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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반짝 Aug 11. 2023

오지 않는 우산


 ‘극한 호우’라는 생경한 낱말이 뉴스를 통해 연일 흘러나온다. 산이 흘러내리고 땅이 팰 것만 같은 세찬 비가 쉼 없이 창문을 때린다. 아침에도 폭력배처럼 땅을 두들겨 패던 비는 오후가 되어서도 그 기세가 여전하다. 아이들의 하교가 걱정이다. 아이들이 들고 간 장우산이 뒤집힐 만큼 바람이 불지는 않지만, 빗물의 강도가 무자비하다.     


  학교에서 돌아온 둘째 아이의 모습은 처참했다. ‘물에 빠진 생쥐’. 아이를 보자마자 기계적으로 떠오른 관용어구다. 위험 앞에 무기력한 작고 무해한 것을 이르는 표현일까. 실제로 물에 빠진 생쥐를 본 적은 없다. 생쥐라니, 경험으로 깨닫고 싶은 표현도 아니다. 그저 대강 헤아려 짐작만 할 뿐이다. 

 “우산 안 가져갔어? 아침에 챙기라고 했잖아. 아침에도 비 오고 있었는데?”

 “우산 갖고 갔어. 우산을 옆으로 내렸다가 쓰고 다시 내렸다가 쓰고 했더니 조금 젖었어.”

 순일한 얼굴로 건너오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머리카락은 금방 감고 나온 듯 물이 뚝뚝 떨어졌고, 콧잔등에는 이슬이 맺혀 있었다. 티셔츠의 목과 어깨 부분은 땀인지 비인지 모를 것에 침수됐다. 방수 처리가 된 책가방은 표면에 물방울이 촘촘하게 맺힌 것도 모자라 아예 천이 젖기까지 했다. 편하다는 이유로 비 오는 날에 굳이 입고 나간 긴 바지의 밑단은 종아리까지 젖어들었다. 아이는 그야말로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거짓말. 너! 우산 안 쓰고 왔지? 바지는 왜 이런 거야?”

 “우산 썼어…! 바지는… 그냥 웅덩이가 있길래 몇 번 밟아 봤어….”

 “어휴…. 비가 쾅쾅 쏟아지는데 무섭지도 않았어? 그걸 일부러 맞아 보게?”

 “엄마, 무서운 줄 알았는데 약간 재미도 있었어.”


 무구하게 흘러나오는 대답이 기껏 쌓은 거짓말 유리성을 대번에 깨트렸다. 바보다. 아이는 1단계 거짓말의 성공 뒤에는 2단계 거짓말의 과제가 있다는 걸 아직 깨닫지 못한 것 같다. 거짓말의 깨진 틈을 못 본 체하며 무구한 아이의 무해함을 뜨거운 물로 덮어주었다.

 “내일도 이렇게 비가 많이 오면 엄마가 학교 앞으로 데리러 갈까?”

 “근데 저번에 엄마가 데리러 왔어도 어차피 걸어가니까 엄마랑 나랑 둘 다 젖기만 했잖아.”

 “그래도 같이 젖으면 좀 의지가 되지 않나?”

 “한 명만 젖으면 되는 걸 두 명이 젖게 하는 건 바보잖아. 혼자 재밌기도 하고….”

아이는 내일도 비를 만끽하고 물에 빠진 생쥐 꼴로 돌아올 모양이다.     


 물에 빠진 생쥐를 실제로 본 경험은 없지만,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 본 적은 있다. 비 오는 날 교문 앞에서 오지 않는 엄마를 내내 기다렸던 날. 같이 자리를 지키던 친구들이 자기 엄마와 하나, 둘 집으로 돌아가고 우산을 씌워주겠다는 친구에게 우리 엄마도 곧 올 거라며 먼저 가라고, 내일 학교에서 보자고, 잘 가라는 인사를 했던 날. 결국, 혼자가 되었을 때 교실 건물을 모르는 엄마가 교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교문까지 쉬지 않고 뛰어갔던 날. 아무도 없는 교문 앞에서 집 쪽을 바라보며 오지 않는 엄마를 기다렸던 날. 왜 그날 엄마는 비가 오는데도 우산을 들고 데리러 오지 않았을까?      


 교실 건물과는 달리 지붕이 없는 교문에서 엄마를 기다리는 일은 녹록지 않았다. 그럼에도 머리통에 꽂히는 비가 무섭지는 않았다. 곧 엄마가 우산을 들고 나를 데리러 올 것이라는 순한 믿음. 나는 그 새순 같은 믿음으로 오후 한나절 엄마를 기다렸다. 따끔하게 뺨에 튀어 오르는 빗방울은 견딜 만했지만, 엄마, 아빠를 대동한 듯 저녁 어스름과 함께 몰려오는 먹구름은 초등학생이었던 내가 버틸 만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결국 부모와 함께 온 비에 졌다. 혼자 집까지 걸어가는 동안 내리는 비에 도리 없이 쫄딱 젖고 말았다. 그날 내 모습이 바로 ‘물에 빠진 생쥐 꼴’이 아니었을까. 현관에서부터 짧은 거실을 지나는 동안 바닥에 물방울을 빼곡히 떨어트렸다. 안방 문을 열자 엄마는 선잠에서 깬 듯 어눌하게 말했다. 

