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현아 Apr 04. 2023

긴자에서 만난 젠틀맨

일본 할아버지

홀로 남겨진 도쿄.

일본은 늘 가족들이나 친구와 시간을 보냈던 장소인지라 혼자 남겨짐에 익숙함이 필요했다.

그래도 오랜만에 해외에 나왔다며 이리저리 발자국을 많이 남겨놔 다리에 힘이 들어갈 때마다 양쪽 종아리가 무지하게 당겼다. 하루쯤은 집 안에 가만히 누워 시간을 보낼까 다짐했지만, 어찌 된 일인지 머릿속으로 오늘 일정을 계획하던 나였다.

-

유튜브, 인터넷을 열심히 검색해 본 후 오늘의 발걸음은 "긴자"로 확정. 기분 좋게 샤워를 마치고 예쁘게 정돈을 마친 후, 한국에서 가져온 나만의 향수를 뿌린다. 특히 여행 갈 때 향수를 꼭 챙겨가는 편인데, 낯선 나라에서 뿌리는 향수는 이곳에 내가 왔다는 것을 증명하는 도구이자 정체성이었다. 손목에 가장 먼저 향기를 품은 후 정수리서부터 상의까지 향으로 몸을 뒤덮은 다음 외출에 나섰다.

-

말동무, 길동무도 없었던 나는 비교적 혼자 즐길 수 있는 쇼핑을 선택했다. 긴자에 도착한 후 그의 이름에 걸맞게 온통 명품 매장과 자기주장이 강한 빌딩들에게 정신을 팔려 연신 "우와"라는 감탄사만 외쳐댔다. 비록 혼자였지만 누가 봐도 관광객임을 한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 멋있는 장면들을 같이 보고 느낄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컸지만.

-

쇼핑도 체력이 뒷받혀 주어야 하는 것.

홀로 돌아다닌 지 1시간 경과 애써 무시하려 했지만 배꼽시계가 연신 울려댔다. 일본어를 못하는 나에게 식당은 가장 두려운 관문이었다. 차라리 서양인처럼 겉모습이 완전한 이방인이라면 모를까.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나에게 폭포수 같은 일본어를 쏟아내는 그들을 마주할 때면 폭포에 꼬르륵 잠기는 듯했다. 그렇게 눈치를 살피며 긴자의 거리를 30분 동안 돌아다녔다. 사람을 마주칠 필요가 없는 키오스크로 주문이 가능한 식당을 찾아 헤맨 것이다. 사람들이 문을 열고 나오는 모습을 우연히 지켜보다 문 틈새로 보이는 키오스크 주문대. 메뉴는 뭐든 상관없었다. "그저 나에게 말만 시키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의 기도를 마친 후 텐동집으로 들어섰다.

-

의외로 노랑머리의 외국인들과 여행객, 일본 현지인들이 식당에 꽉 차 들어있었다. 때문에 나는 줄을 서야 했고 우연히 찾은 집이 맛집이라는 것에 기분이 좋았던 것도 잠시 중후한 일본어가 귓가에 울려 퍼졌다. 고개를 돌려보니 한 일본인 할아버지로 나를 보고는 말을 거셨다. 난해한 표정을 숨길 수 없었던 나는 "Sorry... I can't speak Japanese." 라며 나지막하게 이야기를 했다. 열이면 열, 백이면 백 아무리 영어로 대답을 해도 돌아오는 건 일본어였기에 초조한 마음으로 할아버지를 바라보던 찰나, "Are you in line?" 맙소사. 환히 웃으며 영어로 답을 주신 할아버지였다. 그는 흰머리에 못해도 칠순은 되어 보였기에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던 나였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뱉으며 큰소리로 "Yes!"를 외쳤다.

-

일본인은 영어를 잘하지 못할 것이라는 편견은 물론이요. 거기에 할아버지는 당연했다. 수십 번 일본을 오가면서 소통이 가장 어려웠던지라 일본어를 구사하는 언니에게 늘 기댔고, 엎친데 덮친 격 그것도 혼자 남겨진 지금 유일하게 말이 통한 순간. 찰나의 소통이 이렇게 귀한 일인지 몸소 느낄 수 있었다.

-

가게에 들어서 주문을 마친 뒤 1인석으로 칸칸이 투명 가림막이 쳐져있는 테이블 속 할아버지는 내 옆자리에 앉으셨다. 환한 불빛에 시선을 따라가 보니, 그의 휴대폰 배경화면 속에는 딸과 손녀인 것 같았다. 보기만 해도 할아버지의 따듯한 사랑이 전해져 슬며시 입꼬리가 올라가던 나였다. 음식이 나온 뒤 손을 모으고 "이따다끼마스"를 외치는 할아버지를 따라 나도 조용히 "잘 먹겠습니다."를 외치며 기분 좋게 식사를 마쳤다.

-

젠틀한 일본인 할아버지와의 만남.

비 오는 긴자 거리에서 흰 머리카락에 푸짐한 풍채를 하신 그가 나에게 영어로 질문했던 그 순간은 영영 잊지 못할 것 같다. 왜 인지 모르겠지만 아직까지도 맴도는 한 마디 "Are you in line?"

혼자 지내며 입 꾹 닫고 지냈던 나에게 처음으로 말을 걸어준 할아버지. 오랫동안 건강하셨으면.


일본 할아버지와 만난 텐동집
눈을 뗄 수 없는 긴자거리



매거진의 이전글 오랜만이야, 교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