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시간과 죽음, 그리고
야만인 구역에서 버나드와 존은 이야기를 나눈다. 버나드는 야만인 구역에 대해 알고 싶어 하고, 그들의 종교와 출산에 대해 궁금해한다. 한편 존은 어린 시절부터 린다에게 들어온 신세계를 동경하고 그곳에 대한 상상으로 현실의 괴로움을 달래 왔다. 둘은 모종의 동질감을 느끼게 된다. 동질감의 정체는 두 사람 모두 자신이 속한 세계에서 별종 취급을 받는다는 것이었고, 이러한 동질감은 서로에 대한 궁금증으로 대화를 이어가도록 만든다. 하지만 둘이 느끼는 동질감은 서로가 처한 상황, 즉 공동체 속에서의 외로움, 타자성일 뿐 그들이 원하는 삶의 방향성은 전혀 다르다는 것이 대화에서 드러난다. 둘의 대화를 통해 신세계가 잃어버린 것과 야만인 구역이 잃어버린 것이 대조적으로 드러난다.
버나드는 자신이 가장 궁금했던 것을 존에게 묻는다.
버나드: ”당신들이 믿는 신이라든가… 늙는다는 것도 그래요. 또 갖가지 질병까지… 이 모든 것이 나로선 상상도 못 할 일들입니다. 당신의 설명이 필요해요. 안 그러면 아마 죽을 때까지 이해하지 못하겠죠.”
존: ”뭘 설명해 달라는 건가요?”
버나드: “이 모든 것을요.”
존: “얘기할 만한 게 있을까요?”
<둘 사이에 꽤 오랜 침묵이 흘렀다.>
존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에 버나드는 의문을 갖는다. 버나드의 의문은 존에게는 "존재하지 없는 영역"이다. 하지만 존에게 당연한 세계는 버나드에게는 "이해 불가의 영역"으로 설명을 요구한다. 신의 존재, 노화, 질명과 같은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에 대해 설명을 요구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대답해 왔을까? 각종 신화들과 철학은 그럴듯한 가정 위에 논리를 쌓아서 이것들을 설명했다. 하지만 모든 가정은 그것이 참일 경우에만 이후 논리가 존재가치가 있으므로 하나의 가능성 이상의 진리성은 담보될 수 없다. 단군 신화와 그리스, 로마의 신화가 어떤 것에 참인지를 다루는 학자는 없다. 다만 신화가 어떠한 세계관을 가정하고 그 속에 삶의 지혜를 숨겨두었는지를 탐구할 뿐이다.
이러한 당연한 질문에 해답을 내놓으려 했던 최초의 신학자는 캔터베리의 안셀무스(Anselmus catuariensis, 1033-1109)였고, 그는 다음과 방식으로 논증을 전개했다.
1. 반대의 가정: 그 이상은 더 이상 생각할 수 없는 것 [즉, 신]은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고 오직 마음속에만 존재한다.
2. 만약 (1)이라면, 그것보다 더 큰 것이 생각될 수 있고 , 그 이상은 더 큰 것이 생각될 수 없습니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3. 만일 생각될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생각될 수 없다면 , 그것 보다 더 큰 것이 생각될 수 없는 것은 더 큰 것이 생각될 수 없는 것보다 더 큰 것입니다.
4. 그 이상으로 더 큰 것이 생각될 수 없는 것은 [(1), (2) 및 (3)에서 포넨스 방식을 두 번 적용하여] 더 큰 것이 생각될 수 있는 것입니다.
5. (4)는 모순되므로 (1) 거짓입니다. 즉, 그 이상은 더 이상 생각할 수 없는 것[즉, 신]은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도 존재합니다.
