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13장 사랑의 세레나데, 고백의 시간
버나드는 존을 유명 인사들에게 보여주는 쇼를 개최하여 자신의 영향력을 확인시키려 하지만 존은 문을 잠그고 참석하기를 거부한다. 버나드는 주요 인사들에 의해 무시와 조롱을 당한다. 밑바닥까지 추락한 버나드를 보며 존은 버나드가 다시 자신과 같은 상태에 처했다는 동질감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버나드는 사회에 대한 부정적 비판의식을 상실했고, 거짓 세계에 살고자 하는 의지를 표명한다. 한편 레니나와 존은 서로에 대한 마음을 고백하지만 그들은 사랑의 방식에 대한 큰 차이를 보인다. 방식의 차이는 상대에 대해 '이해불가능성'을 제공하고, 레니나에게 이 '이해불가능성'은 내면의 욕망에 대한 접근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존은 레니나의 사랑의 방식에 대해 불쾌한 느낌을 받게 되고, 그녀에게 욕설과 폭력을 행사하게 된다.
버나드가 존의 참석을 부탁하는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운명이 공동체 합창 단장에게 달려있는 듯한 말을 한다. 그 말을 들은 존은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표현한다.
<버나드는 울음을 터뜨리기 일보 직전이었다. “Ai yaa tákwa!” 존이 공동체 합창 단장이라는 인물에 대해 느끼고 있는 감정을 정확히 표현할 수 있는 언어는 주니족의 언어뿐이었다. 불현듯 떠오른 말이 있어서 또 덧붙였다. “Háni!” 그러더니 조롱하는 억양으로 난폭하게 소리를 질렀다. “Sons éso tse-ná.”>
존이 원주민 언어로 표현한 말의 뜻을 헉슬리는 설명하지 않는다. 스와일리어로 알려진 저 말들에 대해 이해를 요구하지 않는 것은 헉슬리가 의도한 바가 언어적 이해가 아니기 때문이다. 가장 원시적 감정 표현은 소리를 지르는 행위이다. 각 언어와 문화에 따라 이러한 감정적 표현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발전했다. 우리가 언어로 규정하는 '감정'이라는 것은 영어로 'feeling' 혹은 정서의 의미를 갖는 'emotion'의 뜻이 있다. 'feeling'은 신체적 감각이라는데 초점을 맞춘 단어이고, 'emotion'은 신체적 감각의 총체로 우리에게 우리의 세계와 그 속에서의 경험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존은 '주니족' 마을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그의 원초적 감정은 '원초적 언어'와 동기화되어 있다. 존에게 문명화된 교육으로 익힌 제2언어는 자신의 원초적 감정을 담지 못한다. 문명화된 언어는 문명화된 감정을 전달할 수밖에 없고, 빈정대기와 풍자에 적합하게 발달한다. 하지만 원시의 언어는 자신의 감정에 대한 솔직하고 절박한 표현에 집중할 수밖에 없고, 그것은 자신의 생존과 결부된 언어이기 때문이다. 스와일리어로 “Ai yaa tákwa!”는 "누가 죽는다고!", “Háni!”는 "신이시여!" 그리고 “Sons éso tse-ná.”는 "내 편이거나 적이거나 둘 중 하나."라는 뜻이라고 한다. 격정적인 감정의 표출인 원시어는 존의 입장에선 참을 수 없는 감정의 표현인 동시에, 버나드의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공포의 소리이다.
신세계에서 통용되는 언어는 단순한 구조와 단순한 단어의 나열이었다. 이곳에서 금지된 셰익스피어에서의 언어는 신세계의 언어와 확연한 차이를 갖는다.
마그리트는 <빠른 희망>에서 모호한 형체와 불분명한 색채를 그려 넣고 그 옆에 분명한 의미의 단어를 기입한다. 배경을 보면 이 그림이 어떠한 풍경을 재현한 것이라는 인상을 받는데, 이러한 인상을 바탕으로 우리는 명찰이 붙어 있는 각 사물의 정체를 추리해 나간다. 화면 중앙의 위에 떠있는 'nuage'는 프랑스어로 '구름'을 뜻한다. 오른편의 'village à l'horizon'은 '지평선 위의 마을', 'cheval'은 '말', 'arbre'는 '나무' 그리고 'chaussée de plomb'은 '납밑창 신발'을 뜻한다. 각 사물의 모양과 형체는 언어가 표현하는 구체성을 재현하지 못한다. 거꾸로 말하면 언어가 지시하는 구체적 약속은 사물이 가진 다양한 부분의 일부만을 규정할 뿐이다. 온전히 사물의 성질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수식어구와 단어의 세분화된 정의가 필요하다. 조지 오웰이 <1984>에서 특정 단어를 제거하거나 의미를 제한하여 비판적 사고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새로운 언어인 '뉴스피크(newspeak)'를 소개하는 것도 마찬가지 의도이다. 전체주의의 언어는 다양한 표현을 제한하여, 해석의 가능성을 없애려 한다. 해석은 사고활동의 자유를 의미하고, 비판적 의식의 기초가 된다. 우리의 현실을 설명하는 언어가 줄어들수록 우리의 현실도 줄어든다.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에 대해 미셸 푸코는 같은 제목의 책(1973)에서 그의 감상을 전한다.
