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신세계> #11

17,18장 불행해질 권리, 악몽이여 안녕!

by Homo ludens

[줄거리]

무스타파 몬드와 존은 단둘이 남아 이야기를 나눈다. 이야기의 주제는 주로 신에 관한 이야기로 신세계와 야만구역의 극명한 인식의 차이를 보여준다. 무스타파는 종교가 가지고 있는 장점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종교가 가지고 있는 부작용에 대해서도 인지하고 있다. 그는 공동체를 유지, 관리하기 위해 종교가 가지고 있는 장점은 이용하고, 공동체를 와해시킬 위험성이 있거나 반드시 필요한 사항이 아닌 것들은 제거하는 방식으로 종교성을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무스타파는 자신이 기여한 신세계가 철학자들이 상상하지도 못한 '유토피아'임을 확신한다. 그곳에서 인간은 신으로부터 '독립'하게 되었고, 신으로부터 받아야 할 것(대용품)은 사라졌다고 말한다. 외로움을 느끼는 인간에게 종교와 철학은 '가짜 이유'를 만들어 해소된 듯한 착각을 만들어내지만, 신세계에서는 인간이 고독을 느끼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도록 삶을 조정해 두었다. 하지만 존은 인간의 '고귀함'을 강조한다.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할 권리, 즉 '불행해질 권리'가 인간의 고귀함이라고 말한다. 존은 스스로 신세계를 떠나 황야로 나아간다. 자발적 고립을 선택한 이 야만인에 대한 신세계의 관심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화젯거리가 되었고 그가 스스로를 지키려는 몸부림은 최고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자신이 극도로 경멸하는 인간들의 자신에 대한 환호를 견디는 일은 쉽지 않았다. 어느 날 존은 그들과 소마를 먹고 광기 어린 축제를 벌이고 정오에 잠에서 깼다. 그리고 그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존재와 부재의 경계]

종교에 대한 존과 무스타파의 대화는 신의 존재 유무에 대한 직, 간접적 증명과는 다르다. 그들은 신에 대한 믿음의 효용성에 문제를 다룬다. 신을 믿을 경우에 얻을 수 있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존은 신세계를 타락의 공간이라고 이해하는 반면, 신의 대용품으로 그것을 채울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무스타파는 신세계가 종교의 부작용을 해결한 곳이라고 이해한다. 중세의 세계관을 대변하는 듯한 존의 이야기는 근대를 넘어선 우리에게 또 다른 가치를 제공할 수 있는 반명, 이미 넘어선 옛 신에 대한 향수와 거부반응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근대의 논리를 설파하는 무스타파는 합리성과 효율성을 정치의 영역에서 구사하려는 듯 보이며 이것은 도덕에 대한 회의를 동반한다. 지금까지 이어지는 절대적 가치와 상대적 가치에 대한 논의는 신과 실존이라는 20세기 초반에 등장한 실존주의 철학자들의 주장에서 근원적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다.


(종교에 관한 책을 무스타파가 보여준 후)

(무스타파) ”이것 말고도 아주 많아. 오래된 음란 도서들 말일세. 신은 내 금고 안에, 포드님은 내 책장 선반에 모셔 두었지” … “사람들에게 <오셀로>를 주지 않는 이유와 같지. 이건 아주 오래된 책들이야. 수백 년 전의 신에 관한 이야기지, 현재의 신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고.”
(존)”신은 변하지 않습니다.”
(무스타파)”사람은 변하지.”


존은 신세계 인간들이 '무지'에 의해 신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무스타파는 이미 자신의 금고 속에 성경과 철학서, 문학 작품 등을 보관하고 있었다. 존은 '신의 불변성'을 이야기하며 변치 않은 진리를 제시한다. 하지만 무스타파는 '신의 불변성'과는 무관한 '변화 속의 인간', 즉 인간의 '유한성'에 대해 논한다. 존은 인간의 '유한성'은 자각과 극복의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존재론'적 철학 혹은 신학의 입장을 취한다. 변치 않는 '영원성'의 신은 '유한성'의 인간보다 완벽하고 선하다. 따라서 본질적으로 '선한' 것을 따르는 것은 올바르고 자연스러운 일이 된다. 존은 중세와 데카르트에 이르는 '합리적 신'에 대한 철학적 접근의 한계를 고백한다. 중세의 신학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1260년경-1328)는 '신의 부재'를 통해 '초월성'을 체험할 수 있다고 말했다. 데이비드 흄(David Hume,1711-1776) 역시 신의 전지전능함과 인간의 자유의지는 모순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지성이 신의 의지에 대해 접근 불가능하다는 것을 고백한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철학자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1889-1951)은 <논리-철학논고(Tractatus, 1922)>에서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우리는 침묵해야 한다"는 말로 언어적 이해를 벗어난 것에 대해 철학적 논증의 한계를 명확히 했다.


