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5,16장 죽음에 익숙해지는 훈련, 자유라는 이름으로
존은 전화를 받고 파크 레인 병원으로 급히 이동했다. 이 병원은 죽음을 앞둔 사람을 수용하는 병원이었고 린다는 이곳에서 다른 죽어가는 이들과 함께 현대적 편의 시설을 즐기고 있었다. 슬픔에 빠진 존에게 간호사는 병원의 쾌적한 환경과 서비스에 대해 설명한다. 린다는 이미 소마에 취해있었고 존을 제대로 알아보지도 못했다. 마지막 순간 존을 잠시 알아보고는 린다는 숨을 거두었다. 린다와 린다의 죽음을 구경하는 한 무더기의 쌍둥이들이 등장한다. 존은 이들의 언행에 불쾌감과 분노를 느낀다. 이때 한 알파 남성이 소마를 배급하기 시작하자 존은 사람들에게 소마가 독약이라고 소리친다. 존은 자유롭고 인간다운 삶을 살 것을 이야기하지만 경찰이 등장하여 그를 제압하고 통제관 무스타파에게로 데려간다. 존, 버나드 그리고 헬름홀츠는 무스타파 몬드 앞에서 문명적 대화를 통한 일종의 심문을 이어간다. 이 과정에서 신세계가 유지될 수 있는 조건과 희생될 수밖에 없는 것들에 대해 설명된다. 희생되는 것들과 유지될 수 있는 것들 사이의 선택의 문제처럼 보이는 이 대화에서 무스타파를 제외한 신세계의 모든 인간에게 주어지지 않은 가치가 밝혀진다.
존은 병원에서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들을 보게 된다. 그들의 모습은 야만구역의 노인들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노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는 바람에 심장과 뇌만 늙었을 뿐, 뺨에는 세월의 흔적이 미처 번지지 않아서 여전히 팽팽한 얼굴들이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두 번째 유아기를 맞은 사람들의 멍한 눈이 두 사람을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외형적 노화를 극도로 거부한 신세계의 노인들은 젊은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생에의 의지 담은 심장과 생각하는 능력을 발휘하는 뇌의 노화만은 막을 수 없었다. 그들에 대해 헉슬리는 "두 번째 유아기"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1922년 5월 27일 콜리어스 매거진에서 한 단편 소설이 시작된다. 스콧 핏츠제럴드(Scott Fitzgerald, 1896-1940)는 2009년 개봉한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의 원작이 되는 <벤자민 버튼의 흥미로운 케이스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를 집필한다. 벤자민 버튼의 이야기에서 흥미로운 점은 인간의 삶에 내재된 대칭성(symmetry)이다. 우리는 흔히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현명할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져왔다. 사회의 변화가 느리고 정보의 축적량이 많지 않았던 시기에는 노인들의 경험은 지혜로 평가받기에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특히 농업이 주요 산업인 지역에서 파종과 추수의 적절한 시기는 그들이 수십 년간 경험해 온 데이터를 통해 파악되는 경우가 많았고, 강우와 폭염에 대한 예측과 대비도 그들의 경험에 의존했다. 하지만 산업사회에서 그들의 경험은 무용지물인 경우가 많았다. 이제 우리는 재교육을 통해 스스로의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야 하는 부담을 갖게 되었고, 그것에 실패한 사람들은 도태된 자 혹은 잉여인간이라는 불명예를 떠안아야 한다. 인간을 '쓸모'로 평가하는 사회에서 노인의 가치는 점차 낮아질 수밖에 없다. 심지어 외형적 차이가 없는 신세계의 노인은 현재 우리에게 또 다른 위기를 시사한다. AI에 의해 사라질 직업에 대한 위기의식은 세대 간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닌 '젊은 무쓸모'를 대량을 발생시킬 것으로 예상된다. 헉슬리가 그린 모습처럼 이제 머지않아 겉모습으로는 구별 불가능한 무수한 내면의 노인이 생겨날지도 모른다.
