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도 하루에 두세 번의 꿈을 꾼다. 얼토당토않은 꿈을 꾸고 나서 입안이 씁쓰레하고 바짝 마르면 자리끼로 목을 축이기 일쑤다. 한평생 이렇게 꾼 꿈을 뇌의 창고에 쌓아두었으면 아마 폭발했을 것이다. 그런데 상당 수의 꿈은 길을 잃고 헤매는 꿈이다. 막다른 길에서 가위눌리어 식은땀을 흘리다 눈을 뜨기도 한다. 왜 그럴까? 길을 잃었던 일이 얼마나 많았기에.
예닐곱 살 때였으리라. 장에 가신 외숙모님 마중 나간답시고 혼자 훌쩍 집을 나섰다. 논두렁 밭두둑을 지나가는데 왜 그리도 길이 구불거리는지... 드디어 산길로 접어들었다. 반가워하는 외숙모의 얼굴을 떠올리며 신나게 걸음을 재촉했다. 야산에서 개가 새끼에 젖을 물리고 있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한참 걷고 보니 숲이 깊어지면서 어둑어둑해지고 으슬으슬했다.
“요놈아, 여그 왜 왔냐?”
숲 속에 웬 아저씨들이 불을 지피고 있었다.
“요놈아, 어둡기 전에 싸게 집에 가!”
쫓는 듯한 말투에 나는 갑자기 불안해졌다. 늦가을 날씨에 탱자가 된 고환을 붙들고, 저녁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마을을 향해 걸음아 날 살려라 줄달음쳤다. 엎드러지면 코가 닿을 듯한 마을인데도 돌아오는 길은 더 구불구불했다. 야속했다. 그런데 외숙모는 벌써 와 계시고, 온 식구들의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다. 그곳은 숯을 굽는 깊은 산속이고, 그 개는 늑대라며 하마터면 큰 일 날뻔했다는 게 아닌가? 길을 잃어 몹시 겁을 먹고 헤맨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6.25 전쟁 때 칠흑 같은 밤길을 걸어 피신을 했지만, 어른들을 따라다녔으므로 길을 잃은 일은 없었다. 두 번째 길을 잃고 공포에 떤 것은 청년 시절 꿈속에서였다. 단테의 ‘신곡’을 읽었던 때문인지, 나도 깊은 산속 오솔길을 헤매다가 맹수들에게 포위당했다. 웬 흑인의 인도로 어느 바위 위의 창고 안에 들어갔다. 하늘에서 늘어뜨려진 밧줄을 붙들고 공중에 매달려 있다가, 나동그라진바람에 꿈을 깨었다. 동화 같은 이야기지만 이 꿈을 계기로 “내가 곧 길이요....”(요 14:6)인 예수를 만나 신앙의 길에 들어섰다.
그 20대 청년 시절,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해서 큰 뜻을 세웠다.(立志) 별처럼 빛나고 무지개처럼 아롱진 이 희망봉을 향해 오르는 길은 실은 외길이다. 그러나 이 길은 險山峻嶺(험산준령)의 길이다. 속담에 ‘길이 아니면 가지 말고...’라 했는데 애당초 내가 갈 길이 아니었는지 모른다. 탁 트인 고속도로로 착각했거나, 첫발을 잘못 내디뎠거나, 발과 다리에 이상이 있었거나, 아무튼 정상에 오르지 못하고 파김치가 되어 그만 하산하고 말았다. ‘바쁠수록 돌아가라’는 속담과 같이, 孫子(손자)가 말하는 迂直之計(우직지계)도 ‘급할수록 돌아가는 길이 곧장 가는 길일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나를 과신하고 환경을 무시한 채 지름길로 들어가, 단숨에 결승선을 끊고자 취객처럼 갈지자(之) 걸음을 걸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하산하여 문득 내가 서 있는 곳은 어디인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길은커녕 사람의 발자국도 눈에 띄지 않고, 끝도 가도 없는 광활한 사막에 홀로 던져진 게 아닌가? 입구도 출구도 보이지 않은 복잡한 迷路(미로) 안에 홀로 갇힌 게 아닌가? 책 속에 길이 있다 했지만, 읽을수록 햇빛도 들지 않고 나뭇가지만 거미줄처럼 어지럽게 얽힌 밀림 속으로 점점 빠져든 것 같았다. 불안과 공포가 엄습해왔다. 이 지점에서 길인 예수를 찾은 것이다.
古稀(고희) 고갯길을 넘던 어느 날 무리하게 지리산 등산을 하다가 무릎 탈골 사고를 당했다. 팔순 고갯길을 쳐다보던 어느 날 불암산과 아차산을 등산하다가 곁길로 잘못 들어섰다. 그때도 ‘아는 길도 물어 가랬다’는 속담을 떠올리면서도 설마에 속았다. ‘길이 따로 있나? 다니면 길이 나지’ 하는 客氣(객기)도 한몫했다. 만일 눈비를 만나고 안개가 짙거나 바람이 센 날이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캄캄한 밤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의 길 되시며...’(찬송 445장)를 부르기도 하고, ‘...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은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시편 23:4) 聖句(성구)를 암송하며 불안을 떨쳤으니 망정이지 조난당했을지도 모른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人道(인도)로 걸어야 하고, 철이 들었으니 正道(정도)를 선택해야 하거늘, 과연 인도란 무엇이며 정도가 어느 길인지. 순간적이건 長考(장고)이건 많은 선택의 갈림길에서 의문부와 씨름을 하는 것이 인생이 아닌가?. 그래서 까뮈는 ‘선택의 종합이 인생이다’ 했을 것이다.