(철학자에 대해)

<(무스타파)”… 철학자가 무슨 뜻이 지나 아는지 모르겠지만.”

존이 기다렸다는 듯 다급히 말했다.

“철학자는 하늘과 땅에 있는 것들을 미처 다 꿈꾸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

(무스타파가 책을 읽어준다)”우리가 소유한 것이 우리 것이 아니듯, 우리 자신도 각자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창조해 내지 않았을뿐더러 스스로를 넘어설 수도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주인이 아니다. 우리는 신의 소유물이다.”>


존이 말하는 철학자는 인식의 한계로 하늘에 닿지 못하지만 신에 대한 의지로 땅을 벗어나 하늘로 향하고자 하는 존재다. 이러한 중간적 존재는 정신적 영역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육체적 영역의 유혹을 뿌리칠 줄 안다. 무스타파는 또 다른 철학자의 입을 통해 신세계가 수용하고 구현한 철학의 세계를 보여준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자는 누구의 것도 아니다.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도 스스로를 제한하고 규정할 수 없기에 주인이 될 수 없다. 이러한 방랑자들은 '신' 아래에 함께 모여 공동체를 만들고 '신의 의지'를 구현하려는 교회를 만든다. 하지만 무스타파는 교회 대신 '만인이 만인의 것'인 공동체를 만든다. 이것이 신세계이고, 이곳에서는 '신'이 없어도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는 대체품이 개발되어 있다.


“독립이란 사람에게 어울리지 않는 개념이라는 것을 말이다. 독립은 매우 부자연스러운 상태이다. 잠깐은 괜찮을지 몰라도 우리를 끝까지 안전하게 지켜 주지는…”

“인간은 나이가 들면서 점점 나약함, 무력함, 불편함 따위의 감각을 느끼게 된다. … 괴로움에는 특정한 원인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 이 얼마나 헛된 망상인가! 인간이 앓고 있는 것은 바로 노화라는 끔찍한 질병이다.”


이 대체품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게 해주는 '신'과 '내세'를 대신해 '죽음'을 직접적으로 느끼게 해주는 '노화'의 제거한다. '노화'를 목격한 적이 없는 인간은 '시간' 속에 존재하는 인간의 유한성을 자각하지 못하게 한다. 멈춰버린 시간 속에 부유하는 인간은 늘 초현실적 공간에 머물러있다. 올더스 헉슬리는 존과 무스타파의 대화를 통해 유한한 시간 속에서 영원의 존재를 통해 안식을 느끼는 인간과 유한성에 대한 인식을 통제당한 무지한 평안을 대비시킨다. 우리는 순간의 반복, 즉 찰나의 적분으로서의 삶의 시간을 갖는다. 순간에는 시간성이 없고, 삶의 시간에는 정지가 없다. '삶의 시간'의 종착점에는 죽음이 있고, 순간에 대한 몰입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사라지게 만든다. 하지만 순간에만 몰입한 인간은 삶의 의미를 상실하고 허무에 빠져들게 된다. 이러한 '부조리'(absurdité)에 대해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는 '우연한 탄생'과 '필연적 죽음'으로 설명한다. 실존주의(existentiallism)적 인간은 의미 없이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가 스스로의 의미를 만들어간다.

그림2.jpg <빛의 제국>, 르네 마그리트, 1954

마그리트는 얼핏 보면 특별할 것이 없는 그림을 종종 그린다. <빛의 제국>은 기묘한 장면이다. 별다른 관찰이 없다면 구름 낀 하늘과 나무들, 집과 가로등을 그린 평범한 작품이다. 이 작품의 기묘함은 '빛'의 존재와 부재가 지시하는 낮과 밤의 공존 상태이다. 마그리트는 시인인 자신의 친구 폴 누제(Paul Nougé, 1895-1967)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빛의 영역에서 나는 밤의 풍경과 낮에 보는 하늘 등 다양한 아이디어를 표현했다. 풍경은 밤을 암시하고 하늘은 낮을 암시 한다. 낮과 밤의 동시성은 놀라움과 매혹을 불러일으키는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것을 힘의 시라고 부른다.>


마그리트는 스스로 "나는 항상 밤과 낮에 가장 큰 관심을 느꼈지만 어느 쪽도 선호하지 않았다"라고 밝힌 적이 있다. 삶에 대한 사랑과 죽음에 대한 동경은 삶을 지속하는 가장 큰 두 가지 힘으로 프로이트는 이것을 에로스와 타나토스에 비유했다.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L'être et le néant, 1943)>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다.


