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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반짝 Apr 12. 2024

건너뛴 시간

가을이 걸러진 사람들

   

 2023년 11월 1일 0시가 되자마자 미국 팝의 여왕이 자신의 SNS에 글을 올렸다. “It’s.. time.” 때가 된 것이었다. 바야흐로 크리스마스 캐럴이 온 세상에 울려 퍼질 때가. ‘캐럴 연금’ 수혜자가 쏘아 올린 작은 폭죽은 전 세계에 동시다발적으로 터졌다. SNS 피드에 노란 은행나무와 빨간 단풍나무 사진이 뜨나 싶더니 거짓말처럼 크리스마스트리 사진으로 도배되었다. 10월의 마지막 날을 이제 막 보냈는데, 만추를 느낄 새도 없이 크리스마스 물결에 떠밀려버렸다.     


 일 분마다 일력을 떼는 것처럼 세상의 시간은 급격하게 바뀐다. 몰아치는 시간의 공격에 이렇게 빨라도 되는 것일까 문득 의문이 들었다. 11월의 초입은 울긋불긋하게 꽉 들어찬 가을을, 아침저녁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점차 선연해지는 것을 콧등과 귓불로 느끼는 시기다. 특히나 올해는 지구온난화 덕에 찬기를 쐬지 못한 낙엽들이 물들다 말고 통째 바스러지는 바람에 가을이 늦된 참이었다. 따라오지 못하는 가을을 가붓하게 버린 세상에 크리스마스 시즌을 종용당하는 기분이다.     


 미처 들지 못한 단풍은 나무가 아직 겨울을 맞이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나무는 혹한의 날씨를 견디기 위해 가을께부터 몸속 수분을 점차 말린다. 잎으로 가던 수분이 끊기면서 단풍이 들고 낙엽이 지는 것이다. 매서운 겨울바람에 얼어 죽지 않도록 몸속 물을 말리고 잎을 모두 떨군 뒤 한껏 웅크린 채 겨울을 나는 것이다. 나뭇잎은 여전히 초록인 채 붉고 노랗게 변하지 못했는데, 세상의 시간은 가을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 가을을 건너뛴 나무의 겨울이 벌써부터 걱정이다.


 가을이 걸러진 것은 나무뿐만이 아니다. 2022년 10월 29일, 젊음과 이국의 문화가 한데 뒤섞여 자유의 냄새를 풍기는 거리에 불행이 덮쳤다. 불행은 그곳에서 159명의 목숨을 빼앗았다. 그러나 불행이란 무참하게도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불행은 159라는 숫자를 에워싼 연결고리에도 시커먼 그물을 덮어씌워 끌어당긴다. 159명과 연결된 사람들, 그들은 그해 가을이 통째로 건너뛰어진 채 몸속에 물을 가득 품은 채로 겨울의 한복판에 섰다.


 그해 정부는 참사가 벌어지고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일주일간의 ‘국가애도기간’을 선포했다. 서울광장에 합동 분향소를 설치하고, 참사 현장을 특별재난지역으로 지정했다. 공공기관은 곧바로 조기를 게양하고, 공직자들은 글자 없는 검은 리본을 착용하라는 지침들이 쏟아졌다. 떠난 이들에 대한 애도와 남은 이들에 대한 위로에 앞서 수칙들이 선전 전단처럼 떠돌았다. 일주일 동안의 ‘국가애도기간’. 슬픔에 기한이 정해졌다. 일주일 동안 다 같이 슬퍼하고, 일주일이 지나면 모두가 깨끗이 지워야만 한다는 말과 다름없었다.      


 애도를 한정하는 것은 폭력이다. 실제로 ‘국가애도기간’ 동안 매일같이 분향소를 드나들던 정치인들은 애도 기간이 끝나자 그날의 일을 입에 올리기 꺼렸다. 내 자식이 왜 죽어야만 했는지 알려 달라고 외치는 유족들에게 애도는 충분했다는 말로 등을 돌렸다. 그들의 등은 현관문을 뜯어내고 쳐들어와 온 집안을 휩쓸어놓고 창문으로 유유히 빠져나간 불행의 뒷모습과 같았다. ‘충분한 애도’는 실재하지 않는다. 마치 카페에서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는 것과 같다. ‘충분하다’는 애도를 꾸며줄 수 없는 형용사다. 세도가들은 역병이 돌자 사대문을 굳게 걸어 잠갔고, 역병이 묻은 유족들은 사대문 밖 광장에 유배되었다.      


  가을이 걸러진 채 겨울을 맞이한 이들이 지금 무릎으로 찬 바닥을 걸어간다. 봄, 여름, 가을은 그해 겨울의 한복판에 선 그들을 유유히 지나쳤다. 일 년이 지나도록 풀리지 않고 촘촘하게 묶인 그날의 진상을 밝히고자 그들은 겨울의 찬 바닥을 무릎으로 걷는다. 진상 규명이라는 당연하고도 기본적인 요구를 하는 유족들은 불행이 묻지 않은 이들에 의해 악질 빚쟁이로 탈바꿈되었다. 세상의 시간이 곧바로 크리스마스 시즌으로 교체되는 동안 가을이 걸러진 그들은 여전히 겨울을 대비하지 못하고 있다. 말리지 못한 눈물로 몸속 수분이 수위를 넘치는 저들의 겨울은 어찌 될까. 모든 유기체는 물을 품고 있고, 유기체의 물이 얼어 팽창하면 세포가 터진다. 눈물로 가득 찬 그들의 몸이 이대로 꽁꽁 언다면 결국 동파에 터져버리는 수도관이 될 것이다. 그전에 그들의 눈물을 말려야 한다. 우리는 곡비가 되어 그들의 무릎을 따라야 한다.      


 12월이 훌쩍 넘어 뒤늦게 울긋불긋 물든 단풍이 보인다. 나무는 세상의 시간이 저들을 건너뛰었어도 실제적 날씨에 맞춰 천천히 겨울을 준비했나 보다. 낙엽이 지면 앙상한 가지를 내놓은 채 혹한을 견디고 봄이 오면 다시 물을 채워 새순을 틔우겠지. 12월의 눈밭에 유족들의 손과 발이, 그들의 맨얼굴이 눕는다. 저들을 건너뛰는 세상의 시간에 대항하여 스스로 곡비가 되어 눈 위를 따라 걷는다. 우리는 불행의 그물을 덮어쓰고 스스로 곡비가 된 그들 앞에 서리와 진눈깨비가 스미지 않도록 연대의 막을 씌워야 한다. 우리는 그들이 새순을 틔울 봄을 불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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