자취가 다시 보이지 아니하리니헛된 자만심에 가득한 어리석은 자여!


[청결과 질병]

문명의 상징은 '청결', '위생'이다. 모든 동물을 스스로를 씻지만 어느 정도의 질병과 공존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인간이 만든 도시는 모든 질병이 모여드는 곳이고, 병원은 가장 다양한 질병이 발견되는 곳이다. 도시는 다양한 지역의 사람들이 왕래하고 교류하는 곳이기 때문에 이 도시를 '건강'하게 지키는 방법은 '살균'이었다. 유럽의 주요 도시들은 페스트(흑사병)와 같은 전염병을 통해 심대한 위기를 몇 차례 겪은 적이 있기에 근대화의 과정에서 대도시는 '위생'에 철저히 주의를 기울였다. 한 문명의 발전 정도를 따지는 척도로 우리는 '청결'을 쉽게 떠올린다. 그것은 도시의 인프라와 도시를 이용하는 시민들의 수준이 모두 충족되지 않으면 성취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레니나는 말파이스에서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에서 나는 각종 악취와 지저분한 위생상태에 불평한다.


<레니나는 고집스레 말했다. “하지만 포드다움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바로 청결함이라고요.” “그래요 살균이 곧 문명이라는 얘기잖아요.”>


포드다움(fordism)이란 노동 생산성의 증대를 통한 잉여 가치의 집약적 축적을 말한다. 이를 위해 노동력의 손실을 막아야 하고, 노동자들의 청결함이 중요해졌다. 따라서 노동자의 노동 생산성을 떨어뜨리는 각종 생물학적, 나아가 정신적 질병은 '박멸'의 대상이 되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은 '잉여 생산의 가치'로 평가되고 그것은 연봉으로 가감 없이 드러난다. 질병에 의한 결근은 생산성에 지대한 영향을 주기 때문에 개근상은 일관된 생산성에 대한 훈장으로 주어진다. 한편 무임승차하려는 자들, 노동하지 않고 수혜를 입으려는 자들과 같은 '무쓸모'의 인간들은 정신적 질병을 앓는 자들로 평가받는다. 나태한 자들, 생산성이 떨어지는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고용의 불안이라는 백신으로 대처한다. "청결한" 외모, 부지런한 성품, 철저한 자기 관리는 성공의 상징이 되었고, 이러한 삶의 태도는 도덕적, 생물학적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해 특정 유전자끼리의 매칭으로 이어진다. 한때 인류를 위기에 몰아넣었던 나치가 내세웠던 "우생학"은 여전히 배우자를 찾는 조건에서 통용되는 상식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문명사회에서의 덕목으로 일컬어지는 이 '청결'은 '같은 것 끼리의 교배'를 통한 순수성의 유지라는 환상을 만들어냈고, 질병에 대한 편집증적인 두려움으로 스스로를 멸균실에 가두는 극단적 고립을 선택하게 한다. 니체는 이러한 극단적 건강 염려가 '진정한 건강'에 도달하는 것을 막는다고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권 서문 4장에서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이러한 병적인 고립 상태와 황량하기만 한 시험기에서 벗어나, 저 흘러넘치는 섬뜩한 확실성과 가히 질병마저도 포괄하는 건강성에 이르는 길은 아직도 멀기만 하다. 질병은 인식의 수단이며 인식을 낚는 낚싯바늘로서 반드시 필요하다. 자기 통제와 심정의 수양이며, 수없이 많은 대립적인 사유방식에 이르는 여러 길을 허용하는 그 성숙한 정신의 자유에까지 이르는 길은 멀다.>


신세계의 모습에 대해 나누는 레니나와 린다의 대화에서 신세계는 수십 년간 변하지 않는 '순수한' 모습을 유지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변화가 제거된 이곳은 동일한 것을 지키려는 시도에 불과하고, "대립적인 사유"를 통해 더욱 "성숙한" 단계로 나아갈 모든 가능성을 스스로 제거해 버렸다. 니체가 지적하듯 완전무결의 무통주사는 "염세주의"를 낳을 뿐이다. 소마를 복용하는 모든 이들이 변화를 거부하는 것을 바로 그 때문이다.


<이러한 자유정신의 기질을 가지고 병에 걸려 한동안 앓고 나서, 그 후에 더 오랫동안 건강하게, '더욱 건강하게' 되는 것이 모든 염세주의(알려진 것처럼 염세주의는 낡은 이상주의자와 거짓말쟁이의 암이다)에 대한 근본적인 치료법이다. 그 속에 있는 지혜, 즉 삶의 지혜는 오랜 기간 동안 소량의 약만으로 건강 자체를 처방한다는 것이다.>


니체가 서문 5장에서 말하듯 인간에게는 "소량의 약"만이 필요하고 나머지는 스스로의 힘, 생명이 가진 회복력을 이용해야 또 다른 질병에 대한 면역이 생기는 것이다. 이 방법은 '멸종을 미루는' 길이 아닌 '멸종과 맞서 싸우는' 유일한 길이다.