<우리는 천천히 자유의 역설을 감지한다. 자유는 상황에만 있고, 상황은 자유를 통해서만 존재한다. 인간 현실은 어디에서나 자신이 만들지 않은 저항과 장애물에 직면한다. 그러나 이러한 저항과 장애물은 자유 선택과 인간 현실인 자유 선택을 통해서만 의미가 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L'existence précède l'essence)"는 말의 의미이다. 결국 저항과 장애물과 같은 '불편함'이 없이 인간은 '자유'를 누릴 기회를 상실한다. 신세계의 건설자들은 '노화'를 빼앗아 죽음에 대한 공포를 지웠고, '평안'을 제공하여 '독립'의 자유를 박탈했다. 이곳의 사람들은 순간에 갇혀 존재와 부재의 사이를 경험할 수 없다.


[신과 고독]

무스타파는 신세계에서 '신의 존재'를 지우는 법을 설명한다. 다시 말해 신세계는 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인간들의 공동체로 '신의 대체품'을 찾아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철학자들이 하늘과 땅에 있는 수많은 것들 가운데 꿈꾸지 못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이곳, 현대 세계이다. 철학자들은 말했지. 사람은 젊음과 번영을 누릴 때만 신으로부터 독립적일 수 있으며, 독립은 결코 인간은 끝까지 지켜 주지 못한다고, 한데 우리는 지금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젊음과 번영을 누리게 되었어. 그 결과가 무엇이냐고? 우리는 신에게서 독립하게 되었네.”>


중세부터 신학자들은 이상적 세계에 대한 꿈을 멈추지 않았다. 그들이 꿈꿔온 세계는 그들이 살던 시대에 대한 거울로 존재했다. 질병이 창궐하면 건강한 세계를, 전쟁이 만연하면 평화로운 세계를, 기아와 가난 속에서는 풍요로운 세계를 그렸다. 신세계의 설계자들은 어떤 신학자도 떠올리지 못했던 세계를 현재에 구현했다. 상상과 믿음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었던 "하늘의 예루살렘(Himmelisches Jerusalem)"를 땅 위에 건설한 것이다. 이곳에서는 '신'의 품속에서 얻을 수 있는 '젊음과 번영'을 누릴 수 있다. 그리고 더 이상 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 '독립'의 상태에 도달했다. '과거의 신'들은 자신들이 영속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공포를 사용했었지만 이곳에서 공포의 모든 대상은 제거되었다.

그림1.jpg 영화 <메트로폴리스>, 프리츠 랑, 1927

헉슬리가 묘사하는 신세계는 표현주의 영화 <메트로폴리스>에 등장하는 도시와 유사하다. 미래파 예술가들이 그렸던 초고층 빌딩과 자동차로 가득한 속도와 높이의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은 올림포스 신들의 거처와 같다.


(신이 없는 것 같냐는 존의 물음에 대해)
<(무스타파) ”다만 신은 사람에 따라 다른 방법으로 모습을 드러내 보이는 것 같네. 현대 이전의 신은 이 책에서 묘사된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현신했겠지. 그러나 지금은…”
(존) “지금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납니까?”
(무스타파) “글쎄, 부재함으로써 그 자신을 드러내지 않을까?
마치 이 세상에 신이 결코 존재하지 않는 듯이.”
(존) “그게 다 당신 잘못입니다.”
(무스타파) “문명의 잘못이라고 해 두지. 신은 기계와 의학, 또 보편적 행복과는 양립할 수 없는 개념이야. 누구나 하나만을 택해야 한다네. 우리 문명은 기계, 의학, 행복을 선택했어. …”>


이제 신세계에서 신은 '문명'에게 그 자리를 양도해야 했다. 인간의 '믿음'은 신의 현현과 기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닌, 인간의 '편리와 안정'을 보장해 주는 것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이제 신과 문명은 누가 더 큰 효용성을 보여줄 수 있는지의 경쟁으로 접어들었다.


