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전화는 어째서 여유가 없을 때만 울릴까? 그때마다 뒤로 제쳐두어 마음 한구석에 빚쟁이를 만들게 할까? 다음 순서로 미룬 탑에 돌을 세 개쯤 쌓았을 즈음 울리는 전화를 바로 받으면 어김없이 들리는 첫 마디. “그거 있잖아, 그거.” 응? 도대체 그게 뭐냐고요? 엄마의 ‘그거’는 대체로 엄마의 ‘그거’ 증상에 좋다는 ‘그거’ 성분이 들어간 ‘그거’ 브랜드의 약을 주문해 달라는 소리다. 그 증상이 없는 나는 그 성분을 모르고 그 브랜드가 낯설다. 그게 무엇인지 모른다는 내게 엄마는 요즘 텔레비전에 ‘그거’ 광고가 한창이라고 한다. ‘그거’라고 하면 내가 어떻게 알아? 제대로 알아본 다음에 전화하면 좋잖아.
파편 같은 엄마의 말들을 조합하여 검색해 볼 정성은 처음부터 배제하고 그렇게 말하면 내가 어떻게 아냐고 짜증을 내고 만다. 엄마가 말한 틀린 약 이름 다섯 글자만 검색창에 써도 제 이름의 약 광고들이 알아서 떠오른다. 핸드폰이 제3의 손인 양 들고 사는 내게 그 한 번의 검색이 그리 품이 드는 일도 아니다. 그런데 어째서 화부터 나는 걸까? 이 화의 진원은 어디일까? 내게는 시간의 여유가 없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여유가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글도, 일도, 아이도 내 마음대로 척척 진행되는 게 없는 데 대한 초조함을 엄마에게 풀어버린 것이다. 세상의 모든 딸들에게 가장 만만한 채권자가 엄마니까. 여기저기 진 빚 중에 가장 늦게 갚아도 되는 채권자.
그러나 세상에 갚지 않아도 될 빚은 없다. 언제부턴가 나도 “그거 있잖아, 그거.”를 인사말처럼 하기 시작했다. 여보, 그거 있잖아. 딸, 그거 좀 가져 와. 아들, 그거 다 했어? 한 번 시작된 ‘그거’는 걷잡을 수 없었다. 세상 만물의 이름이 입뿐만 아니라 머릿속에서도 모두 ‘그거’로 대체된 것 같았다. ‘그거’의 감응력은 뛰어났다. 남편도 보통명사를 지시대명사로 치환해서 말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나는 엄마의 ‘그거’ 못지않게 남편의 ‘그거’에도 바짝 날을 세웠다. 호칭조차 생략한 채 “어? 그거 있잖아.”라고 말을 시작하는 남편에게 “나는 ‘어’가 아닌데? 그리고 세상에 ‘그거’라는 건 없어. 그거의 이름이 생각나면 그때 말해.”라며 먹잇감을 굴리는 고양이처럼 굴었다. 그러면서도 나의 ‘그거’를 알아듣지 못하는 남편에게 왜 단박에 알아듣지 못하냐고, 꼭 말로 해야만 아냐고 함부로 버린 쓰레기처럼 화를 내놓았다. 그럴 때마다 딸은 “도대체 ‘그게’ 뭐야? 정확히 말할 수 없어? What is 그거?”라며 나와 남편의 지시대명사 화법을 진지하게 비웃었다.
잘 벼려진 말들은 마음을 얇게 저민다. 날이 갈수록 대화가 소원해졌다. 부려놓은 화가 채무라면 마이너스 통장까지 끌어 쓴 셈이다. 소원한 대화의 진원을 TV로 진단하고, “밥 먹을 땐 TV를 끄자. 그렇지 않아도 함께 모일 시간이 부족한데 밥 먹을 때조차 TV만 보면 대화를 못 하잖아.” 진앙지를 찾아 호기롭게 TV를 껐지만, 정적만이 식탁 위를 거미처럼 오르내렸다. “그거 있잖아.”로 뜸을 들이며 내밀한 마음을 꺼내 보이려는 틈을 거세당한 이들의 식탁은 젓가락질 소리만 소란할 뿐이었다. 불친절하게 생략 당한 틈은 아득한 공백을 만든다.
대화한다는 것이, 100M 달리기하듯 시작부터 종료까지 전속력으로 말이 그득하게 들어차야만 제대로는 아닐 것이다. 그것에 뜸 들이는 엄마를 진득하게 기다리지 못하고 시간을 허비하는 무용한 설명으로 치부해 버리느라 그것 때문에 불편한 엄마의 속사정은 몰라보았다. 바통을 떨어뜨리지 않고 다음 말에 잘 넘겨주기 위해 들이는 뜸인 줄도 모르고. 속마음은 친구들과 이야기하고 내게는 체육복 빨아 달라는 말만 하는 딸이 어느 날 “엄마, 있잖아…. 나… 그거 있잖아….”로 말문을 열었을 때, 어떤 비밀 이야기가 내 쪽으로 흘러들어올지 기다리는 그 시간이 실제 이야기를 들을 때보다 더 고소했다. 뜸 들이는 시간 동안 고소한 밥이 지어지듯이.
‘그거’로 치환된 빈틈은 이쪽과 저쪽을 이어주는 말랑한 고리일지도 모른다. 기꺼이 꺼내 보이기 어렵지만 꼭 알아주었으면 하는 내밀한 마음을 저쪽으로 유연하게 보내주는 연결고리. 그리하여 종내에는 눈만 마주쳐도 보통명사로 전환되는 그것.
그거 있잖아. 그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