헉슬리가 <멋진 신세계>에서 말하는 '두 번째 유아기(second infancy)'를 핏츠제럴드의 아이디어에 비춰 해석해 본다면 인간은 태어나서 육체와 정신의 정점인 30,40대를 거쳐 다시 죽음으로 회귀하는 과정을 겪는다. 출생 이후 아무것도 모르는 유아기 상태의 인간과 임종 직전 치매 상태의 노인의 유사성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미숙함이라는 부분은 상승기에서 뿐 아니라 침체기에서도 발견된다. 나이 든 부모를 모시는 장년층이 나이 든 자신들의 부모들의 이해하지 못할 행동과 말에 당황하거나 화를 내는 것은 이러한 '인생의 대칭성'을 고려해 본다면 그것이 화낼 일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어린아이가 침을 흘리는 행동에 화를 내는 부모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멋진 신세계에서 죽음을 앞둔 이들이 유아적인 상태의 죽음을 맞이하는 이유는 진정한 관계나 감정의 결여로 정신의 성숙함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이 든 인간의 현명함은 '쓸모 있는' 지식의 여부가 아니라, 인간관계와 감정 등의 보이지 않는 추상적 가치에 대한 이해에 있다. '쓸모없는 것'들의 가치를 아는 것은 유아적 지능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헉슬리는 니체의 철학을 교묘하고 철저하게 소설로 끌어온다. 니체는 19세기말 기독교의 내세주의를 강력하게 비판하며 '동일한 것의 반복(Ewige Wiederkunft des Gleichen)'을 이야기한다. 이번 생이 마감되면 생이 지속되는 동안 행했던 선과 악의 심판을 통해 천국과 지옥으로 간다는 기독교적 내세관념을 허구라고 비판하고, 이번 생이 끝이 나면 완전히 똑같은 삶을 반복하게 된다는 가설이다. 불교의 윤회와는 전혀 다른 이 가설은 역설적으로 '생의 일회성'을 강조하기 위해 만든 비유적 표현이다. 동일한 삶의 반복은 다시 말해 한 번의 결정이 유일한 결정이라는 것과 다르지 않다. 니체에게 '동일한 것'은 부정적인 메타퍼로 주로 사용된다. 그는 부정적인 것의 부정을 통해 긍정으로 나아가는 방법론을 펼친다. 니체는 사람들이 모두 똑같이 생각하고, 똑같이 옷을 입고, 똑같은 삶을 사는 것을 경멸했다. 그는 모두를 동일하게 만드는 교육을 부자연스럽고 인위적인 것이라고 비판했다.
<일반교양이 고통을 받고 있는 시대에 진실한 학문, 정직하고 벌거벗은 철학의 여신이 부자연스럽고 인위적이며 합당하지 않은 상황에 처해있다! 이러한 강요된 외적 획일화의 세계에서 그것은 외로운 산책자의 학식 있는 독백으로, 개인의 우연한 먹잇감으로, 방구석의 숨겨진 비밀로, 학구적인 노인과 아이들 사이의 안전한 수다로 남는다.> ([삶에 대한 역사의 공과] 5절 中, 프리드리히 니체)
동일성의 악몽은 존이 신세계에서 겪는 가장 고통스러운 경험 가운데 하나다. 그는 수많은 쌍둥이를 보며 괴로워한다.
<그들의 얼굴, 수가 그렇게 많은데도 생김새는 똑같은 그 얼굴은 납작한 들창코에 흐리멍덩한 퉁방울 눈을 하고 있었다. 똑같은 황갈색 옷을 입고 하나같이 입을 헤 벌리고 있었다. … “막돼먹다니요? 대체 그게 무슨 소리예요? 죽음에 익숙해지도록 훈련받는 중이잖아요….”.>
마그리트는 어두운 외투와 중절모를 쓴 수십 명의 남자를 비가 오는 순간의 스냅숏과 같이 그렸다. 여기서 남자들은 복제된 듯 개성도 특성도 없어 보인다. 이 그림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대도시의 익명성을 소재로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마그리트는 '이미지'가 우리에게 인식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허구성에 대해 지적하는 작품을 주로 그렸다. 만약 마그리트가 같은 옷을 입은 수많은 남자가 파리의 비 오는 거리를 걸어 다니는 카이유보트(1848-1894)와 같은 장면을 그렸다면 어떨까? 카이유보트는 비 오는 날 파리의 거리의 순간을 포착하여 화폭에 남겼다. 그의 작품은 인상주의에 속하며 대도시의 일상적 모습이 미술의 주제로 등장했다는 의의를 갖는다. 한편 마그리트는 대도시에 내리는 빗방울을 신사의 모습으로 표현했다. 마그리트 미술은 단 하나의 해석만이 지배적 위치를 갖지 않으니 해석을 관람자의 몫이다. 모두 같은 유행의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은 '동일한 것에 대한 공포'로 개성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을 나타내기도 한다. 하지만 산업사회와 자본주의의 발전 과정에서 발생하는 '유행(Mode)'은 게오르그 짐멜(Georg Simmel, 1858-1918)이 말하듯 "사회적 균등화 경향과 개인적 차별화 경향 사이에 타협하려고 시도하는 삶의 형식 중 특별한 것"에 해당한다. 마그리트는 각기 다른 빗방울에 대한 우리의 종합적 명명이 '겨울비'일지는 몰라도 각각의 빗방울은 각기 다른 크기와 종착지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대도시의 수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옷을 입고 있다고 해서 그들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인생을 사는 것은 아니다. 물론 '동일한 것에 대한 공포'는 개별성의 상실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는 <시지프의 신화>(1942)에서 또 다른 종류의 공포를 설명한다.