<우리는 말과 대상 사이에 새로운 관계를 세운, 통상 일상적인 삶에서는 무시되어 온 말과 대상의 어떤 성격을 정확히 부각할 수 있다.>
존의 불참 소식은 레니나에게도 충격을 주었다.
<그런데 그 순간, 존이 저녁 만찬에 오지 않을 거라고 버나드가 말하는 게 아닌가. 레니나는 ‘초강도 욕정 대체 훈련’을 시작할 때 맛본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비참한 공허감과 숨 막히는 불안감, 그리고 속이 뒤집힐 듯한 메스꺼움까지. 심장이 갑자기 멈춰 버릴 것 같았다. 레니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어쩌면 내가 싫어서 안 오는 건지도 몰라.” 그렇게 말하는 순간, 그 낮은 가능성은 완전한 사실이 되었다.>
신세계의 모범 시민 레니나에게 '비참함', '공허감', '불안감', '메스꺼움'과 같은 감정은 불필요한 것일 뿐 아니라 소마를 통해 즉각 처리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처음 맞이하는 '피할 수 없는 감정'을 마주했다. 그녀가 대상 없는 '욕정 대체' 훈련에서 부분적으로 느꼈던 감정들은 조금씩 이러한 감정에 대한 내성을 키우는 작업이었다. 일종의 욕정에 대한 '백신'이 '초강도 욕정 대체 훈련'의 정체다. 하지만 처음 겪는 종류의 질병에 이 백신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 독일어로 욕망은 'Gier'이고,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외부 자극에 대한 욕망을 'Begierde'라고 한다. 하지만 백신을 통해 레니나는 이러한 종류의 강력한 욕망에 견딜 수 있는 면역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어떠한 백신으로도 새로운 종류의 욕망은 이러한 면역의 방어벽을 쉽사리 뚫어버렸다. 독일어로 Neu(새로운)+Gier(욕망)은 'Neugier', 즉 '호기심'이다. 영어의 'curiosity'는 라틴어 curiositas에서 전해졌고 형용사 cura는 '관심, 탐구, 조사' 등을 뜻한다. 호기심은 과학, 언어, 산업의 진보와 같은 인간 발전의 원동력, 정확히 말하자면 '변화'의 원동력이다. 스위스의 심리학자 장 피아제(Jean William Fritz Piaget, 1896-1980)는 아기와 어린이가 현실을 이해하기 위해 호기심을 가지고 시도와 실패를 반복하는 '원시적 추론'과정이 지적 발달에 기여한다고 보았다. 신세계의 대부분의 인물들의 행동이 유아적이라는 느낌이 드는 이유는 바로 이 호기심을 통한 새로운 욕망에 대한 고통 과정을 겪지 못했기 때문이다.
무명 예술가의 작품 <세계 가장자리의 방랑자>는 1888년 대중 과학 서적 'L'atmosphère'(대기)의 'la forme du ciel(하늘의 형태)' 장에 삽화로 등장했다. 예술가는 프랑스의 작가 이자 천문학자 카미유 플라마리옹(Camille Flammarion, 1842-1925)이 1887년 쓴 글을 시각화한 이 작품에서 호기심과 끈기로 수많은 시련과 고통을 감내하고 세계의 가장자리에 도달한 방랑자를 그린다.
<... 중세의 한 순진한 선교사는 지상 낙원을 찾아 여행하던 중 하늘과 땅이 닿는 지평선에 도달했고, 하늘과 땅이 서로 연결되지 않은 특정 지점을 발견했다고 말하기까지 했습니다. 그곳은 하늘의 궁창 아래서 어깨를 구부려 통과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
이 방랑자가 호기심을 통해 세계의 가장자리에 도달하고 새로운 세계와 조우하는 것은 자신의 세계가 만든 허구성을 깨트리는 고통을 수반한다. 레니나는 존에게 호기심을 느끼고 그에 대한 관심은 내면의 본질적 욕망을 일깨우게 만든다. 레니나는 새로운 세계에서 새로운 자신을 낳는 산통을 겪기 시작한다. 이 산통은 '비참함', '공허감', '불안감', '메스꺼움'으로 시작해 곧 다가올 '육체적 고통'으로 이어진다.
