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0,11장 사랑은 소마처럼 오묘하다
신세계로 돌아온 버나드는 자신이 데려온 존을 이용해 유명세를 얻는다. 버나드는 그동안 자신이 가져온 사회에 대한 비판이 인정욕구에서 오는 콤플렉스임을 보인다. 한편 존과 레니나는 미묘한 감정에 휩싸인다. 야만인 구역 출신이지만 베타 이상의 외모를 가진 존에 대한 레니나의 관심은 단순한 신세계식 연애 이상의 무엇으로 이어지고, 존의 레니나에 대한 관심은 그녀를 신성한 존재로 느끼게 만든다. 버나드의 변심은 신세계가 제공하는 달콤한 유혹이 신세계에 대한 자발적 복종심을 어떻게 불러일으키는지를 보여준다. 레니나와 존의 데이트는 육체적 관계에 대한 미묘한 신경전으로 드러나는데, 레니나의 육체에 대한 존의 관심은 그녀의 정신적 순결성을 증폭시키게 된다. 반면 존의 반욕망적 행위는 레니나의 진정한 욕망을 일깨우는 고통을 동반한다.
신세계에서 돌아온 레니나는 소마를 삼키며 휴식을 취한다.
<레니나는 기묘하고도 공포스러운 하루를 무사히 견뎌 냈으니, 그 대가로 완벽한 휴가를 누릴 자격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휴게소에 도착하자마자 소마를 여섯 알이나 삼키고 침대에 누웠다. 그러자 채 십 분도 되지 않아 머나먼 달나라로 여행을 떠났다.>
신세계로 여행을 다녀온 레니나가 달나라로의 또 다른 여행을 떠난다. 그녀의 육체는 신세계로 복귀했으나 그녀의 정신은 신세계가 아닌 또 다른 곳으로 향한다.
프랑스의 영화감독 조르주 멜리에스(Georges Méliès, 1861-1938)는 1902년 최초의 SF영화 <달로의 여행(le Voyage dans la lune)>를 상영한다. 멜리에스는 36년 전인 1865년 쥘 베른(Jules Verne, 1828-1905)의 소설 <지구에서 달까지(De la terre à la lune)>에 영감을 받았다. 미국의 남북전쟁(Civil War, 1861-65)에서 촉발된 대포에 대한 쥘 베른의 관심은 미지의 세계(terra incognita)에 대한 호기심과 자신감으로 이어진다. 이로부터 100여 년이 지난 1969년 인류는 달에 발자국을 남기게 되고, 미지의 세계는 감각의 세계로 내려왔다. 그곳에는 아르테미스도 디아나도 루나 혹은 이시스나 토끼도 없었다. 황량한 흙 표면이 확인된 달은 더 이상 신화적 상상력의 상징성을 더 이상 내포할 수 없었다. 달은 욕망과 광기의 상징이었다. 달에 대포를 쏜다는 것은 욕망에 대한 직접적 접근이자 광기에 대한 이성의 접근을 의미한다. 레니나는 존이라는 타자를 만나 그에게로 향하는 욕망의 여행을 시작한 것이다.
<분홍색 원피스 잠옷을 입은 레니나가 나지막한 침대에 곤히 잠들어 있었다. 구불구불 물결치는 머릿결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존은 레니나의 가녀린 분홍빛 발가락을 보자 저도 모르게 가슴이 저며 왔다. 팔다리를 축 늘어뜨린 채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레니나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절로 눈물이 고였다.>
존은 잠든 레니나를 훔쳐본다. 그가 야만인 구역에서 만난 어떤 여성보다 완전한 아름다움을 지닌 레니나는 미의 여신과 다름이 없다. 레니나는 자신이 속한 세계에서 모범적인 여성이다. 한 남자에게 얽매여있지 않고 자유로운 데이트를 하며, 마음을 나누지 않고 육체적 관계만을 나누었다.