이러한 신 존재 증명은 이후 토마스 아퀴나스나 데이비드 흄 등에 의해 거부당하기도 했다. 한편 르네 데카르트는 그 유명한 'Cogito ergo sum(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로 존재론적 증명에 뛰어들기도 했다. 결국 신화에 대한 이해를 합리적으로 시도했던 것이 신학이고, 신학의 학문적 접근은 서양 철학의 토대로 오랜 시간 자리 잡았다. 데카르트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cogito', '생각한다'는 말보다 더욱 적합한 번역은 '의심하다'라는 말로써, 가장 근원적인 것에 대한 의문을 던지는 것이었다. 우리에게 너무나도 '당연한' 것은 '설명이 필요 없는' 것이 아니라 '설명하지 않기로' 혹은 '모두가 합의한' 것으로 남겨둔 것이 대부분이다. 데카르트적 '의심'이 없다면 우리는 관성처럼 늘 하던 대로 생각하고 그것을 진리인 양 대하며 지낼 수밖에 없다. 사실상 우리는 '진리'라는 것을 절대불변하는 것으로 생각하거나, 늘 변하는 자연적 상태를 '진리'라고 불러왔다. 하지만 사람들 사이에 벌어지는 무수한 시시비비는 '진리'와는 무관한 '상식'의 문제이고, 자신의 '상식'에 맞지 않는 이들을 '몰상식' 혹은 '무식'이라고 폄훼해 왔다. 존과 버나드의 대화는 서로 다른 두 세계가 서로에 대한 선입견을 장착한 상태에서 이해를 위한 시도를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버나드의 첫 번째 물음에 대한 둘의 결과는 "침묵"이었다. 이 거대한 고요함의 간극은 상식과 상식 밖의 세계 사이의 '소통 불가능성'을 상징한다.
한편 존은 자신을 낳아 기르는 린다와의 일을 떠올린다. 존은 린다의 노랫소리에 잠에 빠져든다. 요란한 소리에 깨어보니 우람한 남성이 린다에게 성관계를 요구하고 있었다. 남자는 존을 다른 방에 넣어 놓고 문을 잠가버렸다. 며칠 후 존이 집으로 돌아와 보니 돈에 여성들이 린다를 공격하고 있었다.
<존은 황급히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검은 담요를 어깨에 두른 여자 세 명이 린다를 공격하고 있었다. … 나머지 한 여자는 린다에게 채찍을 휘둘렀다. … 그날 밤에 존이 린다에게 물었다. “그 여자들이 왜 때린 거예요, 린다?”>
이에 대한 린다의 대답은, <그 남자들이 자기 남편이라고 하더라.>였다. 남성이 린다에게 일방적으로 관계를 요구하는 행위는 7장에서 설명된 '소유'의 개념에 근거한다. 명확한 소유관계에 있지 않은 린다, 즉 남편이 없는 이 여자는 모두의 소유 가능성의 취급을 받는다. 남자들의 부인들이 린다를 구타하는 행위는 그들이 남편에게 '소유'되었기 때문에 소유주인 남성에게 따질 수 없는 상태다. 이 불합리함을 신세계에서는 누구도 누구를 소유하지 않는 것으로 대처했다. 이 두 세계는 각기 다른 '도덕'을 가지고 있다. 각 도덕은 하나의 행위에 대한 '죄와 벌'의 개념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야민인 구역에 사는 사람들의 도덕은 신이 존재하는 곳에서의 도덕률, 즉 실제 우리가 살고 있는 도덕과 유사하다. 우리의 도덕 개념은 전통적 도덕을 이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신세계의 '도덕'이 우리에게 부자연스러운 이유는 그들의 '도덕'은 '합리성'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채찍이 상징하는 '도덕적 규율 와 법'은 맞는 사람이 수용가능할 때 모두의 규칙으로 자리 잡는다. 문제는 '수용가능성'은 '진리'에 기반하는 것이 아니라 관습과 교육에 따른다는 점이다. 니체는 독점적 사랑에 대해 <선악의 저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은 야만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것을 희생시키면서 행사되기 때문이다. 신에 대한 사랑 역시 그러하다.>
니체는 <선악의 저편>에서 선으로 규정된 것을 하나의 진리로 믿는 공동체에서는 이러한 독점적 진리를 소유한 집단만이 선을 규정할 권리를 갖는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 집단은 '능동성'이 덕목이며, 이 능동성으로 '규정하는' 권리를 행사하는데, 이들의 덕목을 '주인의 도덕'이라고 부른다. 반면 '수동성'을 덕목으로 삼으며, 규정된 원칙에 '복종하는' 의무를 수용하는 것을 '노예의 도덕'이라 말한다. 이러한 도덕과 선악의 논쟁은 권력을 소유한 자들에 의해 이루어지므로, 이 규칙을 따르는 자들에게는 규칙을 따른다는 내적 만족감만 주어질 뿐이다. 사실상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의 많은 부조리함을 이러한 절대선은 명쾌한 설명을 하는데 한계가 있다. 니체는 도덕의 기준, 즉 선과 악의 기준은 다양하다는 다원주의적 도덕을 내세운다.
