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무모한 도전
레니나는 버나드와 함께 야만인 구역 말파이스로 향한다. 이 여행을 떠나게 된 이유는 버나드에 대한 레니나의 관심 때문이다. 레니나는 버나드를 "이상하고, 이상하고,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녀는 그에 대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버나드에 대한 관심과 그와 함께 야만인 구역으로 떠나는 여행이 그녀의 "무모한 도전"이다. 버나드는 시련과 고통을 쫓으려 한다. 신세계가 제공하는 소마를 통한 시련과 고통의 제거가 아닌 "자기 내면에 잠재된 힘만으로" 시련과 고통에 맞서고자 하는 마음가짐이 버나드의 "무모한 도전"이다.
레니나가 버나드에게 관심이 가는 이유는 버나드에 대한 이해하지 못할 부분 때문이다. 패니는 버나드의 기이한 행동과 부족한 외형의 원인을 단 한 가지로 정리한다.
"대체 혈액에 알코올이 들어가서 그래."
현상에 대한 명료하고 분명한 분석이다. 하지만 그것이 현상에 대한 완전한 파악은 아니다. '만약' 혈액에 알코올이 들어갔다면 '그럴 법한 일'이다. 이런 가정의 토대 위에 원인을 특정 짓는 것을 '고정관념' 혹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라고 부른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참이 되는 일을 모두에게 참이 된다고 판단하는 사고의 전형이다. 이러한 사고는 사태에 대한 간편한 이해를 돕기 때문에 '불안'을 잠재울 수 있다. 하지만 원인에 대한 명확한 규명을 방해하기 때문에 잠재적 위험을 방치하는 격이다. 버나드에 대한 레니나의 관심은 원인에 대해 조금 더 접근한다.
<나쁜 사람은 아닐지 몰라도 상대방을 불안하게 만드는 사람인 건 분명했다. 우선, 그 이상한 남자는 모든 일을 혼자 하려고 들었다. 그것은 사실상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사람이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는가.>
버나드가 '불안'을 유발하는 이유는 모든 일을 '혼자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의 의도와 목적은 공유되지 않기에 예측될 수 없다. 예측될 수 없는 일은 '불안'을 초래하기 때문에 공동체의 생산성에 위해를 가할 수 있다. 신세계의 설계자들은 철저한 안정성의 토대 위에서 개인의 활동을 허락하도록 설정해 두었고, 이 사회의 업무 방식은 철저한 '분업'시스템이다. 분업은 개인이 공정의 일부만을 담당하도록 하기 때문에 전체 공정에서 개인을 소외 상태에 빠뜨린다. 마르크스는 포이에르바흐의 <기독교의 본질(Das Wesen des Christentums, 1841))>을 바탕으로 <1844년 경제학 철학 수고(Ökonomisch-philosophische Manuskripte aus dem Jahre 1844)에서 '소외' 개념을 설명한다. 생산 수단을 독점한 자본가들 사이의 경쟁에서 노동자들은 최대 잉여 가치를 창출하기 위해 착취되고, 이 과정에서 기계적 부품으로 전락한 인간성의 상실에 의해 인간은 '노동에서의 소외'되고 그들의 노동은 '소외 노동(entfremdete Arbeit)'이 되고 만다. 작업 공정 전체에서 노동자는 언제든 대체 가능한 자원이 되었고, 자연에서 채취된 자원에서 최종 생산물에 이르는 전 과정에서 노동자는 소외되고 최소한의 보람을 느끼기조차 힘들게 되었다. 이러한 노동에서의 소외는 자본가를 제외한 최하층 노동자부터 관리자에 이르는 전 계층에서 발생한다. 노동의 '대체 가능성'은 노동자 계층 전체에 고용 상태의 불안을 초래하게 되었고, 고용 불안은 사회 내에서 희미해진 자신의 역할을 인식하고 자신의 존재 가치에 대한 불안으로 이어졌다. 결국 인간을 '쓸모'와 '목적'으로 평가하는 사회에서 개인은 공동체를 위한 기여도에 따라 존재의 불안을 이겨내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시대의 변화와 노화로 인해 이러한 불안의 극복은 개인적 차원에서 극복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났다.