[북소리와 감정의 동요]

레니나가 야만구역에서 유일하게 마음에 들었던 것은 북소리다. 그녀는 북소리를 통해 신세계에서 느꼈던 유사한 감정을 느낀다.


<레니나는 북소리가 은근히 마음에 들었다. … 북소리가 자신의 의식 속으로 점점 더 깊게 스며들어마침내 이 세상에 자기 자신과 그 묵직한 고동 소리 말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그 소리는 마치 포드의 날 기념행사나 친목회 때 연주하는 합성 음악처럼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 “신나고 신나도다.” 모든 북소리가 이제 같은 박자로 하나의 소리가 되어 울렸다.>


북소리는 거의 모든 문명에서 발견되는 공통적인 악기의 형태다. 북소리는 심장 박동과 유사한 울림을 주기 때문에 고대 종교의식에서 주로 사용되었다. 공기를 진동하는 북소리는 참여자 모두가 같은 심장 박동을 뛰는 듯 느끼게 하고 전체의 단합과 연대를 강화한다. 

<춤 (두 번째 버전)>, 앙리 마티스, 1909-10

그들은 집단 무의식에 빠져 윤무(강강술래)를 추며 무아의 지경에 빠지게 된다. '나'는 사라지고 '우리'만이 남는 듯한 경험, 이것은 신세계가 주장하는 '만인은 만인을 위한'의 상태와 유사하다. '집단적 일체감'은 레니나에게 익숙함이고, 익숙함은 그녀를 편안하게 해주는 듯했다. 하지만 그녀는 곧 불쾌함을 느낀다.


<왠지 하층 계급이 부르는 공동체 노래가 떠오르네요.” 잠시 후그 편안한 익숙함이 불쾌감으로 바뀌고 말았다.>


그녀가 불쾌감을 느끼는 이유는 '집단적 일체감'이 주는 평온함이 "감정의 해방", "감정의 폭발"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는 감정에 의해 내면의 불안함, 즉 자기를 상실하는 위기를 느끼게 된다. 이 상황에서 그녀는 늘 소마를 복용하곤 했지만 지금 그녀에게 소마는 없다. 

<절규>, 에드바르트 뭉크, 1893

외부의 소리인 북소리가 내면의 박동과 불일치할 경우 그 괴리감으로 소외의 고통을 느끼게 된다.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에서 문 밖의 소음으로 인해 그레고르가 느낀 소외감이 대표적인 예다. 뭉크는 피오르드 해안의 일몰에 붉게 물든 하늘과 굽이치는 자연의 곡선에서 자신의 내면이 내지르는 것과 같은 자연의 절규를 느꼈다. 외부로부터 촉발된 내면의 감정 폭발은 그것을 제한하는 슈퍼에고의 잠금장치가 풀리는 순간 이드의 해방으로 이어진다. 이 순간 에고는 요동치고 표류하기 시작한다.


[자유와 고통]

레니나와 버나드는 일종의 종교행사를 구경하게 된다. 한 노인이 손을 쳐들자 북소리가 멎고 두 개의 문에서 두 개의 그림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는 독수리, 다른 하나는 벌거벗은 채 십자가에 못 박힌 남자의 그림이었다. 노인이 손뼉을 치자 소년이 걸어 나왔고 행사가 시작되었다.


<코요테 가면을 쓴 남자가 채찍을 높이 치켜들었다. … 철썩채찍이 소년의 살을 내리쳤다소년은 몸을 부르르 떨면서도 신음 소리 한 번 내지 않고 느릿느릿 같은 속도로 걸었다. … 노인은 쓰러진 소년 위로 몸을 굽히고는 새하얗고 기다란 깃털을 등에 갖다 대었다깃털이 피로 새빨갛게 물들었다.>


소년은 채찍을 맞고도 고통을 감내한다. 이후 존은 자신이 채찍을 맞지 못한 것에 아쉬워한다. 

왼편: <그리스도의 채찍질>,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1444/78; 오른편: <참회자>, 알브레히트 뒤러, 1510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 기둥에 묶여 채찍질을 당한다. 채찍은 가죽과 양의 뼈로 이루어져 한 번의 채찍질에 살점이 뜯겨나가는 고통을 동반한다. 이 고통은 신이 인간의 몸으로 태어난 '육화'(incarnation)의 결과다. 인간의 몸으로 인간의 모든 고통을 대신 감내하는 예수의 희생은 모든 인간에 대한 용서(대속)를 위한 자기희생을 의미한다. 이후 수도자들은 스스로의 죄를 참회하기 위해 예수의 고통을 함께 느끼고자 한다. '고통을 함께 하는 것''sympathy'라고 한다. 우리가 '연민' 혹은 '동정'이라 부르는 이 단어는 타인의 고통과 같은 고통을 느낄 때에만 가능한 감정이다. 첫째로 예수가 인간과 같은 고통을 감내함으로써 인간은 같은 육체를 가지고도 스스로를 희생한 예수를 존경할 수 있다. 그다음으로 예수의 고통을 쫓아감으로써 자기반성과 희생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다. 여기서 흘러내리는 피는 희생, 생명력, 재생, 공동체의 결속과 연대를 의미한다. 