(신의 존재를 느끼는 것에 대해)
(무스타파) <”… 인간이 무언가를 믿는 가짜 이유에 그럴싸한 핑계를 찾아 주는 것, 그게 바로 철학이지. 인간이 신을 믿는 것은 당연한 게 아니라 그렇게 믿도록 훈련받았기 때문이야.”
(존) “아무리 그래도 혼자일 때, 그러니까 캄캄한 밤에 혼자서 죽음을 생각할 때 신의 존재를 느끼고 신을 믿는 건 너무도 당연한…”
(무스타파) “이제는 누구도 혼자가 아니라니까. 우리는 사람들이 고독을 싫어하도록 길들이고, 나아가 고독한 상황에 처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도록 삶을 조정해.”>


문명과 달리 신의 존재는 가상의 효용을 통해 쓸모를 증명한다. 문명은 분명한 원인과 이유를 밝힌다. 때로는 가짜뉴스 혹은 허위 광고를 통한 가상의 효용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이것은 자본주의의 기묘한 획책이다. 가령 2000년경 '육각수'는 마시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만 같은 환상을 심어주었지만, 지금은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육각수는 얼음 결정이 갖는 형태가 물과 공존하는 상태일 뿐 아무런 약재적 효과가 없음이 밝혀졌다. 하지만 이러한 '허위 정보'는 때로는 '플라시보(placebo)' 효과라는 가짜약의 기적적 효과라는 터무니없는 현상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신의 존재'는 마치 이와 마찬가지로 설명할 수 없는 모든 것에 대한 해답으로 굳건히 서있다. 선한 사람의 불행한 삶과 악한 사람의 행복한 삶이라는 부조리는 '신의 의도'라는 접근불가의 영역을 구축하여 마치 현명한 인물은 그 의도를 아는 듯한 허구의 원칙을 정당화했다. 이 원칙을 이해하는 것은 철저한 '자기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자기 이해'는 스스로의 한계를 확인하는 '고독'의 과정을 통해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존은 신세계에서도 야만인 구역에서도 온전한 고독을 느낄 수 없었다.


<존은 우울한 낯빛으로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푸에블로 마음에서는 마을 공동체 활동에서 늘 내쳐져서 괴로웠는데, 문명화된 런던에서는 공동체 활동을 피할 길이 없어서, 도무지 혼자일 시간이 없어서 괴로웠다.>


존이 겪는 것은 소외와 군중 속의 외로움 밖에 없었다. 존은 '자기 이해'를 위한 첫걸음에 대해 무스타파에게 이야기한다.


<(존) “그렇다면 자기부정은 어떻습니까? 신과 함께하는 사람은 자기부정의 근본적인 이유를 찾습니다.”

(무스타파) “자기부정을 하지 않아야만 산업 문명을 존속할 수 있는데! 위생과 경제 상황이 허락하는 쾌락의 최고치를 즐겨야만 바퀴가 멈추지 않고 돌아가지.” … “불안정은 곧 문명사회의 종말을 의미하네.” … “문명사회에서 고귀함과 존엄함 따위 조금도 필요하지 않다네. 그런 것들은 바로 정치적인 비효율의 산물이니까. … 영웅은 극도로 불안정한 사회에서만 출현하기 때문이라네.”>


그것은 '자기부정'으로 현재를 극복하여 새로운 자기를 만나는 과정이다. 자기부정으로 비어버린 허공에 의지를 담아 새로운 자기로 나아갈 수 있다. 이 의지를 '신'이라고 부르는지도 모른다. 무스타파는 '자기부정'은 산업 문명의 적이라고 말한다. 자본시장이 '기대심리'로 굴러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확실성과 불안정은 문명사회를 사는 사람들에게 '과도함'을 불러일으키고, 이 과도함은 야만 상태로 그들이 쌓아 올린 고귀함과 존엄함을 무너뜨린다. Covid-19 시기의 불안정이 사재기를 부추기고, 길거리의 소동과 난동을 일으킨 것과 같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질서, 즉 새로운 안정을 만들어내는 자들을 영웅이라고 칭하고 그들이 가진 가치가 새로운 덕목으로 자리 잡는다.


[불행할 권리]

그렇다면 '자기부정'이 없는 안정의 유지는 가능할까? 신세계가 제시하는 방법은 '자기부정'과 '자기 이해'를 단숨에 해결한다. 그것이 '소마'다.