무스타마 몬드는 <신생물학 이론>이라는 논문을 읽고 출판 금지를 결정한다. 그리고 저자에 대한 감시와 전출을 계획한다. 엄청난 성과라고 스스로도 인정하지만 새로운 지식에 대한 기쁨보다는 그것이 초래할 체제의 유지에 대한 걱정이 그에게는 더 중요한 가치였다.
<’안 됐군.’
무스타파 몬드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며 서명을 했다. 사실 논문 자체만 놓고 보면 걸작이나 다름없었다. 그렇다고 과학의 발전이라는 목적의식에 부합하는 연구 결과를 모두 수용하기 시작하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알 길이 없었다. 상위 계급 가운데 유독 이성적으로 동요하기 쉬운 사람들은 지금껏 주입한 사회 기능 설정 훈련이 아무 소용없게 될지도 모른다. 땅 위의 신선같이 누리던 행복에 대한 신념을 저버리고 다른 사상을 믿게 될 수도 있으니까. 이를테면 진정한 목표는 인간 세계 너머 저 어딘가에 존재한다든가, 인생의 목적은 단순히 육체적 안녕을 유지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의식을 단련하고 지식을 확장하는 데 두어야 한다든가, 하는 식의 사상 말이다. … ‘행복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없다면 사는 게 얼마나 즐거울까!’>
무스타파 몬드는 사회적 기준을 정하는 위치를 가지고 있다. 과학의 발전 자체를 목적으로 할 경우, 이것이 사회 체제를 유지하는데 도움을 줄 수도, 붕괴를 초래할 수도 있다. 사회 체제의 붕괴는 새로운 체제로의 이행을 의미하고, 새로운 체제에서는 이전 체제의 모든 가치가 재검증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니체는 이러한 이행을 "모든 가치의 전도(Umwertung aller Werte)"라고 불렀다. 이러한 체제 변화에 가장 동요되기 쉬운 사람들은 "이성적인" 사람들이다. 이성적인 사람들은 합리성 자체를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새로운 체제가 가져올 후과에 대한 예상을 하고 필요에 따라 변혁에 동조할 수 있다. 따라서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굳건한 토대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신세계의 유물론적 가치판단에 반대편에는 형이상학적 가치가 위치한다. 그들이 누리던 땅 위의 신선 같은 행복은 고정적 지위, 불변하는 계급을 기반으로 유지될 수 있었다. 하지만 육체성 우월성 이면의, 즉 물리적 조건 너머의 가치를 바라보는 것은 그리스어에서 저편을 나타내는 'meta'와 자연을 뜻하는 'physis'의 합성어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신이 펴낸 책의 이름이기도 한 "형이상학(metaphysic)"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행복(eudaimonia)"을 위한 세 가지 재화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환경에 대한 재화, 즉 사회적 조건, 외부적 재화, 즉 육체적 조건, 내부적 재화, 즉 영혼의 합리적 활동은 행복한 삶을 누리기 위한 기본 조건이다. 이를 위한 두 가지 삶의 방식이 요구되는데 첫째가 '관조적 삶(bios theoretikios)' 그리고 둘째가 '실천적 삶(bios praktikos)'이다. 무스타파 몬드가 경계하는 태도는 '관조적 삶'으로 '행복' 자체에 대한 고민과 '행복'을 위한 세 가지 조건에 대한 사유이다. 머리 없는 육체, 즉 마리오네트와 같이 주어진 규칙만을 따르는 인간으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그는 '신선'과 같은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이것은 니체가 말하는 '주인의 도덕(Herrenmoral)"이고, 이를 따르는 신세계의 주민들은 "노예의 도덕(Sklavenmoral)"이라고 한다. 노예는 생각하지 않고 단지 주인이 정해놓은 규칙을 따름으로서 생기는 수동적 행복에 만족하게 된다. 이들의 행복은 "고민할 필요가 없는 삶"에서 실현된다.
버나드가 초대한 손님들이 모두 돌아가고 다음날 아침 버나드는 비참한 현실로 되돌아왔고 존과 대화를 나눈다.
<(존)”말파이스에서 보았던 모습과 비슷해졌어요. 우리가 처음 이야기를 나누던 날 기억하나요? 우리 집 앞에서 말이에요.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아요.”
(버나드)“그건 내가 다시 불행해졌기 때문이에요.”
