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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반짝 Jun 20. 2022

꽃 가면의 그림자


"엄마는 이중인격자야."

무람없이 외치는 아이의 말에 반사적으로 얼굴이 뒤틀린다. 쉬이 용인하지 않자 아이는 거침없이 항변한다.

“우리한테는 기분대로 짜증내지 말라고 하면서 엄마는 기분 나쁘면 바로 짜증내잖아.”

“맞아. 엘리베이터에서 인사할 때만 착하게 말하잖아! 전화 받을 때랑.”

“우리한테 화풀이하는 거잖아. 치사하게.”

열두 살 난 딸아이의 유려한 항변에 열 살 난 아들까지 근거를 들이밀며 합세한다. 완벽한 세트플레이. 티키타카의 합이 완전무결해 수비 태세를 갖추기도 전에 정신없이 골을 먹고 말았다.


들켰다. 상냥한 가면을 쓴 사회적 자아를 연기했지만 내면의 그림자를 들키고 말았다. 아이들에게는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하지 말라고 가르치면서 정작 기분대로 짜증을 퍼붓는 엄마.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 친절하게 인사하지만 현관문을 열고 집에 들어서면 표정이 사라지는 엄마. 논리적 모순을 짚어내는 아이들에게 비논리적 분노로 맞서는 엄마. 나열하고 보니 저열하기 그지없다. 타인에게 보여주지 않는 나. 나만 아는 나. 그것은 빛이 들이치는 곳에서 그림자로 숨어 있다. 이중적인 검은 나는 조용히 내 뒤를 따라오다가 내 옆에 나란히 붙어 가다가 어느샌가 나를 앞질러 간다. 태양의 위치에 따라 길이가 달라지는 그림자처럼 나는 기분에 따라 아이들에게 엄마였다가 친구였다가 마녀가 된다.


분석심리학자, 칼 융에 의하면 인간의 정신은 의식과 무의식으로 나뉜다. 의식에 해당하는 자아는 무의식의 원형인 페르소나와 그림자 사이에 있다. 집단의 기대에 부응하는 역할 가면인 페르소나. 자아의 어두운 측면이라 외면당하는 내면의 그림자. 그 사이에서 부유하는 자아. 페르소나가 제한 없이 팽창하면 자신의 본성인 자아를 잃는다. 마찬가지로 그림자를 거부하고 돌보지 않으면 억눌린 내면은 신경증적 행동으로 투사한다. 의식과 무의식이 통합되어야 진정한 자기(self)실현을 이룰 수 있다. 자아는 페르소나–그림자 평균대 위에서 균형을 잡느라 뒤뚱거린다. 그림자가 조용히 뒤따라올 때는 평온하다. 옆으로 바싹 따라붙으면 애써 일별한다. 기어코 나를 앞질러 서면 더는 모른 체할 방도가 없다. 그림자와 화해하지 못한 나의 자아는 아이들을 속죄양으로 만들었다.


유리창을 가뿐하게 통과하는 겨울 햇빛처럼 코로나 바이러스는 2020년 2월, 우리의 삶 한가운데를 손쉽게 관통했다. 햇살이 스며들 듯 바이러스는 우리의 삶 전체로 표표히 퍼져 나갔다. 끝 간 데 없이 퍼지는 바이러스를 붙잡지 못하는 동안 우리는 마스크라는 가면을 하나씩 얻었다. 인생이란 수없이 많은 페르소나 속에 허우적거리다 끝날 때야 비로소 제 얼굴을 찾는 여정일 것인데, 바이러스는 가면 위에 가면을 덧씌우고 무적의 페르소나를 갖게 해주었다. 막걸리를 채주하듯 힘주어 쥐어짜낸 바이러스의 순기능이랄까. 바이러스의 시대, 집 안 깊숙이 들이치는 햇빛만큼 그림자 역시 몸집을 불렸다. 자아의 천칭에서 위선을 부리며 팽창하던 페르소나와 돌보지 않아 위악을 투사하는 그림자가 정면으로 충돌했다. 아이들은 그 파편을 고스란히 덮어썼다.