영국의 라파엘 전파에 속하는 화가 존 에버렛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 1829-1896)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등장하는 오필리아가 강물에 빠져 죽기 전에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그렸다. 가장 시적인 죽음을 보여준다는 오필리아의 죽음에 밀레이는 셰익스피어가 묘사한 화환을 그녀의 오른손 주변에 띄워놓았다. 그리고 소설에 등장하지 않는 죽음과 수면의 상징인 붉은색의 양귀비를 그려 넣었다. 수동적이고 순종적인 캐릭터의 오필리어는 자신의 감정과 상황에 의해 정신적으로 고통을 받고 끝내 비극적 결말을 맞이한다. 반면 레니나의 잠든 모습은 사회적 규범에 순응하여 억압된 감정 상태를 의미한다. 신세계에서 요구하는 감정적인 관계에 대한 거부는 그녀에게 자연스럽게 생기는 존에 대한 관심이라는 반향을 불러온다. 이 두 인물은 각자 자신에게 요구되는 여성상에 대한 사회적 압력 때문에 자신의 욕망에 대해 솔직할 수 없는 상태를 보여준다. 그리고 레니나는 소마를 통해 금지된 욕망의 세계로의 여행을 시작한다. 사랑에 대한 신세계의 방안은 욕망에 대한 생리학적 접근을 통해 욕망 자체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방식이다. 하지만 레니나의 욕망은 존에 대한 육체적 관심에 있지 않기에 이러한 방식은 그녀의 욕망을 완전히 해소할 수 없다.
신세계에서는 사랑을 통한 생식이 불순한 것으로 이해된다. 사랑은 육체적, 생리적 소비의 대상이기 때문에 감정적 사랑은 소모적인 것으로 취급된다. "어머니"라는 말은 생식이라는 육체적 연결성을 통해 세대 간의 부정할 수 없는 대응관계를 형성한다. 반면 "아버지"는 생식의 측면에서 증명 관계가 요구되기 때문에 부정할 수 없는 대응관계를 형성할 수 없다.
<”아버지!” 출산, 즉 새끼를 배고 낳은 일은 혐오스러운 부도덕성을 의미하지만 ‘아버지’라는 말에는 그런 행위가 배제되어 있었다. 그것은 난잡하고 음탕하다기보다는 차라리 속되고 지저분한 단어였다.>
존이 소장에게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성적인 관계에 대한 긍정성은 있지만, 출산이라는 육체적 연결성으로부터는 거리를 둘 수 있다. 반면 '어머니'는 생식과 출산의 주체로 탯줄을 통해 그녀와 아이의 육체성을 증명한다. 예수가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 태어난 것을 육화(incarnation)이라고 부른다. 살을 뜻하는 라틴어 caro에 접두사 in을 붙여서 '신이 육체로 깃든다'는 의미를 지닌다. 종교와 신화를 부정하는 신세계에서는 예수 역시 부도덕성의 상징일 수밖에 없다. 반면, '아버지'는 속되고 지저분하다. 속되고 지저분한 이유는 플라톤이 지적하듯 가부장적 사회에서 사유재산과 상속이라는 제도는 사회의 부도덕을 유발하는 근본적인 이유이다. 더 많이 가지려 하고, 그것을 자신의 아이에게 물려주려는 행위는 그 과정에서 공동체에 수많은 해악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고에 기반한 유토피아적 사회모델 중 하나가 마르크스의 공산주의이다. 부모와 자식 간의 연관성이 제거된 신세계에서 '영원'은 실현될 가능성이 없다. 나의 유전자는 수정을 통해 다음 세대로 전달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사회적 통제를 통한 유전자의 '생존'만이 가능할 뿐이다.
잠든 레니나에 대해 존은 쇼 박사와 '소마와 영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존: “그렇게 많이 먹다 보면 수명이 짧아지지 않을까요?”