(존)”난 가짜 행복을 안고 사느니 차라리 불행한 삶을 택하겠어요.”
버나드가 씁쓸하게 대답했다.
(버나드)“난 가짜라도 행복이 좋아요. 당신 덕분에 누렸던 그 모든 행복이요. 당신이 만찬에 오지 않는 바람에 다들 내게 등을 돌렸잖아요!”>
존과 버나드가 나누었던 동질감은 자신들이 속한 사회에 대한 비판이었다. 하지만 버나드는 자신에게 다가온 달콤한 유혹에 굴복하여 자신의 행복을 외부의 평가에 내맡겼다. 불행은 모든 이에게 사회에 대한 비판을 가능케 한다. 불행 속에서 솟아오르는 비판은 단순한 불만과 구분하기 힘들다. 하지만 행복 속에서도 나타나는 비판의식은 자기반성적 성격을 갖는다. 버나드는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자신의 비판의식이 단순한 불만에 의한 것임을 자백했다.
가짜 행복과 진짜 행복의 고민은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잘 드러난다. 햄릿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삼촌과 어머니에 대한 복수를 결심하는 과정에서 유명한 말을 내뱉는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이 문장은 "죽느냐 사느냐" 혹은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로 번역될 수 있다. 우리가 존재하는 것이 육체적 삶과 죽음의 문제로만 생각한다면 "죽느냐 사느냐"라는 번역이 옳을지 모른다. 하지만 햄릿이 왕자의 지위를 차지하며 자신의 삼촌을 왕으로 인정하는 것은 진실을 회피하는 행위로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기만은 육체를 보존케 할지는 모르나 자신의 영혼을 속이는 행위로 스스로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다. 즉 진실한 삶에 대해 고민하게 하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헉슬리에게서 드러난다. 고민하고 굴복하는 버나드와 고통을 겪지만 스스로의 신념을 지키는 존의 대조적 묘사는 햄릿의 내면에 대한 두 가지 거울이라고 볼 수 있다. "존재할 것"인지 "사는 것"인지를 선택하는 것은 진정한 행복과 가짜 행복에 대한 결정과 같은 말이다. "사는 것", 즉 생존을 위한 삶에 남은 것은 가축과 같은 시간이 있을 뿐이다. "죽고자 하면 살 것이요."라는 이순신 장군의 말은 생을 바쳐 스스로의 영혼을 구하라는 말인지도 모른다. 죽은 자는 우리의 기억을 통해 영혼의 영원성을 얻을 수 있다. "기억될 것인가 잊힐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
헬름홀츠와 존과 버나드 앞에서 자신이 만든 고독에 관한 시를 소개한다. 헬름홀츠의 시에 대해 존은 관심을 보이고 버나드는 소외감을 느낀다. 존은 헬름홀츠에서 셰익스피어의 구절을 소개하고 헬름홀츠는 그에게 관심을 보인다. 하지만 헬름홀츠는 존이 민감해하는 '어머니'라는 말에 조롱 섞인 웃음을 터트리고 존의 불편함을 인식하지 못한다. 또한 헬름홀츠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광기와 폭력성'임을 자각한다.
(‘사랑하는 나의 어머니’라는 말에 대해 헬름홀츠가 웃음을 터트린 후)
<헬름홀츠는 한숨을 푹 내쉬며 이렇게 결론지었다.
“이런 식으로는 불가능해요. 우리에게 필요한 건 광기와 폭력성입니다. 그게 과연 뭘까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헬름홀츠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난 모르겠어요. 도무지 모르겠다고요.”>
헬름홀츠가 더 나은 작품을 창작하기 위해 겪는 한계는 분명하다. 신세계에서 한계는 수용의 영역이지 극복의 영역이 아니다.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인식의 지혜는 "너 자신을 알라(gnothi seauton)"로 설명될 수 있다. 소크라테스의 지혜는 '메타인지'라고 볼 수 있다. 자신의 '앎'에 대해 정확히 아는 것이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의 의미다. 그리고 자신의 '앎'의 영역 바깥에 무한히 많은 '앎'의 영역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자신의 '앎'이 무한히 확장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헬름홀츠가 사는 신세계에서 '광기와 폭력성'은 철저한 통제의 대상이다. 부정성을 대표하는 내면의 '광기와 폭력성'은 소마를 통해 길들여져 왔다. 헬름홀츠는 창작의 과정에서 스스로를 가두는 슈퍼에고의 통제력을 느꼈을 것이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을 느꼈을 것이다. 헬름홀츠에게 존이 소개하는 셰익스피어는 이드의 해방에 대한 단서를 제공하지만 그는 여전히 알지 못한다. 그가 극복해야 하는 것은 자잘한 깨우침이 아닌 사회 시스템이 행사하는 내면의 근본적인 억압이다. 이 억압에서 해방될 때 헬름홀츠는 또 다른 자신, 성장하는 자아를 만날 수 있다. 성장하는 내면의 자아는 이성으로는 충족할 수 없는 또 다른 욕망을 불러온다.