<행복과 미덕은 논쟁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신중한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사람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과 사람을 악하게 만드는 것이 하찮은 반론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경향이 있다. [...] 그러나 진실의 특정 부분을 발견하는 데 있어 악인과 불행한 자들이 더 많은 은총을 받고 성공할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행복한 악인은 말할 것도 없고, 도덕주의자들에 의해 침묵당하는 하나의 종족이 그러하다.>
결국 하나의 도덕만을 진리로 믿는 이들의 만남은 불화와 전쟁으로 종결되는 것을 우리는 역사에서 수도 없이 봐왔다. 존과 버나드와 같이 서로를 이해해 보려는 시도가 실제 역사에서 없었을 리가 없다. 그리고 그들 사이의 평화는 대화가 아닌 힘의 균형으로 유지되고 있음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상대에 대한 존중이 유일한 기준의 붕괴를 인정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한편 존은 린다를 끌어안고 달래주려 했다. 하지만 린다는 존을 밀치며 화를 낸다.
<린다는 존의 빰을 있는 힘껏 후려치며 외쳤다. “어느새 내가 야만인이 되어 버렸어. 짐승처럼 새끼를 낳고… 너만 없었어도 난 감독관을 찾아가 이곳을 탈출했을지도 몰라. 하지만 아이가 있으면 불가능해. 그건 너무 치욕스러운 일이니까.”>
린다는 신세계의 규율을 어겼다. 다시 말해 '악'을 행했다.
아담과 이브는 하느님과의 약속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은 죄로 에단 동산에서 추방당했다. 그들은 죄에 대한 벌로 죽음을 선고받았고, 다시 신의 품으로 되돌아오기 위해 평생 참회와 반성을 해야만 했다. 린다는 추방당하지 않았다. 단지 길을 잃고 야만구역에 머물게 된 것뿐이었다. 그녀의 원죄는 그 이후에 일어났다. 그녀는 아이를 가졌고 낳았으며 길렀다. 그녀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것은 신세계에 원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되돌릴 수 없는 그녀의 죄의 증거가 눈앞에서 자신을 위로한다. 그녀는 자신이 버림받은 이유에 대한 원망과 분노를 존에게 풀 수밖에 없었다.
존은 야만인 구역, 푸에블로 마을에서 어느 노인에게 세상의 창조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어느 노인이 낯선 언어로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도 했다. 천하를 완전히 뒤엎어 새로운 세상을 창조했다는 위대한 인물, 오른손과 왼손의 기나긴 싸움, 장마와 가뭄이 펼친 대결, … 세상을 창조했다는 아워나윌로나, 어머니 대지와 아버지 하늘, … 낯선 언어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기에 존에게는 더욱더 신기하게 와닿았다.>
천지창조에 대한 이야기에 대해 노인은 다양한 신화들을 섞어서 이야기한다. 세상을 창조했다는 위대한 인물의 가장 큰 가능성은 예수일 것이다. 예수는 삼위일체를 통해 창조주와 동격이다. 오른손과 왼손의 싸움은 라틴어로 옳음을 뜻하는 dexter는 영어의 right와 같은 뜻을 가진 '옳은', '오른쪽'으로 쓰인다. 반대로 sinister는 '왼쪽', '서투른', '미숙한', '불행한' 등의 뜻을 가진 단어다. 대부분이 오른손잡이였던 과거에 왼손을 쓴다는 것은 능숙하지 못하고 서툴며, 이러한 미숙함이 불러오는 불행과 외형적 차이 때문에 발생하는 차별이 왼손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오른손잡이의 세계에서 왼손잡이는 악으로 취급받은 것처럼, 만약 왼손잡이의 세계가 있다면 오른손잡이 역시 동등한 대우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 오른손과 왼손의 기나긴 싸움은 서로 다른 기준의 차이 때문에 발생한 갈등을 의미한다. 