칸트는 <윤리형이상학 정초(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 1785)>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Handle so, daß du die Menschheit sowohl in deiner Person, als in der Person eines jeden andern jederzeit zugleich als Zweck, niemals bloß als Mittel brauchest."
(너 자신에게 있어서건, 타인에게 있어서건 인간을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고, 절대로 단지 수단으로 대하지 말라.)
이것을 자기목적규칙(Selbstzweckformel)이라고 하며, 윤리적 측면에서 인간을 쓸모에 따라 평가하지 말라는 의미다. "필요할 때에만 찾는" 사람은 쓸모가 사라진 사람에게 눈길을 주지 않는다. 좋은 공동체는 쓸모가 없어진 사람에게 기회를 주고 자신의 쓸모를 찾기를 격려하는 사회일 것이다. 반대로 "필요할 때라도 자신을 찾아주기를 바라는" 사회에서는 부모가 자녀에게 상속권을 빌미로 자발적 효를 강요한다거나(비자발적 자발성), 어떠한 대가로 친구 혹은 연인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는 비참함이 자주 발견될 것이다. 인간을 수단으로 대한 결과는 타인에게 자신의 가치를 끊임없이 증명해야 하는 피로감과 그 속에서 발생하는 자기 상실이다. 자신의 가치를 타인의 평가에만 의존해야 할 때 우리는 에리히 프롬이 말하는 '자기 소외(self-alienation)'에 빠지게 된다. 수많은 타인에게 맞춰진 나의 모습, 에리히 프롬이 인격의 상품화라고 지적하는 상태에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생소함을 느끼는 공허함에 빠지게 된다. 신세계에서 버나드는 레니나와의 대화를 통해 큰 차이점을 느끼게 되는데, 그가 바라는 것은 '의미 없는 대화', 즉 '무목적적 대화'이다.
<몇 시간이고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자니 … 레니나는 남자와 여자가 오후 시간을 보내는 데 그보다 더 이상한 방법은 없을 듯했다.>
버나드는 대화 자체가 목적인 대화를 원한다. 이 대화에서 참가자는 서로에게 목적 그 자체가 되며, 참가자를 통해 무엇인가를 얻고자 하는 또 다른 목적이 없다. 하지만 레니나는 남녀 간의 대화는 다음 단계를 위한 과정 혹은 정보 교환의 수단일 뿐이다. 그녀에게는 의미 없는 대화보다 '에스컬레이터 스쿼시'같은 운동을 위한 파트너라도 되는 것이 목적론적, 다시 말해 가치 있는 행위일 것이다. 그녀의 합리성은 버나드에게는 일종의 감옥과 같이 느껴졌고, 버나드는 이성의 감옥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낀다.
버나드와 레니나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태도의 차이, 나아가 버나드가 신세계에서 벗어나고픈 충동은 '소마로부터의 자유'이다. 버나드는 앞서 수차례 소마를 거부했다. 이번 장에서 그는 소마를 거부하여 얻고자 함을 이야기한다.
<”난 그냥 나 자신으로 남아 있을래요. 이렇게 심술궂어도 나 자신 그대로요. 아무리 즐거워도 남이 되고 싶지는 않아요.” / “제때 먹는 소마 한 알이 뒤늦게 먹는 아홉 알보다 낫다는 말도 있잖아요.” 레니나가 수면 학습으로 얻은 보석 같은 지혜를 뽐내며 말했다.>
레니나는 '수면 학습'으로 얻은 지혜, 즉 문제의 발생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방법을 택한다. '소마'는 부정적 감정을 없애준다. 소마를 통해 감정의 원인에 대한 접근은 요원해지는 것이다. 근대인들이 해왔던 방식, 문제가 있는 부분을 도려내는 외과적 수술법은 원인에 대한 제거라기보다는 문제에 대한 부정을 통한 문제 자체에 대한 거부에 가깝다. 버나드는 문제를 인식하는 것에 자신을 지키는 것임을 안다. 모두가 즐거운 곳에 자신이 없음을 아는 지혜, 즉 괴테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말하듯 지식과 지혜는 누구나가 가질 수 있지만 감정은 온전히 자신만의 것이라는 것을 자각하는 지혜이다.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비이성, 심술궂음, 제멋대로의 임의성, 혼돈, 이드(id) 등이 위치한 곳, 즉 모든 시간의 내가 숨어있는 심연이야말로 '나 자신'이 있는 곳일 터이다. 버나드는 문제의 해결을 위해 심연으로 뛰어들고자 한다.