레니나는 만찬에 등장하지 않은 존을 찾아오고, 존은 헬름홀츠가 찾아온 줄 알고 문을 열어준다. 레니나와 존은 서로에 대한 감정을 확인한다. 하지만 둘은 사랑에 대한 이해에 있어 큰 차이를 보인다.
<(레니나)”영국에는 사자가 없어요.”
존은 혐오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존)”만일 있다 해도 헬리콥터를 탄 인간들이 독가스를 쏴서 죽여 버리겠죠. 난 그런 짓은 안 해요, 레니나.” … “뭐든지 할게요. 당신이 하라는 건 뭐든지요. 굉장히 고통스러운 운동도 할 수 있어요. 그 안에서 기쁨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요. … 당신이 시키면 바닥에 비질이라도 하겠다는 거예요.” 레니나는 더욱 혼란에 빠졌다. “청소기가 있는데 왜 그래야 하죠?” (존)”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고귀하게 할 수 있어요. 나는 그렇듯 고귀한 일을 하고 싶은 거예요. 내 말이 이해되나요?”
존은 레니나에게 자신의 사랑을 확인시켜 주기 위해 사자의 가죽을 바치든가, 청소를 하던가, 운동을 하는 등의 고통스러운 행위를 보여주고자 한다. 하지만 레니나는 존의 이러한 태도를 이해하지 못한다. 존의 사랑은 레니나의 '선언적 사랑'과 다른 '비유의 사랑'이다. 비유는 고정된 지시관계가 아니다. 비유는 서로 다른 두 단어 사이에 존재하지 않는 다리를 놓아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내는 예술이다. 사자의 가죽과 사랑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레니나에게 사자는 독가스를 쏴 죽여버릴 수 있는 정복의 대상이다. 하지만 존에게 사자는 용기의 상징이다. 사자의 가죽을 쟁취하는 것은 자신의 용기를 증명하는 것이고, 자신과 레니나 사이를 방해하는 모든 것을 견뎌내겠다는 다짐이다. 고통스러운 운동과 바닥을 청소하는 것과 사랑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고통스러운 운동은 스스로를 단련하고 끈기 있게 포기하지 않는 인내를 뜻한다. 바닥을 청소하는 것은 헌신과 순결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 모든 비유는 레니나에게 있어서 한낱 쓸데없는 짓거리에 불과하다. 그녀에게 고귀한 것은 타고난 것일 뿐이며, 증명은 계급과 외모로 충분하다. 하지만 존에게 있어서 고귀한 것은 '굳이' 나서는 것이다. 존은 셰익스피어의 <트로일러스와 크레시다>의 3막 2장을 인용한다.
“겉모습의 아름다움보다 오래가고 썩어 사라지는 피보다 빨리 새로워지는 마음이여.
레니나의 외모의 아름다움은 일정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것이다. 물론 신세계의 특성상 노화가 거의 없이 살다가 죽겠지만, 존은 이것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 또한 외모가 변치 않더라도 그것에 익숙해지면 아름다움은 오래가지 못한다. 마음 역시 달라질 수 있다. 인간이 가진 최고의 덕목이자 약점은 '망각'과 '익숙해짐'이기 때문이다. 존은 이러한 인간의 속성을 셰익스피어를 통해 깨달았다. 따라서 쉽사리 관계 속으로 몰입하지 못한다. 언제 변할지 모르는 감정과 외적 아름다움에 기대어 자신의 사랑을 바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용기, 인내, 희생과 순결은 자신에 대한 굳은 맹세이기도 하다. 존의 사랑은 끊임없는 새로운 관계를 통해 지속될 수 있다.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은 함께 경험한 용기, 인내, 헌신과 순결의 시간 속에서 새로운 비유로 재탄생된다. 따라서 결과적 사랑이라는 레니나의 태도에 대해 존은 분노할 수밖에 없다. 그녀의 사랑은 존 자신을 한없이 하찮게 만들기 때문이다. 스스로 납득하지 못하는 사랑은 '감정의 소비'일뿐이다. 뿌리치는 존에게 끊임없이 달려드는 레니나, 존은 그녀를 "창녀"라고 욕하며, 욕실에 가둔다. 그리고 어딘가로부터 전화를 받은 존은 방을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