어느 날 두 친구가 길을 함께 가는데, 한쪽에선 교회 예배가 시작되고, 바로 밑에서는 서커스단의 공연이 있었다. 두 사람의 뜻이 엇갈려 한 사람은 교회로, 다른 친구는 서커스단으로 각각 헤어졌다. 때마침 교회에서는 ‘하나님이 쓰는 사람’이라는 목사님의 설교가 있었는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서 하나님이 쓰는 사람이 되겠노라고 다짐한 친구가 있었다. 그가 곧 뒷날 미국의 클리브랜드 대통령이다. 한편 다른 친구는 서커스 구경에서부터 시작해서 어두운 흥행가로 전전하다가 누범자가 되어 마침내 사형을 당했다.
한편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의 리빙스턴 장례식장에서 흐느끼고 있는 한 거지가 있었다. 리빙스턴과 같은 고향 친구요 동창이며, 방직공장 동료로서 그는 술주정뱅이었다. 이와 같이 두 친구의 운명을 갈라놓은 길목은 어디였을까? 갈림길에서의 선택이 이와 같이 하늘과 땅 사이만큼 멀리 벌어질 수 있다.
그런데 자잘한 일상생활을 비롯해서 수많은 문제의 근본은 영적 문제로 귀결됨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내가 곧 길’이라는 예수의 음성을 듣고, 나 역시 좁은 길 좁은 문을 택했다. 그리고 그것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길을 잃어본 사람이라야 길을 안다’고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사막과 미로와 밀림을 헤매다가 이렇게 바른 길 참 길을 찾았노라고 고백하면서 인생의 종점에 이르렀다.
앙드레 지드는 ‘좁은 문’에서 제롬과 알리사의 사랑과 종교의 갈등을 그리고 있다. 세속적 행복과 경건한 삶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미 7:13,14 눅13:24)는 말씀에 따라 결국 종교를 선택한다. 그러나 앙드레 지드는 이 책을 통해 엄격한 금욕주의로 인한 자기희생의 허무함을 비판하고 있다.
미국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는 그의 시 ‘가지 않은 길’에서, “... 오랜 세월이 지나고 나서 어디에선가 나는 한숨지으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고, 나는 사람들이 적게 간 길을 택했노라고. 그리고 그것이 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노라”라고 아쉬움을 읊었다. 실의에 빠진 20대 중반에 썼다는 이 시처럼 우리는 두 갈래 길을 함께 선택할 수 없는데, 과연 어떤 문 어떤 길을 선택할까?
죤 번연은 ‘천로역정’에서, 영적 고민으로 험난한 길을 끝없이 방황하던 크리스천은 십자가의 언덕에 올라 죄 짐을 벗어버리고 천국의 문에 이르러 입성하는 모습을 그렸다.
길을 가다가 길을 물을 때가 종종 있다. 차라리 모르면 모른다고 할 것이지, 건성으로 대답하는 사람이 있다. 그대로 찾아갔다가는 헛방임은 물론이다. 그런데 길을 안다는 내가, 길을 묻는 이에게 이렇게 건성으로 대답하지나 않는지 생각해 본다. 리빙스턴은 절친한 친구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고생하는 자네를 도와줄 사람을 보낼 테니, 그곳까지 가는 길을 알려주게’라고 썼다. 그런데 리빙스턴은 ‘길을 가르쳐달라는 사람은 사양하겠네. 길을 몰라도 오겠다는 사람을 나는 원하네’라고 답장을 보냈다. 과연 리빙스턴은 교만하고 비정한 냉혈동물인가?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즐거운 일이 아닌가?
우리 주님 걸어가신 발자취를 밟겠네.
한 걸음 한 걸음 주 예수와 함께,
날마다 날마다 우리 걸어가리
인생은 나그네 길이라 하는데, 이 찬송을 부르며 맑은 유리 같은 정금 길을 걸어 진주문(계 21:21)을 통과할 때까지, 오순도순 함께 걸어가는 말동무 길벗이 많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길을 찾는 일도 힘들었지만 길벗을 찾는 일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자기가 지금 가고 있는 길이 어디로 가는지 궁금하지도 않은 사람, 나처럼 길을 잃고 헤매다가 가위눌린 꿈을 꾸지도 않은 사람들에게, 길을 안내하겠다면 시큰둥할 것 같다. 하기야 하도 속는 일이 많아서 섣불리 누구에게 묻다가는 낭패 볼지도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스스로 알고 깨달아서 올 일이지, 가르쳐달라는 사람마저도 사양하는 리빙스턴의 당당함이 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