<(무스타파) “말하자면, 눈물 없는 기독교, 그게 바로 소마인 셈이야.”
(존) “하지만 눈물은 필요한 거예요. 오셀로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 안 나세요?
‘폭풍이 지나갈 때마다 이런 평안이 찾아온다면, 바람아, 죽음이 깨어날 때까지 불어 다오.’ …
“박멸했다고요. 어련하시겠어요? 참고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대신 불쾌한 것은 모조리 제거해 버리는군요. … 당신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이따금 흘리는 눈물 한 방울입니다 … 난 그 편리한 것이 싫다고요. 나는 신을 원합니다. 나는 시를 원해요.
진정한 위험과 자유와 선과 악을 원한단 말입니다. … 내게 불행할 권리를 주십시오.”>


평안은 폭풍이 전제할 때 가능하다. 폭풍 없는 평안은 나태와 지루함이라는 끝없는 침잠을 뜻한다. 존이 지적하듯 신세계는 '폭풍'을 박멸했다. '폭풍'이 사라지자 '나태와 지루함'이 솟아났고, 소마는 새로운 평안으로 향하고자 하는 '자유'와 '의지'를 박탈했다. 존은 '자유'와 '의지'의 복권을 요구한다. 이것이 "불행할 권리"의 의미이다.


버나드와 헬름홀츠 그리고 존은 마지막 인사를 나눈다.


<세 사람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세 사람 모두 가슴 깊이 슬퍼하고 있었지만, 바로 그 슬픔이 서로를 진정 사랑한다는 증거였기 때문에 세 젊은이는 행복했다.>


서로에 대한 미움과 경멸, 시기와 질투의 감정을 나눴던 이들은 서로의 부재를 앞둔 상황에 이르러서야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고 행복을 느낀다. 그들이 가졌던 부정성의 크기에 비례하여 슬픔의 크기도 커졌고, 슬픔의 크기를 통해 사랑의 깊이를 확인할 수 있다. 불행을 쫓던 이들의 뒤에 행복이 뒤따라왔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감람산에서(Auf dem Oelberge)" 행복은 추구하고자 할 때 멀어지고, 멀어지고자 할 때 뒤따라 온다고 말했다. 또한 <안티크리스트(Antichrist)>에서 '행복'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이 감정은 저항을 극복한 힘의 성장이다.>


존은 스스로 도시를 등지고 황야로 나아간다. 하지만 신세계의 사람들에게 존은 이미 가장 흥미로운 구경거리였고, 그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언론은 헬기와 카메라를 동원해 그의 모습을 전했고, 그에게 조금의 고독도 허용하지도 않았다. 구경꾼에 둘러싸인 존에게는 '비자발적 선택'만이 놓여있었다.


<자정이 지나서야 마지막 헬리콥터가 떠났다. 소마에 취한 데다 계속된 관능적인 광분에 지칠 대로 지친 존은 야생화 밭에 쓰러져 그대로 잠이 들었다. 존이 눈을 떴을 때는 해가 이미 하늘 꼭대기에 떠 있었다. … 그러다 갑자기 모든 것이 기억났다, 모든 것이. 존은 손으로 눈을 덮어 버렸다. “오, 하느님! 하느님!” … 천천히, 아주 천천히, 느긋한 두 개의 나침반 바늘처럼, 두 발은 오른쪽으로 향했다가 다시 북으로, 북동쪽으로, 동으로, 남동쪽으로, 남으로, 남남서쪽으로 향했다.>