 “밖에 아직도 비 와?”     


 학창 시절 엄마가 가지고 오지 않은 것은 우산뿐만이 아니었다. 버스를 타고 20분이 넘게 가야 하는 중학교에 다니던 어느 날 아침, 엄마는 도시락을 싸지 못했다며 점심시간에 가져다줄 테니 교문 앞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나는 그날 교문 앞에서 점심시간이 10분 남을 때까지 엄마를 기다렸다. 결국, 그날 나는 교문 앞에서 내 엄마를 함께 기다려주던 친구의 도시락을 나눠 먹어야 했다. 오지 않는 우산, 오지 않는 도시락. 엄마는 왜 그랬을까. 오지 않는 우산과 도시락은 때때로 나를 주눅 들게 했다. 비 오는 날 교문 앞으로 오지 않는 우산은 아이를 고아로 만든다. 엄마, 아빠가 없는 아이처럼 배경이 지워진다.    

  

 우산이 오지 않았던 그날로부터 두꺼운 시간이 쌓였다. 시간은 층위마다 다른 형질의 기다림을 저장했다.

 “여보세요. 엄마? 나 다다음 주에 엄마 집에 갈 건데. 엄마 그날은 일하면 안 돼. 그날은 일 빼고 쉬어. 나 친구들 만나기로 해서 엄마가 우리 애들 봐줘야 돼. 친구들이랑 술 마시기로 해서 늦게 올 거니까 애들 재우고 엄마는 자지 말고 기다려. 밤엔 무서우니까 내가 전화하면 집 앞에 바로 나와 있어야 돼.”

 스콜처럼 비가 내리던 그해 여름, 나는 어릴 때와 반대로 엄마가 나를 기다리게 했다. 택시가 엄마 집 앞에 다다를 즈음 새벽 어스름 속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엄마가 보였다. 

 “지금이 몇 신데 애 엄마가 이제야 기어들어 오냐? 술 취한 네 아빠 기다릴 때처럼 한숨도 못 잤네.”

 “엄마가 기다리고 있으니까 지금 오지. 근데 ‘북구 3’ 버스 노선 바뀌었어? 아까 약속 장소 갈 때 비는 엄청 오는데 길은 이상하고, 일단 내렸는데 어딘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나 울 뻔했잖아.”

 “쯧쯔쯔. 아이템풀 배달해서 번 돈으로 공부시켜 놨더니 홀랑 결혼해서 멀리 가버리고, 결국 바보 돼서 왔네. 학습지 남은 거 알아서 싹 다 잘 풀었었는데 왜 바보가 됐을까.”     


 엄마는 비 오는 그날에도 일을 했을 것이다. 엄마는 도시락을 주러 오지 않았던 그날에도 일을 했을 것이다. 엄마는 매일매일 일을 했으니까. 내리는 빗물에 본인보다 학습지가 젖지 않도록 전전긍긍하며 집집마다 배달했을 것이고, 내게 줄 남은 학습지를 챙겨 집에 돌아와 몸에 잔뜩 묻은 빗방울을 털다가 가붓하게 잠이 들었을 것이다. 각자의 공간에서 따로따로 젖어야만 했던 날. 자비가 없었던 것은 우산을 들고 오지 않은 엄마가 아니라 눈치 없이 내리는 비였다.     


 며칠째 퍼붓고 있는 이 비에도 자비는 없어 보인다. 무자비하게 땅 위의 것들을 휩쓸어간다. 속보를 내보내는 TV를 끄고 아이가 벗어놓은 빨랫감을 챙기는데 바짓단에 지도처럼 튄 흙탕물이 눈에 띈다. 아이는 빗물이 고인 웅덩이에서 신나게 놀고 온 듯하다. 뉴스 화면 속 떠내려가는 것들에 대한 걱정을 이내 마르지 않을 빨래로 옮기는 나 역시 자비가 부족한 듯싶다. 거짓말이 들킨 줄도 모르고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나온 아이가 창문 밖을 내다본다. 

 “엄마, 비가 왜 이렇게 많이 오게? 신이 오줌을 참았다가 한꺼번에 싸는 거야. 수박 먹고 참았나? 아! 그런데 나 수박은 지금 말고 학원 갔다 오면 줘.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화장실은 한 번만 가라고 해서 어제 오줌 참느라 혼났어.”


 부디 신이 자비를 잊은 바보가 아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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