<”난 고요하고 평화롭게 바다를 보고 싶어요. 저런 잡소리(라디오소리)를 들으면서 어떻게 바다를 감상할 수 있겠어요?” / “하지만 듣기 좋은 노래잖아요. 그리고 난 바다를 보고 싶지 않다고요.” / “당신이 이해할지 모르겠지만, 내가 좀 더 나다워지는 기분이 들어요. 다른 무언가에 종속된 존재가 아니라 오롯이 나 자신으로 존재하는 기분이요. 거대한 사회의 하찮은 세포가 아니고.” >
바다는 혼돈(Chaos)의 상징이다. 라디오는 질서의 소리(cosmos)이다. 버나드와 레니나가 겪는 갈등은 자연과 문명에 대한 태도에서도 드러난다. 버나드는 질서의 근원인 혼돈을 목도하고자 하지만 레니나는 일정한 주파수 내에서 전달되는 질서의 노래에 귀 기울이려 한다. 질서는 혼돈을 이해하지 못한다. 혼돈이 스스로를 질서에게 설명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질서는 자기 완결성을 지니고 스스로를 설명하지만 혼돈에게 그것은 전체에 대한 일부에 불과하다. 버나드는 레니나가 이해할 수 없음을 안다. 질서에 종속된 노예로서의 존재가 아닌, 질서로부터 해방된 자유로운 존재로서 버나드는 '사회의 하찮은 세포'가 아닌 온전한 자신이 되고자 한다. 카오스의 어원은 '비어있음'인 동시에 '갈등'이라는 뜻도 있다. 버나드는 내적 갈등을 통한 '나의 창조'를 바란다.
<만일 그런 말을 자유롭게 해도 되는 세상이라면, 사회 기능 훈련을 통해 우리 모두 노예가 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 레니나, 자유로워지고 싶지 않나요? … 모두가 똑같은 방식이 아니라 당신만의 특별한 방법으로 말이에요.>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예외 없는 상태는 완전한 구속 상태, 즉 노예 상태이다. 민주주의의 시민은 의무만을 가진 존재가 아닌 권리를 가진 자다.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어 보이는 이성적 의무는 우리를 자발적 노예 상태로 만들지만, 입법자로서의 주권의 행사는 우리를 또 다른 의무를 만드는 창조자, 즉 주인 상태로 만든다.
레니나와 버나드 모두 현재의 고통을 겪는다. 하지만 둘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현재를 즐긴다'. 레니나는 현재의 고통에 무통주사를 맞음으로써 고통 자체를 부정하여 현재의 즐거움을 찾는다. 반면 버나드는 고통을 겪었을 때 주어지는 강렬한 보상을 바란다.
<’레니나는 스스로를 이런 식으로 평가하는구나. 기꺼이 고깃덩이가 되겠다는 거로군. … “오늘의 즐거움을 절대 내일로 미루지 마세요.” / (버나드) “나는 열정이 뭔지 알고 싶어요. 뭔가 강렬한 감정을 느껴 보고 싶다고요.” 레니나가 딱 잘라 말했다. “개인이 감정을 느끼면 공동체가 흔들려요.”>
레니나에게 고통은 그저 굳이 겪을 필요가 없기에 소마를 통해 '빠르게 감기'로 시간을 보내 버리려 한다. 그녀가 말하는 "오늘의 즐거움"은 carpe diem에 대한 1차원적 해석이다. "오늘에 대항 긍정"이 아닌 "즐거움"에 방점이 찍히는 순간 '한순간도 즐겁지 않으면 안 되는 당위적 행복'을 추구하게 된다. 기본값이 행복이라면 그것은 행복이 정지된 어떠한 상태를 뜻한다는 의미이고 행복에서 조금이라도 변화가 생기는 순간 즐거움은 괴로움 혹은 불안으로 돌변하고 만다. 이것은 "모든 오늘"에 대한 긍정이 아니라 "모든 순간의 오늘화"라고 부를 수 있다. 오늘 누리는 행복을 최대한 유지하려는 겁쟁이의 발버둥에 불과하다. 버나드는 도전정신이 결여된 육체적 경험의 반복 상태를 '고깃덩이'에 비유했다. 버나드는 괴로움을 피하려 하는 레니나의 태도를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어른답게 참고 기다리는 대신 젖먹이 어린아이처럼 곧바로.”