헉슬리는 존의 극단적 선택을 '나침반'을 통해 시각화한다.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빙글빙글 돌아가는 나침반과 같이 존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정체성에 대한 혼란과 윤리적 방황 그리고 존재의 방향성 상실에 고뇌했다. 사랑하는 레니나와의 관계에서도 육체와 정신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던 존을 통해 헉슬리는 독자들에게 "우리는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예술작품으로 본 존의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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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편: <무제(해골)>, 장 미셸 바스키아, 1981; 오른편: <부러진 기둥>, 프리다 칼로, 1944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백인 예술계에 등장한 최초의 예술가 장 미셸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 1960-1988)는 1981년 무제의 작품을 완성한다. 그의 그림은 낙서를 뜻하는 '그래피티' 미술이라고도 불리며, 신표현주의로 불리기도 한다. 자신 스스로가 "그래피티 예술의 일부가 아니다"라고 말했기 때문에 신표현주의로 해석해 본다면 <해골>은 바스키아 자신을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엑스레이로 찍은 해골의 형상 혹은 기계적인 것들로 가득 찬 머리의 윗부분에 추가로 새겨진 'HEAD OF'가 보인다. 자신의 머릿속을 드러내어 모두에게 보여주고 싶은 이유는 무엇일까? 바스키아는 자신이 아프리카계 흑인이라는 이유로 자신이 원치 않는 관찰자의 시선을 겪어야만 했다. 그가 유명해질수록 비평가와 예술애호가들은 그의 예술적 근원을 "야만인, 야생의 유인원"에서 찾으려 했고, 그가 인터뷰에서 밝히듯 그는 자신을 그렇게 평가하는 모두를 인종차별주의자로 규정한다. 작품 자체에 집중해 보면 상처투성이의 기계적 해골의 모습은 문명에 의해 고통을 받는 인간의 표본이며, 해골은 삶과 죽음의 문제를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적으로 해석할 여지를 준다. 왼편의 검게 칠해진 해골의 표면과 근육의 조직을 표현한 듯한 색채는 외적인 조건에 의해 겪는 흑인으로서의 차별성과 인간으로서의 내적 조건의 동일성에 대한 사회적 시선과 개인의 시선 사이에서 고통받는 두 얼굴을 동시에 드러낸다. 존이 두 세계 모두에 속하지 못하는 '이방인'으로서의 무소속감을 바스키아도 느끼고 있었을 터이다. 한편 프리다 칼로(Frida Kahlo de Rivera, 1907-1954)는 18세에 버스 사고로 쇠막대가 골반을 관통하여 평생을 하반신을 사용할 수 없었다. 22세 되던 1929년 멕시코의 화가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 1886-1957)와 결혼하였는데 그는 그녀보다 21살이나 많은 야심가였다. 정치적으로 혁명 세력으로서의 활동과 잦은 불륜은 프리다 칼로 스스로 자신의 불행한 인생에 대한 선언과도 같았다. 그녀는 자신의 비통한 감정과 불행한 삶에 대한 한탄을 예술로 표현했다. <부러진 기둥>에서 그녀는 황무지 위에 서서 자신을 괴롭히는 외부적 힘에 대해 고독하게 맞서고 있다. 그녀는 내적으로 부서진 신체를 가졌으나 외적으로는 관능미를 유지하고 있다. 당당히 치켜든 얼굴 위로 슬픔의 눈물이 흘러내린다. 자신을 둘러싼 주변과 자신의 운명에 대해 어찌할 수 없는 무기력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협하지 않고 당당히 맞서고자 하는 그녀의 의지를 존의 삶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림5.jpg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 1818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는 산 위에 우뚝 선 한 남자의 뒷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 남자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시 말하면 이 남자는 '아무나'이며 동시에 '누군가'이다. 우리 모두가 될 수 있으며, 그게 나일수도 있다. 이 남자의 운명은 우리 모두의 운명이며, 동시에 나 자신의 운명이기도 하다. 산의 어느 정상에 올라 바라본 풍경은 안개로 뒤덮인 오리무중의 상태이다. 이 방랑자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많은 이들은 이러한 막막함 앞에서 '신'을 찾거나 미지의 존재에게 기도한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단 한순간 그것을 알고 있었다면, 그것은 그러한 착각에 빠졌을 뿐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좌절 속에서 다시 몸을 일으켜 다시 시작할 의지를 갖는 것뿐이다. 프리드리히는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어떤 지역이 안개로 가려지면 더 크고 숭고해 보이며 상상력을 고양시키고 베일을 쓴 소녀처럼 기대감을 불러일으킨다.>


'미지의 땅(terra incognita)'은 불확실한 공포의 땅 혹은 죽음의 땅이 아닌 '기대의 땅', '자유를 향한 의지의 땅'이다. 헉슬리는 '멋진 신세계'를 통해 우리의 현재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두 개의 거울을 제공한다. 하나는 원시적 야만의 거울이고, 다른 하나는 문명적 야만의 거울이다. 어느 한 곳의 거울에 빠져드는 순간 우리는 괴물이 되고 만다. 헉슬리는 이 두 곳과 자유 의지의 한 지점을 통한 삼각측량으로 우리 스스로의 위치를 깨우치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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