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길 2 04화

장독대와 옹기

by 최연수

지방 나들이를 하다가 점심때가 되었다. 길가에 좋은 음식점이 없나 두리번거리는데, 커다란 장독대가 눈에 띄었다. 지나간 소나기에 멱감은 장독들이 햇빛에 몸을 말리는 아름다움에 홀려 망설임 없이 문 안에 들어섰다. 선반에는 오지그릇들이 옹기종기 놓여있다. 고만 고만한 크기면 옹기옹기, 크기가 다르면 옹기종기라 하는데, 말조차 얼마나 귀여운가? 관상을 보니 손님을 맞이하는 주인아저씨도 장독처럼 후덕한 모습에 전라도 사투리가 살가워, 자석처럼 끌려들어 갔다.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에 코를 벌름거리며, 밥상 앞에 앉아 입맛을 다셨다. 시장이 반찬이라 뭐든지 맛있지만, 못 생긴 뚝배기에 보글보글 끓는 된장찌개가 얼마나 맛있는지. 게다가 잘 익은 갓김치와 천연기념물 같이 귀한 곰삭은 土蝦(토하) 젓의 맛은 逸品(일품)이었다. 내 입맛과 食性(식성)을 족집게로 집어낸 듯했다. 오랜만에 옛 고향집에 돌아온 듯 게눈 감추듯 음식을 비우는데, 시선은 선반에 간종간종 놓인 오지그릇과 문밖의 장독대에 자주 머물렀다.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가면 귀공자 같은 고려 청자와 조선 백자의 아름다움에 취함은 물론이지만, 시골 아저씨․아줌마 같은 장독과 언놈․언년이 같은 항아리들에 정을 끌리는 것은 옛 추억 때문이리라.

우리 집에는 마당도 장독대도 없었다. 이웃집 장독대가 몹시 부러웠다. 겨울에 하얀 눈 모자를 쓰고 얼음을 안은 채 알몸으로 추위를 견뎌내는 장독들이 대견하게 보였다. 여름엔 소나기로 멱감고 나서 햇빛에 몸을 말리는 항아리들이 참 귀엽게 보였다. 반반한 돌 방석에 앉아서, 조개껍데기를 소꿉장난감처럼 깔아놓은 채 도란도란 얘기하는 장독 식구들이 얼마나 정다운가? 둘레에는 맨드라미․접시꽃․분꽃․채송아 들이 장독대를 예쁘게 꾸미고, 흰 봉숭아는 뱀을 쫓는답시고 더 손질을 받았다.

이 장독대에서 우리 조무래기들은 숨바꼭질을 하며 놀았는데, 큰 장독 안에 숨었다가 어른들로부터 야단도 맞았지만, 소나기가 지나가면 잽싸게 장독 뚜껑을 덮기도 해서 칭찬도 받았다. 빨간 고추․대추와 숯덩이를 둥둥 띄우고, 솔가지를 곁들인 새끼줄을 허리띠처럼 둘른 장독님에게 절을 하면서 깔깔거렸다. 어른들은 그래야 단 장맛이 잘 우러난다고 했다.

어머니는 장터에 가면 옹기점을 자주 둘러보셨다. 예쁜 오지그릇을 만지작거리며 무척 사고 싶어 했다. 陶窯地(도요지) 강진 출신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쌀독 긁는 소리가 나더라도 커다란 장독에 쌀을 담아보았으면 하는 게 소원이었다. 목공 일을 하는 아버지께서 뒤주를 마련해 주었지만, 채울 쌀이 없어 한숨짓는 모습도 훔쳐보았다. 큰 장독대는 부잣집의 상징이었는데, 간장․고추장․된장․젓갈도 넉넉하게 채워놓지 못한 어려운 살림에 젊은 어머니의 마음이 얼마나 허허로웠을까?

부엌 한 구석 항아리에 흔한 물이라도 철렁철렁 채우고 싶어 하는 어머니의 가슴을 도려내는 사건이 일어났다. 우물물을 길어오는 누나가 빙판에 미끄러지는 바람에, 오지 물동이가 박살 나고 누나의 미간에 깊은 상처가 났다. 의술이 엉성하던 옛날 시골에서 제대로 봉합수술이 되었으랴. 어머니께서 안질로 어린 딸내미를 심부름시킨 게 화근인데, 이로 인해 큰 부부 싸움으로 번지고, 누나는 그야말로 짧은 일생을 트라우마(trauma)로 살았다. 그것을 닮은 물동이가 저기 앉아있구나.

중3 때이다. 收復(수복)은 되었으나 6.25 전쟁의 餘震(여진)이 아직 가라앉지 않았는데 어려이 복학을 했다. 학업을 계속할 수 없는 환경을 무릅쓰고, 자취와 고학으로 학교에 다녔는데 늘 허기졌다. 보리밥․메밀응이 보다는 반찬에 대한 식욕이 몹시 컸다. 거른 소금물에 고춧가루와 참기름 한 방울 떨어뜨린 것이 유일한 반찬이었으니, 김치 아니 금치가 얼마나 먹고 싶었는지... 어느 날 주인아주머니께서 고춧잎을 한 접시 주셨다. 된장 속에서 꺼내온 것인데, 이 별미에 혀가 목구멍 속으로 말려 들어간 느낌이었다.