동일한 것에 대한 공포는 인간의 유한성 때문에 극도로 강화된다. 인간은 유한한 시간을 소비하며 살아간다. 까뮈가 <시지프의 신화>에서 반복된 일상을 보내는 우리에게 경종을 울리듯 동일한 일상의 반복은 삶을 무의미함으로 가득 채우고 우리를 공허와 허무에 빠뜨린다. 기독교는 오랜 시간 동안 허무에 빠지지 않는 방법을 강구했다. 그것은 죽음에 익숙해지게 만드는 것이었고 "memento mori!(죽음을 기억하라)" 나 "Vanitas(바니타스)"와 같은 구호를 설파했다. 어차피 우리의 생물학적 삶은 정해져 있고, 그것을 피할 방법은 없다. 그렇다면 생의 유한함을 자각하고, 신의 뜻 안에서 살도록 노력하는 '도덕적 삶'을 사는 것만이 고통으로 가득 찬 삶을 견뎌낸 후 천국이라는 달콤한 보상을 받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매 순간 삶의 유한성을 망각하고 불멸의 존재가 된냥 막무가내로 행동할 위험성이 있다. 따라서 중세의 도시에는 죽음을 끊임없이 되새기게 해 줄 묘지를 도시 안에 두었고 그것이 흑사병을 빠른 속도로 퍼지게 한 원인이 되었다. 종교의 시대에 묘지는 도덕적 삶을 위한 '절대 잊어버리면 안 될' 메모지와 같았다. 흑사병을 겪은 후 공동묘지는 도시 성벽의 외부로 이동하게 되었고, 인문주의의 시작을 알리는 르네상스와 함께 '죽음' 대신 '현생'에 집중하는 사상이 힘을 발휘하게 되었다.
죽음을 목전에 둔 린다는 헛것을 보며 생의 마지막 기억을 떠올린다.
<황홀감에 빠진 어린아이 같은 미소였다. “포페! 너무 좋아요, 정말 좋아요 …” … 그러나 린다는 존의 얼굴과 억센 손아귀마저 상상의 세계 속으로 옮겨놓고 말았다. 은은한 꿀풀 향기와 합성 오르간의 세계, 변형된 기억과 뒤틀린 감각들로 이루어진 꿈의 세계로. 린다는 자신의 아들 존을 알아보았지만, 포페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말파이스라는 낙원에 침입한 불청객으로 생각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신세계를 그토록 그리워한 린다가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떠올린 가장 행복한 기억은 말파이스에서 포페와 보낸 시간이었다. 린다가 말파이스에서 그토록 그리워했던 것은 신세계와 그곳에서 맛볼 수 있는 안정감 그리고 소마였다. 드디어 소마를 손에 쥔 그녀는 광기에 사로잡혀 소마를 쉴 새 없이 복용한다. 손에 쥔 욕망은 더 이상 욕망이 아니다. 이제 그녀에게 그리움은 그녀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것을 향한다. 토마스 무어(Thomas Moore, 1478-1535)는 '유토피아(utopia)'에서 이상적 국가에 대한 비전을 서술한다. '이 세상에는 없는 곳'(nowhere)이라는 고대그리스 합성어에서 유래한 이 작품에서 무어는 원제목 <De optimo statu rei publicae deque nova insula Utopia(국가와 새로운 유토피아 섬의 최고의 헌법)>에서 알 수 있듯 당시 영국의 통치제도와 대한 비판의식이 담겨있다. 소위 '낙원'이라는 것은 현재에 대한 결핍에 대한 그리움의 반영이다. 폴란드계 영국의 철학자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 1928-2017)은 <Retrotopia>에서 목가적인 미래가 아니라 이상화된 과거에 대한 지향을 이야기한다. 결국 우리가 희망 혹은 바람이라고 부르는 것이 충족된 가상의 공간인 '낙원'은 현재의 결핍이 해소된 곳 혹은 현재의 과잉이 제거되거나 그것을 더욱 채울 수 있는 여분의 공간을 포함한 곳이다. 상상력을 발휘하여 이전에 없었던 공간을 그려낸다면 SF적 미래상으로 드러날 것이고, 노스탤지어를 강하게 드러낸다면 '벨에포크(Bell-epoque)'로 향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어느 만화의 유명한 대사와 같이,
<도망친 곳에 안식처는 없다.>
결국 오늘을 살 수밖에 없는(carpe diem) 우리는 그러한 우리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amor fati) 오늘의 문제를 해결해 나갈 '힘에의 의지'를 발휘할 수밖에 없다.
