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과잉과 미흡 사이
<과잉과 미흡 사이>로 이름 붙여진 4장은 개인이 타고난 재능과 갈고닦은 능력에 대한 자신과 타인의 판단에 관한 이야기이다. 모든 부분에 있어서의 과잉이라 불릴 만큼 모든 것을 타고난 헬름홀츠와 뛰어난 지성에도 불구하고 신체적 미흡을 가진 버나드 마르크스는 각각 자신의 과잉과 미흡에 의해 각자의 '고립감'에 빠져든다. 정신적, 신체적 과잉 상태에 있는 헬름홀츠와 신체적 결함에 대한 콤플렉스 상태에 있는 버나드는 왜 자신들의 모습에 불만족하며 고독을 느끼게 될까?
플라톤의 향연에서 아프로디테의 생일날 초대받은 빈곤의 여신 페니아(Penia)는 술에 취해 풍요의 신 포루스(Porus)를 유혹한다. 이 둘의 결합으로 태어난 신이 에로스(Eros)다. 에로스의 탄생에 대한 여러 신화가 있는데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카오스와 가이아와 함께 태초의 신이라는 설과 아프로디테와 아레스, 즉 사랑과 전쟁의 결합으로 태어났다는 설이다. 플라톤의 향연에서는 사랑을 '풍요과 빈곤 사이'로 설명한다. 너무 모자라도, 너무 지나쳐도 사랑이라 불릴 수 없다. 사랑은 늘 너무 지나치지도 않고, 너무 모자라지도 않을 때 유지된다. 그것이 집착과 무관심을 사랑이라 부를 수 없는 이유다. 과잉과 미흡은 풍요와 빈곤의 다른 말로 결국 사랑의 시작과 과정, 그리고 끝은 과잉과 미흡, 풍요와 빈곤 사이의 운동으로 설명될 수 있다. 사랑의 시작은 운동의 시작이고 사랑의 끝은 운동의 끝, 즉 정지상태다.
<멋진 신세계>에서 버나드와 헬름홀츠는 각자의 과잉과 미흡을 겪는다. 그들이 겪는 증상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살펴보자. 이 둘은 신세계의 사회구조에서 발생하는 정체성의 위기에서 발생하는 소외감을 공통적으로 느끼고 있다. 버나드는 외적으로 드러난 신체적 결함으로 인한 콤플렉스, 즉 타인의 시선에 대한 불쾌감이 자신의 의식을 억압하는 작용 한다. 이 콤플렉스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의문을 품도록 하고, 거기서 생겨나는 분노와 좌절은 타인에 대한 경멸과 권위적 행동으로 이어진다. 한편 헬름홀츠는 정신적, 육체적 조건에 있어서 모두 과잉상태에 있다. 모든 조건을 갖춘 그가 느끼는 소외감은 지적 소외감으로 창의적인 표현 욕구가 억제된 데에 기인한다. 그의 창작욕구는 타인의 인정과 칭찬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그를 소외로부터 구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의 인정뿐이다. 그렇다면 과잉과 미흡으로부터 자유로운 자는 어떨까?
<사람들은 베니토를 두고 소마 없이도 잘 살아갈 사람이라고들 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든 벗어나려 안간힘을 쓰는 악의나 심술 같은 감정이 전혀 없어 보였다. 베니토에게 이 세상은 늘 아름답고 평화로운 곳이었다.>
과잉과 미흡은 타인의 평가나 절대적 기준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 “늘 행복한 자”, “소마 없이도 살 사람” 베니토 후버는 과잉과 미흡에 근접한 적이 없다. 양쪽 경계를 인지하지 못하는 자는 행복하다. 이 행복의 다른 이름은 “완전한 사육”이다. 이들이 느끼는 행복의 정체는 헨리와 레니나가 듣는 음악에 잘 드러난다. “안정”, 그것은 신세계가 표방하는 행복으로 감정적 ”정지상태“, 즉 ”사랑의 부재“를 뜻한다. 히에로니무스 보스는 <쾌락의 정원>의 에덴동산 부분의 하단부에 검은 연못을 그려 넣었다. 이 오염된 연못으로부터 갖은 기괴한 생명체가 기어 나오고 있다. 오염되지 않은 순수 상태의 에덴동산은 '완전한 상태', '행복의 상태'를 표상한다. 하지만 선으로 가득 찬 그곳에서 아담과 이브는 유혹은 당하고 악을 행한다. 히에로니무스 보스는 에던동산에도 악이 있었음을 고발한다. "늘 행복한 자"는 소마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소마"는 에던 동산의 주민이 제공한 에덴동산의 결함의 증거이다. 과잉을 경험한 적 없는 자는 관심과 집착을 구분하지 못하며, 미흡을 경험한 적 없는 자는 필요와 욕구를 구분하지 못한다. 사랑은 집착과 무관심 사이의 관심과 욕구의 감정이다.
버나드는 알파 플러스로 인정받는 정신적 능력과 델타 계급 이하로 평가받는 신체적 조건 사이의 괴리감에 시달리고 있다. 그는 자신이 속한 계급에 대한 정당성과 부당함을 모두 인정하기에 어디에나 속하지만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고통을 겪는다.