봄이 오고 벚꽃이 피면서 마음이 덜컹거리기 시작했다. 무엇이 이토록 엉덩이에 뿔난 아이처럼 종종거리게 하는 것인지 내 마음의 얇은 가닥을 쥐고 따라가보았다. 벚꽃을 직접 볼 수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조여왔다. 심상하게 매년 피는 꽃, 한 번 못 보는 게 대수로운 일일까. 나에게 꽃은 일종의 행복 가면이다. 계절마다 꽃밭을 찾아 다니는 것은 화사한 꽃에 기대어 엷은 나를 선명하게 하기 위함이다. 꽃 가면을 빌려 얼비치는 내 얼굴에 진하게 색을 칠하고 얄팍한 만족감을 얻었다. 만족감은 수려하게 색칠한 사진 한 장이면 충분했다. 꽃에 대한 진심은 없었다. 꽃을 빌려 나를 치장했을 뿐 꽃을 있는 그대로 만끽하지 않았다. 정작 꽃은 바람에 제 몸을 내맡긴 채 자유로이 흔들리고 있는데. 봄날의 코로나로 알게 된 사실은 예사롭지만, 진실은 애처롭다.


아이들과 포도송이처럼 한데 달라붙어 있던 어느 날, 나는 마스크 안쪽에 자리잡고 있던‘인자한 어머니’가면을 벗어 던졌다. 숨막히는 위선을 한 줌 떼어내자 아이들과 사이가 멀어졌다. 반대급부로 얻어낸 적요함을 온몸에 휘감았다. 웃고 싶을 때 웃고 울고 싶을 때 운다. 마스크 안에서 나는 아무도 모르는 진짜 나, 자기(self)를 찾았다. 위선도 위악도 없는 무구한 얼굴만이 마스크 안에서 숨쉰다. 가련하게 위선을 떨지 않아도, 우악스럽게 위악을 부리지 않아도 오롯이 나로 온전할 수 있는 무적의 가면, 마스크. 마스크는 바이러스로부터 나를 지켜줄 뿐 아니라 잃어버린 진짜 내 얼굴을 찾아주었다. 한때 위태롭던 포도송이는 어떻게 되었을까? 농부의 우려와는 반대로 새로운 농법에 적응해 영롱한 보랏빛을 띄며 영글어갔다.


빛을 밝히는 것은 동시에 그림자를 만드는 것이다. 그림자는 빛의 또 다른 성질이자 일부이기 때문이다. ‘진짜 내’가 있기에 그림자도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바깥으로 보여지는 나와 숨겨둔 내가 완전히 다르지 않다. 빛이 없으면 그림자는 생기지 않는 것처럼 그림자가 사라지는 것은 빛이 사라질 때다. 융의 이론대로라면 인간에게 자아와 그림자는 햄버거와 감자튀김처럼 세트 메뉴다. 그러니 나의 이중인격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 아닐까. 공지영의 소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 주인공의 고모는 위선을 행한다는 것은 적어도 선한 게 무엇인지, 자신의 내면이 보여지는 것만큼 훌륭하지 않다는 것을 아는 것이라고 말한다. 위선과 위악 사이. 내면의 비루함을 다정한 친절로 덮는 것처럼 내 그림자가 아이들에게 차양막이 되길 바란다.


태양이 머리 위로 올라오면 비스듬히 길었던 그림자는 어느덧 짤막해진다. 피터팬처럼 가장 마음에 드는 그림자를 골라 꿰매 붙여 놓아도 그림자는 시시각각 길쭉하거나 짧아진다. 그림자의 변화를 오롯이 마주보아야 내면의 중심에 도달할 수 있다. 바람에 이리저리 나부껴도 꽃은 꽃이라 아름다운 것처럼, 홍수 같이 넘쳐나는 페르소나 속에서도 나는 나이다. ‘살펴보면 나는 내 아이들의 엄마이고, 내 남편의 아내이고, 내 부모의 딸이고, 내 시부모의 며느리이고, 내 조부모의 손녀이고, 내 남동생의 누나이고, 내 친구들의 친구이다.’[*] 역할마다 맞춰 써야 할 가면이 흩뿌려진 씨앗처럼 산재하지만 그 속에는 오직 하나뿐인 내가 있다. 싹을 틔우면 보이는 떡잎의 고유한 생김새처럼 선연하게 자리잡고 있다. 본질을 찾은 나의 꽃 가면에는 바이러스가 아니라 내 얼굴이 묻어 있다. 그림자를 품은 진짜 내 얼굴이 마스크 안과 밖에서 쉬지 않고 숨을 내뿜는다. 바이러스는 술지게미와 함께 냅다 버려버리고 막 걸러진 달큰한 술로 꽃 가면과 그림자 축제를 열고 싶다.

          

[*]김광규,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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