불만족스러운 현재에 대한 도피처로서 신세계의 사람들은 소마를 복용한다. 야만구역에서 현재에 대한 가치를 경험한 린다조차도 소마의 즉각적 효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후 줄곧 소마에 빠져 지냈다.
<린다는 소마의 노예가 되어 결국 죽음을 맞았다. 다른 사람들은 자유롭게 살면서 이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어야 한다. 그것은 그들이 살면서 받아야 할 보상이자 지켜야 할 의무였다. 불현듯 존은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명확히 깨달았다. …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까지도 죽이는 독약이라고요.”>
어머니를 잃은 존은 이 진실을 깨닫고 눈앞에 펼쳐진 부조리를 좌시할 수 없었다. 이제 선지자와 같이 그들 앞에 나서서 그들이 스스로를 해치지 못하게 진실을 이야기한다. 그들이 지켜야 할 것은 소마에 의한 안전과 행복이 아니다. 그들은 안전과 행복의 노예가 되어 죽어간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유'를 되찾아야 한다. 하지만 견고한 이 '자발적 노예제도'는 인간의 복종 심리를 정확히 이해하는 시스템으로 작동한다. 무스타파는 누구보다 존의 말을 이해하지만 그의 말에 정면으로 반박하는 논리를 펼친다.
<”… 안정된 사회에서는 도저히 비극을 만들어 낼 길이 없어. 지금은 안정의 시대지. 사람들은 원하는 게 있으면 얼마든지 가질 수 있어. 얻지 못할 것은 아예 원하지도 않으니 늘 행복하고. 안전이 보장되고 질병에서 자유로우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 노화나 욕망에 대해 무지하니 더없이 행복할 뿐이지. 성가시게 구는 어미나 아비도 없고, 애끓는 감정을 불러일으킬 아내나 아이들이나 연인도 없어. … 만에 하나 잘못된다 해도 언제든 소마에 기대면 그만이지. 그런데 그것을 야만인 선생이 자유라는 이름으로 창밖에 내던져 버린 거야. 자유라는 이름으로!”>
무스타파가 지향하는 안정과 행복은 "원하는 것을 충족"하는 동시에 "더 원하지 않는" 것에 기반한다. '새로운 욕망'에 대한 부정이다. 기존의 욕망으로 충족되지 않는 본능적 욕망이 생겨나면, 그 사이에 발생한 간극만큼 공허감이 밀려온다. 고대 그리스의 영웅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욕망을 느끼고, 시도하고 좌절하고 성취하고 또다시 욕망하고 시도하기를 반복한다. 하지만 신세계의 '안정지향성'은 욕망의 간극이 발생시키는 문제점을 해결할 방법을 모른다. 문제해결을 위해 니체는 '시도와 물음'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 나는 다양한 길과 방법으로 나의 진리에 이르렀다. 내가 사다리 하나만으로 먼 곳을 휘둘러볼 수 있는 이 높이에까지 오른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리고 나 길을 묻고는 했지만, 그때마다 마지못해 그렇게 했을 뿐이다. 그러는 것이 언제나 내 취향에 거슬렸으니! 그래서 나 차라리 직접 그 길들에게 물어가며 길을 가려 시도해 보았던 것이다. 시도와 물음, 그것이 나의 모든 행로였다. 그리고 진정, 그 같은 물음에 대답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것이 내 취향이렷다.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는, 나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숨기지 않는 나의 취향 말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력의 정령에 대하여 中, 프리드리히 니체)
'시도와 물음'은 자신의 취향을 찾는 여정이다. 자신의 취향은 '모두의 취향'과 다르다. 신세계에서는 모두가 같은 것을 선호한다. 셰익스피어와 같은 문학작품은 해석에 따라 각자의 취향을 찾아가게 만든다. 이것은 '모두의 취향', 즉 체제에 대한 도전이다. 존은 이미 셰익스피어를 읽었고 병원에서 수많은 쌍둥이 앞에서 소마를 버리는 혁명가적 행위를 하며 소리친다.