<나는 나다, 그런데 내가 아니고 싶다. 버나드의 자의식은 언제나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다. 델타 계급의 얼굴을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높이에서 바라볼 때마다 심한 굴욕감에 휩싸였다. 과연 저들은 나를 내 계급에 맞게 존경심을 담아 대하고 있을까? 그런 의문이 버나드의 머릿속을 한시도 떠나지 않았다.>
'나'는 '내가 인정하는 나'와 '타인이 인정하는 나'로 나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보자면 '내가 생각하는 나'와 '타인이 생각할 것이라 여기는 나'로 구분된다. 뛰어난 지능으로 알파 플러스임을 인정받는 버나드이지만 신체 조건의 미흡이 만든 콤플렉스로 인해 '내가 인정하는 나'는 '타인이 생각할 것이라 여기는 나'의 공격을 받는다. 버나드는 자의식의 고통을 느끼는데 이 고통의 정체는 자신이 속하는 계급에 대한 자신과 타인의 인정에 대한 의구심이다.
<버나드가 호감을 표시했던 여자들이 비웃음을 흘리거나, 같은 계급의 남자들이 버나드를 두고 짓궂은 농담을 던지는 것 역시 같은 맥락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바로 그런 조롱이 버나드를 이방인으로 만들었다. 버나드 스스로 이방인처럼 굴기도 했다. 그럴수록 편견은 더욱더 굳어졌고, 버나드의 신체적 결함 때문에 생겨난 경멸과 적대심도 심해졌다. 결국 버나드는 이방인이자 외톨이라는 생각에 갇혀 지내게 되었다. 어떤 경우에서든 무시당할지 모른다는 만성적인 두려움은 버나드 스스로 같은 계급 사람들을 멀리하게 만들었다.>
이 의구심은 언제든 무시받고 버려질 수 있다는 '만성적인 두려움'을 낳고, 이 두려움은 타인에 대한 경멸과 적대심으로 이어진다. '이방인'은 겉으로 드러난 자신의 외적 조건에 의해 관찰자의 선입견을 작동시킨다. 관찰자는 이방인의 행동을 선입견을 통해 판단하고 이해한다. 때로는 관찰자의 문화적 공간에서 이방인은 '환대'를 받는데 이러한 태도를 '사회적 관용', 즉 '똘레랑스(Tolerance)'라고 부른다. 이방인, 즉 타자와 타자성에 대한 존중은 이질적인 집단 사이의 평화적 공존을 가능케 한다. 하지만 이것은 안과 밖에서 무너지기 쉽다. 이방인이 가지고 있는 콤플렉스는 타자의 관용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고, 그들의 무관심을 바라게 만든다. 다른 한편으로 위축되거나 과장된 이방인의 행동은 원주민들의 거부감을 자아내기도 한다. 이렇게 이방인 마르크스는 자신의 섬에 갇혀 접근하는 이들에게 경계심을 갖게 된다.
미흡한 자와 완벽한 자의 고뇌는 '고독'으로 수렴한다. 완벽한 자라는 헬름홀츠에 대한 수사는 타인의 평가에 의해 증명된다.
<'지나치게 유능해서 문제지.’ 사실이 그랬다. 지나치게 유능하다는 그들의 말은 정확했다. 헬름홀츠에게 정신적 능력의 과잉은 버나드의 신체적 결함이 미치는 영향과 매우 흡사한 양상을 띠었다. 버나드는 유난히 작고 마른 몸 때문에 외톨이가 되어 버렸다. 최근의 기준에 따르면 이런 소외감은 정식적 과잉 상태와 마찬가지로 버나드를 고립시키는 결과를 빚었다. 반면에 헬름홀츠는 거북할 정도로 자기 자신을 의식한 나머지 점점 고립감에 빠져들었다.>
그의 완벽은 '지나친' 유능함으로 정지 상태인 만족과 안정으로 향하지 않았다. 그의 '지나침'이 문제를 만들었고, 이 문제의 양상은 타인에 대한 시선을 거두고 자신에 대한 과도한 의식을 통해 버나드가 느끼는 고립감에 스스로를 몰아넣었다.
<“네가 쓴 글들은 다 훌륭하잖아, 헬름홀츠.” / (헬름홀츠) “뭐, 겨우 봐줄 만한 정도지. 그걸로는 부족해. … 공동체 노래니, 향기 오르간의 최신 동향이니 하는 것들 것 대해 제아무리 날카롭게 쓴들 무슨 소용이겠어? 그런 글이 강렬한 엑스선처럼 사람의 마음을 꿰뚫을 수 있겠느냐고. 그 따위 시시콜콜한 것들로는 대단한 글을 쓸 수가 없어. 내 고민의 본질은 바로 그거야. 노력하고 또 노력하지만 … “>
사회가 요구하는 창작물을 만들어내고 구성원의 인정을 받더라도 단 한 사람의 인정이 결여되어 있다. 버나드는 모두의 인정을 원하지만 헬름홀츠는 한 사람의 인정을 원한다. 그는 바로 '자기 자신'이다. 헬름홀츠의 고민의 본질은 자신이 인정할만한 창작물이다. 만약 헬름홀츠의 창작물에 대해 대중의 평가가 나뉜다면 그는 나머지 대중의 인정을 필요로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절대다수의 지지를 받는 창조자는 이제 세계의 지배자로 군림했고, 그의 세계가 완벽하기를 바라게 된다. 하지만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완벽'이라는 상태는 모든 순간 자신의 시선과 현재 상태의 거리를 자각하게 만든다. 끝없이 도달할 수 없음을 매 순간 자각하는 헬름홀츠는 매 순간 자신의 무력함은 자각한다. 그가 느끼는 고민의 본질은 자기애에 도달하지 못하는 영원한 채찍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