쇼 박사: “맞습니다. 하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수명을 늘리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 “단순히 물리적 시간의 관점에서 보자면 소마가 수명을 몇 년 단축시키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시간을 초월하여 소마가 우리에게 주는 무한히 긴 세월을 생각해 보세요. 소마 휴식은 먼 조상들이 영원이라 고 부르던 시간의 일부랍니다.”
존: “영원은 우리의 입술과 눈 위에 머문다.”>
소마의 복용은 신체적 수명을 짧게 만들 수 있다. 이것은 일종의 마약과 같은 작용을 한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쇼 박사는 이것이 수명을 늘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궤변을 늘어놓는다. 몇 년의 수명을 단축시키고 인간이 얻게 되는 무한히 긴 세월은 '영원의 일부'이다. '영원의 일부'는 순간과 같은 말이다. 영원은 완벽한 상태의 영원한 지속을 의미하고, 그것은 우리가 느끼는 '순간의 지속'에 대한 기대와 같다.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과 같은 말에 드러나듯,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영원"은 상태의 지속이라는 정지된 순간에 대한 포착에 불과하다. 소마는 고통과 경험에 대한 망각을 통해 '부정성의 상실' 상태에 지속하게 만드는 약물이다. 이와 같은 "영원"은 플라톤의 이데아적 "영원", 즉 "개념"의 단위를 의미한다. 구체성과 현실성에 배제된, 경험과 예외가 배제된 실험실 속의 지속(constant)이 바로 이 "영원"의 정체다. 하지만 존이 되뇌는 셰익스피어의 구절에서 "영원"은 "경험을 통한 기억의 지속"이다. 입맞춤은 사랑이라는 "개념적 상징"이 아니다. 두 사람이 맞추어 온 시선과 느껴온 감정의 절정의 순간에 대한 기억이다. 그리고 이 기억의 순간을 공유한 상대와의 관계가 지속되길 바라는 염원의 "영원"이다. 상대방과의 관계가 달라지면 기억은 빛을 잃고 축소된다. 그리고 작은 알맹이로 기억 속에 작은 자리를 차지할 뿐이다. 그리고 또 다른 상대를 만나면 또 다른 알맹이를 만들어내게 되고, 이러한 알맹이들의 모임이 한 사람의 사랑에 대한 이해를 만들게 된다. 레니나에게 사랑은 개념적인 정의를 갖는다. 육체적 관계는 개념의 일부일 뿐이며, 지속에 대한 가능성에 대한 과감한 포기는 감정적 관계에 대한 거부로 이어진다. 존과 레니나는 사랑에 대한 관점이 다르다. 존은 감정의 절정에 다다르지 못해 육체적 관계를 통제한다. 반면 레니나는 육체적 관계를 거부하는 존에 의해 통제할 수 없는 욕망을 마주하게 된다. 통제할 수 없는 욕망은 고통과 슬픔을 수반한다. 이것이 그녀의 첫사랑이다.
한편 버나드, 존과 함께 신세계로 돌아온 존의 어머니 린다는 오랜만에 맛보는 소마를 즐기는데 여념이 없다.