왼편: <프로메테우스>, 페터 파울 루벤스, 1611-12; 오른편: <십자가에 못 박힘>, 페터 파울 루벤스, 1615/16

독수리는 자유롭고, 높고, 고독한 존재이자 인간을 위협하고 압도하는 존재이다. 자유정신의 이 존재는 니체적으로 보자면 '주인의 도덕'을 가진 존재다. 반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는 희생, 고통, 구속, 안정, 균형을 강조하고 자유를 억제하는 '노예의 도덕'을 대변한다. 신에게 '구원'을 바라는 것은 자신의 운명을 그에게 맡기는 행위이고 그것은 노예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그에게 주어진 덕목은 복종과 침묵일 뿐이다. 소년은 십자가에 못 박힌 남자와 같이 고통을 감내하고 공동체의 일원으로 '복종'을 다짐한다. 그것이 공동체 내에서의 권리를 획득하는 방식이고, 성인이 되는 과정이다. 권리를 가진 성인만이 허용된 범위 내의 자유를 행사할 수 있다. 신세계에서의 성인은 '고통'을 극복한 자가 아닌, '고통'을 피하는 자로 소마를 통한 회피를 추구한다. 신세계에서 성인은 증명의 과정이 아닌 주어지는 과정이다. 고통 없는 자유, 쟁취하지 않은 자유이며, 책임지지 않는 자유이다. 신세계의 성인들은 자신의 계급과 직업에 대하 묻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이 왜 그 계급에 속하는지, 그 직업을 갖게 되었는지 묻지 않는다. 묻지 않는 자는 대답할 수도 없다. 어떠한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것을 우리는 responsibiliy, 즉 책임감이라 부른다. 존은 "내가 남자라는 사실을 똑똑히 보여 주기 위해..."라고 스스로를 증명하려 한다. 스스로가 성인임을 증명하고 대답하는 것, 그것이 실존적 인간, 자유정신을 가진 존재다. 


[소유의 방식]

신세계와 야만인 구역에서는 소유의 방식도 다르게 나타난다. 신세계에서의 기준은 '만인은 만인을 위해'서 존재한다. 따라서 소유라는 '분쟁의 원인'은 제거되어 있다. 인간관계에서의 독점적 관계도 금지되어 있다. 반면, 원주민 사회에서는 '상징적 소유'가 존재하며, 연대와 소속감이 중시된다. '소유' 자체에 대한 인위적 거부를 원칙화한 것이 신세계의 논리라면, 원주민들은 실제로 소유할 수 없는 인간에 대해 상징적 소유의 개념을 부여한다. 결혼, 자녀 등의 가족 제도가 그러하다. 인간이 가진 소유에 대한 본능을 부정하기보다 어느 정도 제어할만한 사회적 규범을 만들어 통제하는 방식을 사용한다. 

신세계에서는 '소유'에 대한 인간의 본능을 '소비'와 '물질주의적 만족'으로 대체한다. 이들이 경계하는 것은 루소의 사회계약설의 개념에 따라 자연 상태에서의 행복한 인간들이 '소유'를 위한 투쟁을 통해 악해진다는 사고에 기반한다. 하지만 이러한 인위적 소유의 통제는 영원히 충족되지 않는 '소비'의 연쇄작용을 통제 영원한 갈증을 유발할 뿐이다. 역시나 이러한 갈증의 일시적 해갈은 '소마'를 통해서 가능하다. '멋진 신세계'를 가장 완벽하게 만드는 것, 그리고 그 불완전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소마'의 존재다.


말파이스의 모습을 통해 문명과 자연의 대립, 인위적인 것과 전통적인 것의 대립이 드러난다. 어느 쪽도 완벽하지 않고, 어느 쪽도 전혀 이해 못 할 것도 아니다. 지나친 종교적, 전통적 사회도, 과도한 이성과 편리가 구현된 사회도 우리를 만족시키지 못한다. 어느 지점에서 우리는 전통적, 종교적 사회를 그리워할 것이고, 어느 지점에서 우리는 그러한 사회의 불합리에 지쳐 벼릴 것이다. 우리의 유토피아는 늘 현재의 불만을 비추는 거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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