어른은 책임감(responsibility)을 갖는 존재이기에 어린아이와 다르다. 주어진 시련과 고통, 문제점에 대해 대답(respond)하는 것이 어른이다. 레니나는 대답하기를 거부하고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식의 대답을 한다. 오늘의 즐거움을 내일로 미루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하지만 내일의 즐거움을 오늘 모두 끌어다 쓸 필요는 없다. 버나드가 말하는 "어른답게"라는 말의 의미는 행복을 향해 떼쓰지 않고, 그것이 다가오는 모든 순간을 즐기는 행복, 어린 왕자를 기다리는 사막 여우가 왕자의 방문 1시간 전부터 느끼는 온전한 행복이다.
<”과거에 이랬다면, 미래에 이렇다면, 이런 얘기들은 골치만 아플 뿐이에요. 그럴 땐 소마를 먹고 다시 현재를 살아요.” 결국 레니나는 버나드를 설득해 소마를 네 알이나 먹였다. 오 분이 지나자 과거라는 뿌리와 미래라는 열매는 모두 사라지고, 현재라는 꽃송이만 장밋빛으로 화사하게 피어났다.>
소마를 복용한다는 의미는 삶에서 즐거움이 있는 시간만을 살고자 하는 태도, 즉 영화나 소설의 요약본만을 감상하는 태도를 말한다. 소위 '스킵(skip)'의 관점으로 삶을 바라본다면 타인의 인내와 노력은 성공과 이어질 때만 가치 있어 보이는 착시를 만들어낸다. 끊임없는 실패는 끊임없는 성공으로 다가서는 것임을 알지 못하게 된다. 끊임없는 성공은 모든 실패의 과정에 존재함을 깨닫지 못하게 된다.
가장 현명한 왕 시시포스는 자신의 영민함으로 모든 시련을 이겨왔고 죽음의 위기에서 조차 벗어났다. 하지만 인간의 운명은 늘 그렇게 피해오던 죽음을 향해있다. 결국 다시 신 앞에 선 그는 지하세계에의 가파른 길에서 영원히 돌을 밀어 올리는 벌을 받는다. 알베르 까뮈 (Albert Camus, 1913-1960)는 <시지프의 신화>(1942)에서 이 형벌을 '실존주의'와 '부조리'의 관점에서 이야기한다. 태어났지만 죽음을 늘 향해있는 인간 삶의 부조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초자연 존재에 기대는 방법밖에는 없다. 삶의 피할 수 없는 부정성, 즉 죽음을 수용하는 것을 종교는 부정해 왔다. 그들은 내세를 만들었고, 윤회를 만들었다. 그들이 얻을 수 있는 것은 '필연적 죽음에 대한 망각' 뿐이다. 소마를 먹은 레니나와 버나드가 겪는 과거와 미래의 소멸은 '쾌락주의(hedonism)'적일 따름이다. 철학자 니체는 삶에서의 부정성에 대해 'amor fati(아모르파티)'라는 대답을 내어놓았다.
<인간에게서 말할 수 있는 위대함에 대한 나의 표현은 아모르파티다. 이것은 달리 원하지 않는 것, 앞으로도 뒤로도, 영원히. 그러나 아모르파티는 필연적인 것을 그저 견뎌내는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감추는 것은 더욱더 아니다. 모든 관념론은 필연적인 것 앞에서 허위다. 아모르파티는 필연적인 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버나드가 그토록 바라는 "자기 내면에 잠재된 힘만으로" 시련과 고통에 맞서고자 하는 마음가짐은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는 아모르파티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 도전은 언제나 무모하고, 언제나 실패로 돌아가며 그렇기에 언제나 가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