<린다는 그 방에 있지만 그 방에 존재하지 않았다. 머나먼 시간 너머 한없이 동떨어진 세계에서 휴식을 즐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 심장을 고동치게 만드는 아름다운 미로 속을 굽이굽이 미끄러져 가다 보면 완벽한 신념이라는 중심부에 도달했다. 미로의 중심에서 텔레비전을 켜면 촉각 영화 속 아름다운 주인공들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황홀한 춤을 추었다.>
린다의 육체는 방에 있지만, 그녀의 의식은 물리적 공간을 초월한 환상을 떠돌고 있다. 그녀의 마음속 미로의 중심부에는 "신념"이 위치하고 있다. 그녀의 미로는 인공적 아름다움으로 가득하며, 그것은 자신과 자신의 공동체가 공유하는 믿음이 만들어놓은 세계다. 크레타 섬에는 크노소스 궁전이 있었고, 그 지하에는 미노타우로스라는 반인반수의 괴물이 갇혀 있었다. 미노타우로스는 자신의 아버지인 미노아와 어머니인 파시파에의 부도덕함으로 생겨났다. 미노아 왕은 왕위를 계승받기 위해 삼촌 포세이돈에게 멋진 황소를 빌렸으나 왕위에 오른 후 되돌려주지 않았고, 포세이돈은 분노하여 파시파에가 황소와 사랑에 빠지게 했다. 왕비는 황소와 사랑을 나누기 위해 장인 다이달로스에게 인조 암소를 만들어달라고 하여 자신이 그 속에 들어가 황소와 사랑을 나누었다. 신과의 맹약을 어기고 자신들의 욕망만을 쫓은 결과로 탄생한 것이 미노타우로스이다. 숨기고 싶은 욕망의 상징인 미노타우로스는 가장 안전한 공간에 숨겨져야 했고 미노스 왕은 가장 가까운 곳, 하지만 접근하는 이 모두에게 공포와 두려움을 주는 곳에 그를 숨겼다. 그곳이 미궁 (labyrinth)이다. 미궁은 자신의 욕망을 마주하고 공간이지만,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괴물이 나올지 모르는 두려움을 마주하는 곳이다. 자신의 욕망을 찾는 것은 용기와 지혜 그리고 강인함이 필요하다. 그것을 갖추지 못한 신세계의 주민들은 고통과 슬픔 대신 쾌락과 즐거움을 쫓는다. 진정한 욕망은 고통 뒤에 환희를 숨겨놓는다.
반면 존은 레니나와의 데이트로 촉각 영화관을 방문한다. 그곳에서 키스의 촉각을 느끼던 중 존의 얼굴에는 고통과 열망이 동시에 떠올랐다.
<존은 막연한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나는 당신이 저런 것을 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존은 과거에 이미 일어났거나 앞으로 일어날지 모르는 온전함에 대한 훼손을 짐짓 레니나가 아니라 주변 환경의 탓으로 돌리며 말했다.>
레니나는 존에게 느끼는 육체적 욕망을 채우길 원한다. 하지만 존은 그녀에 대한 육체적 정복 앞에 두려움을 느낀다. 존에게는 "약속된 적도 없는 강력한 맹세"가 걸려있고, 그것은 "순결함"이라는 일종의 신념의 감옥이다. 순결을 상징하는 마리아를 그릴 때 서양의 화가들은 "닫힌 정원(hortus conclusus)"라는 모티브를 사용했다. <초승달 위의 마돈나와 아기 예수>에서 마리아의 뒤편을 나지막한 담장이 둘러싸고 있다. 소위 금남의 구역으로 상징되는 순결의 땅에는 그 누구도 침범한 적이 없다. 이러한 신화는 마리아의 신성을 높이고 아기 예수의 신격을 완성한다. 인간이 극복하기 힘든 욕망의 저편에 신성이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존은 레니나의 '온전함'을 지키고 싶고, 그녀의 정신적 타락을 주변의 탓으로 돌려야 그녀에 대한 사랑을 지킬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이 그 온전함을 훼손하는 순간, 자신의 감추고 싶은 욕망은 해방된다. 그 괴물을 마주하는 두려움은 욕망의 문을 열어젖힐 유일한 존재가 레니나다. 존의 인내는 고통을 수반하고, 고통의 크기가 커질수록 그의 욕망의 크기도 덩달아 성장한다. 존의 단호함에 의해 레니나는 소마로 밤을 지새우게 된다. 1그램의 소마로는 부족하고 1.5그램의 소마를 복용하기로 결정한다. 고통의 크기가 커질수록 소마의 복용량이 증가하고, 사랑의 크기가 커질수록 고통과 환희의 크기도 커진다.
<Love's as good as soma> (사랑은 소마처럼 오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