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신문에서만도 몇 가지 새로운 정보를 얻고 이를 스크랩 했다. LTE(Long Term Evolution)가 4세대 이동통신으로 오늘부터 SK탤레콤에서 서비스를 시작했다는 것이고, KAIST 홍순형․이해신 교수 공동 연구진이 혼합에서 나오는 단백질을 탄소나노튜브로 모방, 차세대 탄소나노튜브 섬유를 개발했다는 것이다. 한편 ‘건달(乾達)’이 불교에서의 음악의 신 ‘건달바’에서 유래했다는 칼럼을 본 후, 곧 인터넷에서 인도 신화의 소마(soma)를 지키는 신이란 걸 검색하게 되었다. 곧 소마는 신령한 약으로 알려져, 건달바는 훌륭한 의사요, 향만 먹으므로(香食) 음식을 탐하지 않고, 오로지 허공을 날며 노래만 즐긴다고 되어 있다.
이러한 정보와 지식이 없다한들 내가 일상생활에서 아무런 불편이 없고, 나를 무식하다고 얕잡아볼 사람도 없다. 그런데 왜 이런 정보나 지식을 스크랩을 하고 메모를 하는 것일까? 시대에 뒤떨어진다거나 남에게 뒤처진다는 강박관념일까? 아니면 오랜 습관일까?
며칠 전 성경상 회개(悔改)의 헬라어 원어 메타노이아(metanoeo)가 방향전환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기독교 교리를 U-turn으로 설명하기를 즐기는 나에게는 큰 힘을 얻게 된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고유명사의 어원뿐만 아니라, 특히 뜻글인 한자가 그렇다. 요즘은 한자의 많은 단어․숙어와 고사성어들의 어원이나 출처들을 메모하고 스크랩 하는데 재미를 붙이고 있다. 상상(想像)이란 단어가 고대 중국 중원지방에서 기후 변화로 자취가 사라진 코끼리의 뼈를 보고 코끼리를 상상했다는 견골상상(見骨想象)에서 유래했고, 따라서 코끼리 상(象) 자가 어원이라는 흥미 있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무심코 습관적으로 썼을 뿐 그동안 너무 둔감하고 무식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뿐만 아니라 순우리말과 영어나 일어 등 모든 언어의 어원도 알고 나니까 무척 재미있다. 심지어 산과 들에 난 야생화․잡초의 이름까지도 그 뜻을 생각하며 살펴본다는 재미도 여간 쏠쏠하는 게 아니다.
지(知)를 사랑하는 철학자가 있고, 하찮은 사물이라도 호기심과 흥미를 가지고 평생 연구하는 학자들이 있었기에, 우리들의 생활이 이렇게 편리해지고 인류의 문화가 발달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내가 하는 일은 그런 체계적인 지식이나 심오한 학문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다. 내일모레 80을 바라보는 이 나이에, 무슨 석․박사 연구 논문을 쓸 것인가? 그저 이러한 지식과 정보들은 잡동사니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런 것을 많이 안다고 해서 박학다식하다고 하지도 않는다. TV 퀴즈 쇼에 박문강기(博聞强記)한 사람이 등장하지만, 그들도 박물학을 연구하는 사람은 아니고, 다만 백과사전식으로 많이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잡화상이나 백화점과 다를 바 없다.
내 과거의 약점 중 하나가 이렇게 한 우물을 깊게 파지 못한 채,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지름길을 잃고 헤매거나, 이것저것 손대다가 반듯한 것 하나 쥐어보지 못한 것이다. 고시 낙방의 원인 중 하나가 학문의 방랑이요 시험과목의 외도에 있음을 빤히 알면서도, 그 습관의 올무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44년 동안 벼룩이의 연구에 전념한 영국 말콤 버로우와 그레고리 서튼 박사는, 벼룩이 발가락으로 바닥을 박차고 뛰어올라, 공중에서 노를 젓듯 발가락을 움직이는 방법으로 높이, 멀리 점프를 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고 밝혔다.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자연계 최고의 높이뛰기 선수인 벼룩이의 점프는 그동안 과학계의 미스터리였는데, 초고속 영상 촬영과 수학 모델이 풀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 생활에 어떤 유익을 준다는 말인가? 그럼 나는 어떤 유익이 있기에 이 신문 기사를 샅샅이 읽고, 스크랩까지 한 것인가? 이유는 다만 ‘재미’다. 오히려 일상생활에 필요하고 유익한 생활정보는 빈 깡통이니 이를 어이하랴.
학창 시절에는 ‘아는 것이 힘이다’는 격언을 놓고 공부했다. 성경에도 ‘방들은 지식으로 말미암아 각종 귀하고 아름다운 보배로 채우게 되느니라’(잠 24:4)고 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는 것이 병이다’는 속담이 그럴듯했던 일도 많다. 차라리 몰랐으면 좋을 뻔했으니까 말이다. 성경에도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 하는 자는 근심을 더 하느니라’(전 1:18)는 말이 있다. 바울이 아그립바왕에게 전도할 때, 총독 베스도가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행 26:24)고 하였다. 많은 학식은 과연 미친 것인가? 이렇게 헷갈린다.
그런데 안다는 것이 대단히 재미있다. 그래서 공부하는 일이 아주 즐겁다. 시험만 없다면, 뇌가 상하지만 않는다면 계속 공부하고 싶다. 40여 년 가르치는 일에 종사했는데, 가르치는 것보다 배우는 것이 훨씬 좋다. 그래서 강의 듣고, 책 읽으며 실습하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만년 학생의 팔자로 태어났나 보다. 평생교육이란 말보다 평생학습이 나에겐 어울린다. ‘돈이 나오나, 밥이 생기나’ 가족들은 선뜻 이해가 안 된단다. 공자의 ‘학이제일(學而第一)’에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라고 했다.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인데, 그리하여 나도 만년 학생이다.
일제강점기에는 낙제(落第) 제도가 있어 진급을 못하고, 학습부진아는 のこり(殘り) べんきょう(勉强)라 하여 방과 후 학교에 남아서 공부를 시켰다. 대단한 수치로 여겼다. 그런데 나도 학점을 못 따 졸업을 못한 채 집안에서 재수․삼수하는 만년 학생이다. 다만 수치가 아니고 떳떳하고 기쁠 뿐이다. 하루가 다르게 밀려오는 지식과 정보의 쓰나미를 용적이 작은 이 뇌에 어떻게 다 쌓을 수 있다는 말인가? 다만 자투리 땅에다 푸성귀를 심어 먹자는 게 아니라, 꽃씨를 뿌려 앙증스럽게 피어나는 꽃들을 바라보며 즐기자는 것이다. 우석대 강철규 총장은 취임사에서 ‘배운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을 남겼는데, 지금 나도 배우니까 존재하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