좀 더 많이 주시지... 내일 또다시 소금물을 먹어야 하니 목구멍이 타들어갔다. 야행성 동물로 변한 나는 깊은 밤 夜陰(야음)을 타고 장독대로 다가갔다. 장독대 곁 닭장에서 닭들의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머리끝이 쭈뼛거렸다. 手顫症(수전증)같이 떨리는 손으로 된장을 헤집고 고춧잎을 한 줌 꺼내었다. 만약 뚜껑을 놓쳤다면 어찌 되었을까? 성공의 쾌감은 잠시, 빵 한 조각 훔친 죄로 19년 간 옥고를 치르었던 잔발짱의 유령이 나의 가슴을 옥죄는 통에, 가뭄 철 고춧잎처럼 몸이 오그라들어 불안을 이불처럼 둘러쓰고 바들바들 떨었다. 엿보고 있던 아주머니께서 들이닥칠 것만 같았다. 예수를 믿고 가장 먼저 회개한 마음 아픈 사건이 바로 저 장독대에 묻혀있다.

맨 뒤에 버티고 있는 저 큰 장독에는 더 아픈 사연이 있다. 6.25 전쟁 때 아버님께서는 저 장독 속에서 은신하셨다. 몽둥이찜질을 당한 후 친척 집 대청마루 밑에다 장독을 묻고, 가마니를 깔고 앉아 3개월을 연명하셨다. 햇빛을 보지 못해 蜜蠟(밀랍) 허수아비가 되어 살아 돌아왔으나 건강을 되찾지는 못했다. 포도는 아버지가 먹었는데 아들이 시다했던가? 저 장독을 보니 내 몸이 오싹거린다. 어렸을 적에는 저리 큰 장독의 용도를 몰랐는데 救命(구명) 장독이 될 줄이야.

그 앞의 장독에는 또 아우의 아픈 사연이 얽혀있다. 누나와 나는 외지에서 遊學(유학)하고, 어린 동생만 부모 밑에서 학교에 갓 입학하였다. 여․순 사건의 여파가 아직 출렁거릴 때, 입산한 공비들이 야음을 타고 고향 小邑(소읍)에 出沒(출몰)했다. 그들은 대한청년단 사무실을 겸하고 있는 우리 집을 방화했다. 부모님들은 잽싸게 피신을 했지만, 깊이 잠든 아우는 불길 속에 갇히게 되었다. 火氣(화기)로 얼떨결에 눈을 뜬 그는 본능적으로 불길 속에서 튀어나와 건너편 길가의 厠間(측간)으로 몸을 숨기었다. 뒷간이라기보다는 거름을 마련하기 위한 똥항이다. 옛날 시골에는 장독을 땅에 묻은 후, 그 위에 판자 두 개를 얹어놓으면 길 가던 사람들이 쉽게 볼일을 볼 수 있었다. 여기서 쭈그리고 앉아 발처럼 늘어뜨린 거적을 들추며, 밤새도록 불길에 타 사라지는 집을 보았다. 게다가 아빠 엄마도 타 죽었으리라는 생각에 어린 마음은 숯덩이같이 까맣게 타들어갔으리라.

아픈 상흔이 더 도지기 전에 시선을 돌려야 했다. 문득 눈에 띈 저건 웬 글자인가? 엽전처럼 한가운데 네모가 있고, 이를 共有(공유) 한 네 글자가 쓰여 있다. 위로는 吾(오), 아래로는 足(족), 왼쪽으로는 知(지), 오른쪽으로는 唯(유)이다. 말하자면 ‘나는 오직 만족한다’는 뜻이겠다. 자신이 원하는 만큼 재물이 들어온다는 신통의 부적임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빌 4:11-12)와 같은 뜻인 지족불욕(知足不辱)이 내 좌우명과 같아서 주인아저씨를 다시 쳐다보았다. ‘나는 오직 분수를 알아 족한 줄 안다’는 지지지(智知止)가 몸에 밴 틀림없는 장독 아저씨다.

甕算畵餠(옹산화병)은 독 장수 궁리와 그림의 떡이라는 뜻으로, 헛배만 부르고 실속이 없을 때 쓰는 말이다. 재물․지식․재주 등이 쥐뿔만도 못해 속이 텅 비었으면서도 아는 척, 있는 척, 갖춘 척하는 虛張聲勢(허장성세)를 이렇게 장독에 비유하기도 한다. 그러나 비록 속은 텅 비었어도 늘 불룩하게 넉넉한 모습들인 장독들을 安貧樂道(안빈낙도)로 비유하는 쪽이, 내 마음도 덩달아 넉넉해진다.

유리․양은․스텐․플라스틱 등 새로 나온 그릇들에게 속절없이 밀러나, 오늘날 질그릇․오지그릇 등은 도시에서는 애물단지가 되었다. 그러나 시골에서는 아직도 옹기점․장독대의 질그릇 오지그릇이 숨을 쉬고 있다. 오히려 서양에서는 이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고 한다. 2012년 ‘마드리드 퓨전 식문화 박람회’에서 한국의 醱酵(발효) 음식이 주제였는데, 이 음식을 만들어내고 오래 갈무리하는 게 옹기가 아닌가? 보이지 않은 氣孔(기공)을 통해서 숨을 쉬는 살아있는 그릇이다. 그 通氣性(통기성)․貯藏性(저장성)․經濟性(경제성)․용도의 多樣性(다양성)이 세계에서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

그 음식점이 나날이 번영하기를 기원하면서 떠나왔다. 그런데 차 안에서도 옹기들에 대한 繼起聯想(계기연상)이 쉬 사라지지 않았다. 두 번째 화재로 알거지가 되어 상경한 어머니는 학독 하나를 이삿짐이라고 덜렁 꾸려오셨다. 그리고 아파트로 이사 오면서 아무 쓰잘 데 없는 장독 하나를 고집스럽게 챙겨 오셨다. 옥상에서 獨居(독거)하는 그가 안쓰러워 몇 가지 잡동사니를 넣아두었는데, 세월이 약이라 쓰라린 과거사들이 나았는지, 恨(한)이 서린 옹기에 대한 어머니의 애정은 이렇게 남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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