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길 2 20화

양파

by 최연수

요즘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다큐멘터리 영화가 절찬리에 상영되고 있다. 아흔여덟 할아버지 숨소리가 거칠어지자, 떠나갈 때 가벼우라고 아궁이에서 할아버지 옷가지를 태우는 여든아홉 할머니의 모습에서 눈물짓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한다. 百年偕老(백년해로)는 아니지만 닭살 돋을 만큼 진하면서도 애틋한 사랑 이야기인가 보다.

영국 이야기다. 둘 나이 합쳐 200년을 넘긴 짝들에게 기자가 비결을 물었다. ‘미안해!’‘그래 맞아!’ 말만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뽀뽀를 하고 잠들기 전에 꼭 안아주었다고 대답했다. 올여름에도 BBC 방송은 부부 합산 203살인 모리스․헬렌을 소개했다. 할아버지는 ‘다른 거 없어 마누라한테 그냥 져주면 돼’ 했다는 것이다. 작년 미국에서 최장수 부부로 공인받은 할아버지도 ‘언제나 아내를 따르라’고 했단다.

이런 이야기를 전해 들으면서, 나의 애정 온도는 얼마쯤일까 생각해 보고, 아내의 체감 온도는 얼마쯤인가 궁금하기도 한다. 30대 중반에 중매 결혼했으니 청춘 남녀들의 뜨겁고도 깊은 사랑을 알 수는 없다. 뿐만 아니라 40여 년 간의 결혼 생활을 하면서 팔십 고개를 넘어섰는데도 사랑 이야기할 자격은 미달인 것 같다. 학창 시절 학우들의 연애편지를 써주며 연애 박사 칭호도 받았지만, 추상적․관념적인 美辭麗句(미사여구)만 늘어놓았을 것이다. 막상 내가 약혼 기간 부지런히 편지를 써 부쳤지만, 달콤하고 아기자기한 사랑 이야기는 쓰지 못했다. 지금도 그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다. 내 스크랩 북에는 사랑․행복에 관한 명사들의 어록이 가장 많다. 멋있는 修辭(수사)와 그럴싸한 비유. 그러나 나에게는 그런 멋이 없는가 보다

바닷가에서의 첫 데이트였다. 우리의 결혼 생활은 저 미역 냄새 같지, 장미 냄새 같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했다. 이 말의 참뜻을 깨달았는지 못 마땅해 시큰둥했는지는 모르지만, 지난 40여 년 세월을 돌이켜보니 初志一貫(초지일관) 그저 그렇게 덤덤했던 것 같다. 그래서 아내는 ‘사랑은 기나긴 단꿈이지만, 결혼은 自鳴鐘(자명종) 시계 같은 것’이요, ‘하나님께서 사랑을 만드니 사탄이 결혼을 만들었다’라는 말을 실감했는지 모를 일이다. 그런데 말이 쉬어 一貫(일관)이지 한결같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루에도 몇 번이나 생각이 바뀌고, 생각과 행동이 딴판이며... 습관은 제2의 천성이라고들 하는데, 습관조차도 일관되지 않음을 스스로 깨닫는다.

사랑을 표현하는데, 무대 위에서의 연기는 민낯으로도 자신 있는데, 어둑 컴컴한 객석에서는 탈을 쓰고서도 손목 한번 못 잡아봤다. 이렇게 무대를 오르내리면서 사람이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니, 과연 사람은 이중인격자요 야누스의 얼굴인가?

‘사랑한다’는 말보다 ‘이해하고 배려한다’는 말이 더 구체적일 것 같다. 그런데 남녀의 차이를 이해한다는 말 자체가 추상적이다. 차이를 이해했으니 결혼했고, 살면서 이해했노라고? 천만의 말씀이다. 결혼 전 ‘완전한 여성’․‘완전한 남성’․‘완전한 결혼’ 시리즈 책을 완독 했으므로 내 딴으로는 결혼 생활이 자신 있다고 생각했다. 아뿔싸, 첫날밤부터 무식이 들통났다. 여인의 속옷이 양파 같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 후에도 한 이불속에서 자야 하는데, 아내는 여름에도 솜이불까지 덮어야 하고, 나는 겨울에도 얇은 내복 바람으로 자야 한다. 이렇게 티격태격하다가 여자의 피부 감각기관은 남자보다 두 배나 예민하다는 생리적 차이란 것을 이해하게 된 것은 오랜 세월이 지난 후의 일이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고, 더구나 여성의 속은 한 치도 모른다. 벗겨도 벗겨도 양파 같은 것이다.

이해 곧 사랑이라는 공식도 깨졌고, 좀 더 이해해 보려면 전문 서적을 봐야 한다니.... 남자와 여자는 뇌가 기본적으로 달리 엮여 있다고 한다. 남자는 뇌가 앞뒤 사이로 이어진 것이 많은데, 여자는 좌우로 이어진 것이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자는 논리적이고 조정력․공간 인식이 좀 더 나은 반면, 여자는 더 직관적이고 더 높은 감정 지수와 단어․ 얼굴 기억력을 갖고 있다고 한다. 한편 남자의 뇌는 지각과 행동을 연결하도록 되어 있는데 비해, 여자의 뇌는 다른 사람의 행동을 살펴 직관과 분석으로 해석하도록 발달해 있다는 것이다.

남자의 뇌는 분노와 관련된 오른쪽이, 여자는 감정과 자기 인식을 지배하는 왼쪽이 발달해 있어, 남자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어쩔 줄 모르는데, 여자는 친구들과 수다를 떨면서도 쉽게 털어버린다고 한다. 아, 이쯤 되어도 골이 아프다. 나 같은 凡人(범인)이 이런 전문적 지식을 어떻게 다 이해했을 것인가? 어쨌건 남자의 뇌는 여자보다 8%가 커도 여자의 말을 따라야 한다니... 그래서 결혼은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라면, 구름도 끼고 바람도 불며, 비도 내리고 천둥도 치는 하늘의 현상이 일어나는 게 당연하지 않느냐는 말로 얼버무리며 지금까지 살아왔다.

여인의 속속곳까지 속속들이 다 알고자 양파 껍질 벗기듯 해보았자 눈만 시리고 쓰라릴 뿐이다. 아내의 결점을 고치려는 것보다, ‘바로 그 상태’에서 구입한 상품처럼 생각해야지. 무를 수도 없고, 애프 더서비스도 안 된다. 나쁜 점 줄이기보다 좋은 점 늘리기가 부부애의 비결이다는 어느 분의 말을 반추해 본다. 나이 들수록 남성 호르몬이 많아진다더니 갈수록 잦아지는 마누라의 잔소리, 딸내미의 쓴소리를 들으면서도, ‘그래, 네 말이 맞아’하고 그대로 따라야 하겠다. 등짝을 맞대고라도 한 이불속에서 함께 자야 하겠다. 아침에 일어날 때 아내로부터 “왜 눈 떴어?”라고 핀잔을 받으면 어떡하나? 나도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말을 들어야 할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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