<”오, 멋진 신세계여!” 미란다는 일찍이 사랑의 가능성을, 끔찍한 악몽까지도 선하고 고귀한 것으로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을 선포했다.” … 그것은 도전이자 명령이었다.>
헉슬리는 '사랑'을 '도전이자 명령'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니체가 강조하는 '자유정신'이 삶에 대한 사랑을 의미하는 것과 맞물려있다. 사랑은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내리는 명령과 같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 사람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가 없다. 거부할 수 없는 명령과 같다. 그리고 짝사랑으로 끝날 수 없는 열광적인 사랑은 그 사람에게 끝없는 도전을 부추긴다. 명령은 스스로에게, 도전은 상대방에게로 향한다. 따라서 현재를 낙원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지금 내 삶에 대한 사랑의 힘으로 시도하고 묻고 도전하는 것이 유일한 길이다.
'시도와 물음', '사랑'과 '도전'은 고통을 통해 보상을 제공한다. 이것은 '초과 보상'으로 도전으로 얻은 대상에 대한 소유 이외에 스스로에게 주어지는 '자기 극복'을 말한다. 이렇게 고취한 자아는 또 다른 '도전'으로 나아가고 이전의 '나'와는 다른 '성장한 나'와의 만남을 주선한다. 이렇게 성장한 나는 나조차도 예상하지 못했던 존재가 된다. 신세계에서 헬름홀츠와 같은 '자기 극복형' 인간은 섬으로 발령을 받아 공동체에서 벗어난 생활을 하게 된다.
<”… 그곳 사람들은 공동체 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자의식이 강하다네. 정통에 만족하지 못하고 각자 독립적인 생각을 지닌 사람들, 다시 말해, ‘아무나’가 아니라 ‘누군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지…”>
앞으로 헬름홀츠는 여느 쌍둥이들과는 다른 '누군가'가 될 것이다. 무스타파 역시 이러한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섬으로 가는 것을 포기했고 신세계의 통제관으로 남는 것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 선택은 단지 자신이 살 공간에 대한 선택이 아니었다.
<”그게 바로 내가 치른 대가였네. 행복을, 그것도 내 행복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섬기기로 선택한 대가였지.”>
무스타파는 '자신의 행복'을 대가로 신세계에 남게 되었다. 그가 버리지 못한 것은 결국 '안정과 행복'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무나'의 안정과 행복이다. '아무나'는 대체 가능한 인간이기에 숫자로 치환가능하다. 하지만 '누군가'는 독립적 존재로 대체불가능하다. 신세계에서 사람을 숫자로 세고, 등급으로 부르는 것은 무스타파를 제외한 모든 이들은 대체 가능한 '숫자'에 불과하다는 이야기이다. 이들의 정체성은 단 한 사람의 통제과에 의해 결정된다. 무스타파의 선택이 '아무나' 혹은 '모두'의 행복의 기준이 된다. 그리고 그 속에서 각각의 사람들은 무스타파가 정한 행복의 기준을 자신이 정한 것이라고 착각하며 산다. 니체는 이것을 '자기기만(Selbsttäuschung)'이라고 부른다. 니체는 사기 가운데 가장 나쁜 사기를 '자신에 대한 사기', 즉 자기기만이라고 말한다. 소위 '정신승리'라 불리는 '자기기만'은 '시도와 물음'을 하지 않고, 어떤 것도 '사랑'하지 않는 상태를 '행복'이라고 위장하는 기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