한 국가 안에서도 옹립하고자 하는 왕세자가 다를 경우에 일어날 수도 있는 정당성의 문제도 이와 다르지 않다. 장마는 축축함, 우울함, 감정적인 것을 나타내고, 가뭄은 건조함, 냉정함, 이성적인 것을 상징한다. 이러한 이성과 감정의 싸움 역시 문명과 야만의 싸움, 나의 합리성과 너의 불합리성의 싸움으로 해석될 수 있다. 아워나윌로나는 아메리카 원주민의 태양의 신을 뜻하는데, 존이 이해할 수 없는 원주민의 신과 잊힌 그리스와 로마의 창조신 가이아와 우라누스 역시 존에게는 신비하게 다가온다. 정말로 신비로운 것은 우리에게 완전히 이해되지 않았을 때 발생한다. 우리가 마술 공연을 감상할 때 그것에 대한 원리를 모두 안다면 신비로움을 발생하지 않는다. 수많은 신화와 미신, 주술들은 이해하지 못할 영역들을 마치 있었던 것처럼 설명하고 그것이 궁극적 궁금증에 대한 첫 번째 가설로 비어있던 해답의 가능성을 어설프게나마 채워준다. 반면 신세계의 이야기는 간단하고 단순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고양이가 매트 위에 앉아 있다. 아기가 유리병에 들어 있다.
(THE CAT IS ON THE MAT. THE BABY IS IN THE POT)>
린다는 존에게 위의 문장으로 글을 알려준다. 간단한 구조와 단어의 저 문장은 내용조차 획일성을 강조한다. 제멋대로의 성향을 지닌 고양이가 지정된 매트 위에 앉아 있고, 아기는 통제된 유리병 속에 들어 있다. 이 세계에서는 어떠한 신비함도 존재할 수가 없다. 모든 것이 이해되기 때문이다. 글을 아는 존은 우연히 셰익스피어 전집을 손에 넣는다. 린다가 술에 취한 밤 존은 <햄릿>의 3막 4장의 한 구절을 읽게 된다.
<‘하지만, 계속 그렇게 살아갈 거잖아요. 역겨운 땀내와 기름이 뒤범벅된 이불속에서 돼지 같은 놈과 시시덕거리며 밀어를 주고받고...’
존은 이 문장들을 읽고 머릿속에 천둥이 치는 듯했다. 존은 이 글을 반정도만 이해할 수 있었다. 이해되는 것과 이해되지 않는 것이 섞인 상태. 신비로움이 존재할 수 있는 이해가능한 공간, 셰익스피어는 존에게 이해가능한 신비로움이라는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 더 놀라운 점은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던 셰익스피어의 이야기가 자신의 어머니 린다에 관한 이야기라는 사실이 그를 놀라게 했다. 존은 린다에 대한 이야기, 린다와 포페에 관한 이야기하고 생각했다. 그것은 친부가 아닌 자가 어머니의 남편과 같은 역할로 등장한 것이 포페였고, 이 이야기 구조가 햄릿의 그것을 닮아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개별적 이야기를 문학 작품에서 읽은 내용과 유사함을 느낄 때 짜릿함을 느낀다. 이 순간이 자신의 개별성이 보편성으로 인정받는 순간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존은 햄릿을 통해 자신이 가진 포페에 대한 미움의 정당성을 만들었다.
<존은 포페가 점점 더 미워졌다. … 지금껏 포페를 진정으로 미워한 게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 그 단어들로 엮은 신기하고도 멋진 이야기를 완벽히 이해할 수는 없어도, 존이 포페를 미워해야 할 이유는 충분히 만들어 주었다. 덕분에 포페에 대한 존의 증오심은 점점 더 현실이 되어 갔다. 포페라는 인간의 존재를 더욱더 실감하게 되었다.>
존은 햄릿과 스스로를 동일시하여 햄릿의 분노의 이유를 자신의 분노의 이유로 수용했다. 이러한 납득가능한 분노는 현실화되고 포페라는 인간에게 덧씌워졌다. 이제 포페는 자신의 분노의 화신으로 실체화되었고 존은 그를 칼로 찌른다. 상처 입은 포페를 본 존은 그 순간 자신의 망상과 포페가 분리됨을 느끼고 눈물을 흘린다. 포페는 웃음을 보이며, 원주민의 언어로 말한다. "가라, 가. 용감한 전쟁의 신아."
포페가 원주민의 언어로 말한 것은 존이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존의 인식능력으로는 자신에게 해를 가한 상대에 대한 웃음과 사랑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존이 다른 원주민 아이들과 같이 성인이 되기 위한 과정에 참여하려 하자 한 남자가 존을 제지하였고, 여기저기서 돌팔매가 이어져 존은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존은 외톨이가 되었다는 느낌을 받았고, 그것은 피가 흘러내리는 외부의 상처 때문이 아니었다.
<존은 달을 등진 채 벼랑 끝에 앉아 깊은 골짜기의 칠흑 같은 그림자를, 죽음의 그림자를 내려다보았다. 딱 한 발짝만 내디디면, 살짝만 몸을 기울이면… 죽음의 빛 속에서 색을 잃어버린 시커먼 피가 계속해서 배어 나왔다. 뚝, 뚝, 뚝. 내일, 또 내일, 또 내일… 그날 존은 시간과 죽음, 그리고 신을 만났다.>
프로이트의 '죽음충동(Todestrieb)'은 삶을 이어가고자 하는 생에의 의지인 '에로스'에 대비된 죽음의 신' 타나토스'를 나타내는 개념이다. 생명을 창조하고 사랑하는 감정과 달리 '죽음충동'은 생명체를 파괴하려는 욕구, 나아가 자기 파괴적 모습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존이 느끼는 감정은 공동체에서의 소외와 억압된 체제에 대한 자유의 갈구이다. 이 순간 존은 자신이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이 없음을 깨닫고, 공동체와 자신이 공존하는 것에 불가능하다는 것을 시인한다. 그가 자신의 정체성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죽음을 통해서일 뿐이고, 죽음은 고통의 시간의 끝이자, 영원의 시간이 시작이고 영원의 시간에서 자신에 대한 아가페적 사랑을 보여줄 신과의 만남을 보장한다. 결국 존은 사회적 죽음에 대한 공포에 대해 정체성의 보존을 위한 죽음을 택하고자 하는 충동을 느꼈다. 이 말을 들은 버나드는 누구보다 존을 잘 이해한다. 그들은 사회의 타자로서 서로의 위치에 대한 공감을 찾았다. 그리고 둘은 함께 런던으로 가기로 한다. 그곳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다는 부푼 꿈을 가지지만, 사실상 그들의 바람은 서로 다르다. 그들이 겪는 '소외'의 감정은 '사회 부적응자'가 느끼는 감정인데, 다른 사회에서 느끼는 그들의 '소외'의 감정은 이야기 속에서만 일치할 뿐이다. 존은 레니나를 얻기 위해 런던으로 가고자 하는 마음이다. 존은 버나드에게 묻는다.
<혹시 레니나와 결혼하셨나요?>
<뭘 했냐고요?>
<결혼이요. 그러니까 영원.... 원주민 언어로 '영원'이라고 합니다. 절대로 깨뜨릴 수 없는 약속이지요.>
<포드님, 맙소사! 절대로 아닙니다!>
버나드가 웃음을 터뜨리자 존도 따라 웃었다. 하지만 존이 웃는 이유는 버나드와 달랐다. 그야말로 순수한 기쁨에서 우러나오는 웃음이었다.
둘의 차이는 그들이 적응하지 못한 각자의 도덕을 기준으로 했을 때 드러난다. 그들의 '소외'가 다른 성질의 것임은 이러한 '구체적인 상황'이 주어졌을 때 드러나는 것이다. '영원'이라는 개념은 신의 존재, 즉 신비함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긍정적인 표현이지만, 유물론적 사고를 지닌 신세계에서는 허황되고 어처구니없는 어리석음의 표현일 뿐이다. 이곳의 긍정성이 저곳에서는 부정성이 될 수 있다. 선악의 저편에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