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길 2 05화

맞아, 난 돼지야

by 최연수

어렸을 적 시골에서 고사(告祀) 지내는 것을 흔히 보았다. 제사를 지낸 후 시루떡을 얻어먹는 재미도 있었지만, 돼지 머리 앞에서 큰 절을 하는 모습이 참 우스꽝스러웠다. 지폐를 물고 흐뭇한 표정으로 큰 절을 받는 모습! 무속신앙에서 오는 예식이지만, 하필 돼지에게 절을 해야 하는지 늘 궁금했다. 그런데 돼지라야 신령님께 소원이 전달된다는 게 아닌가? 그에게 무슨 영력(靈力)이 있기에...

옥황상제(玉皇上帝) 밑에 업과 복이라는 두 장군이 있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아웅다웅하는 사이인지라, 상제는 탑을 쌓되 먼저 쌓은 사람을 가까이하겠다고 하였다. 업이 이기어 신임을 받았는데, 잔꾀를 부렸다는 사실이 후에 탄로 났다. 이에 상제는 복을 돼지로 還生(환생)시켜 사람의 祈願(기원)을 상제께 중개하는 권한을 그에게 주었다. 그래서 돼지 머리가 고사 예식의 상석에 올랐다는 것.

“☓☓야, 넌 도야지다. 편하게 잘 살 거다!”

외할머니와 어머니께서 이따금 하신 말씀이다. 내가 돼지띠(乙亥)에 태어났기 때문. 게다가 빳빳한 곱슬머리가 돼지털 같단다. 쎄(혀) 빠지게 일해도 목구멍 풀 칠하기 어려운 농촌 살림인데, 돼지처럼 힘든 일 않고도, 잘 먹고 행복하게 살 거라고 했다. 친근하게 지냈던 이웃집 중국인도 ‘돼지가 들어오면 백복(百福)이 온다’, ‘부자는 돼지를 멀리 하지 않는다’는 중국 속담이 있다는 것. 그러나 아무리 잘 살게 된다 한들, 돼지처럼 산다는 건 싫은데... 12 가지 동물 중에 하필 가장 卑賤(비천)한 돼지로 태어났을까? 일거리도 없고, 귀여움도 받지 못한 채 오직 먹히기 위해 뒤룩뒤룩 살만 쪄야만 하는 팔자가 참 처량하다. 내가 이런 팔자로 태어났다니 슬프기 짝이 없다. 한 해 먼저 태어났어도 아버지 같이 개띠에, 한 달만 늦게 태어났어도 쥐띠인데...

돼지를 치는 외가에 가서 꿀꿀이죽을 주는 일은 물론, 냄새나는 돼지우리 근처에 가기도 싫었다. 심지어 혼례식을 하는데, 몇몇 실군들이 붙들어 주어야 간신히 치르는 모습을 보면서, 끼리끼리 짝짓는 파리만큼도 못한 그 둔한 몸뚱이가 한심스러웠다. 게다가 할아버지댁에 가면 변소가 곧 우릿간이 되어, ☓ 달라고 고래고래 꿀꿀거리는 똥돼지가 어찌나 더럽고 측은한지...

‘난 도야지가 아니야!’

12 지지(地支) 사상은 지금도 민간인 깊숙이 뿌리 박혀 있다. 하루의 운세도 보고, 사주팔자(四柱八字)를 통해 일생의 운명도 점치고... 하루는 12 시(時)가 있는데, 그것을 동물로 나타낸 것이 12 지지요, 이 동물로 해를 세는 역법(曆法)을 ‘띠’라 한다. 이 띠를 통해 연령을 계산한 것뿐인데 왜 신앙으로 굳어졌을까? 어렵다는 주역(周易)을 알고자 함이 아니라 이런 이론으로 사람의 운명까지 결정된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첫 번째 맞는 돼지띠 해는 국민학교 6학년이었다. 좌․우익의 사상 싸움의 불똥이 국민학교까지 떨어졌다. 우익 딱지가 붙은 나는 좌익 아이들에게 왕따를 당하고, 드디어 우익 담임선생을 배척하는 同盟休學(동맹휴학)에 휘말리었다. 마침내 좌익의 못자리라는 ☓☓중학교 입학시험까지 낙방, 고개를 들고 문 밖에도 나가지 못한 채 집안에 갇혀 재수를 하였다. 그야말로 돼지 신세가 되었다.

‘아니야, 내가 왜 돼지로 살아야 해?’

그런 무속신앙에 빠져서 허우적거릴 필요가 없다. 운명이라 할지라도 당당하게 맞서서 극복해야지. 큰 꿈을 품고 열심히 노력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돼지가 되어 있는 게 아닌가? ‘꿀돼지의 일기’를 쓰고 있었다. 두 번째 맞는 돼지띠 해, 돼지가 되어 돼지의 눈으로 본 세상 이야기를 쓰게 된 것이다. 곧 돼지로 자처하면서 풍자로 세평(世評)을 썼다. 그런데 편히 살긴... 나의 이십 대는 그야말로 닭․개보다 더 동분서주했으며, 소․말보다 더 무거운 짐을 짊어졌다. 어른들의 예언과는 영판 빗나간 것. 그러면 그렇지 내가 무슨 놀고먹는 돼지 팔자야?

세 번째 맞는 돼지띠 해였다. 늦장가를 들어 첫 아이를 갖게 되었다. 돼지 3 마리를 기르고 있었다. 그중 어미 돼지가 12 마리의 새끼를 낳았다. 우릿간이 너무 비좁아 넓혀야만 했다. 광으로 들어가 톱과 망치를 들고 나왔다. 켜고 자르고... 새해 劈頭(벽두) 새벽의 꿈이었다. 용 태몽은 아닐지라도, 돼지 해를 맞아 돼지띠인 내가 돼지꿈을 꾸었다는 건 길몽임에 틀림없다. 아무도 몰래 주택복권을 샀다. 돼지 어미․아비 몫까지 15장을. 그동안 모은 돼지 저금통을 터뜨려 주택은행으로 가서 마감 직전에 샀는데, 공교롭게 15회분이다! 척척 맞아 돌아가는 것이 예사롭지 않았다. 어떻게 되었을까? 휴지 조각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이 이야기를 듣던 어머니께서

“너답지 않구나. 돼지 같은 아들 얻었으니 집에 비하겠냐?”

아닌 게 아니라 집 장만보다 더 큰 경사가 난 것이다. 이후 돼지꿈의 춘몽에서도 깨어났다. 비록 큰 꿈 작은 꿈 모두 물거품이 되었으나, 돼지처럼 더럽고 미련하며 욕심꾸러기로 살지 않기로 노력하였다. 기독교로 귀의하면서, 돼지가 아닌 예수님을 내 기도의 중보자로 삼았으니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회갑이 되었다. 다섯 번째 맞이하는 돼지띠 해지. 곰곰이 생각해 보면서

‘맞아, 난 돼지야!’ 하고 고개를 끄덕이었다. 그래서 耳順(이순)이겠지. 내가 흰 눈처럼 결백하지 못한 동물, 아무 음식이라도 맛있게 먹는 잡식 동물이 아닌가? 먹히기 위해 말 구유로 오신 예수님처럼, 아무 욕심도 없고 자랑도 없이 다만 먹히기 위해 살이 찐 동물. 어느 음식점에 들렀는데, 동고동락(同苦同樂)이 아닌 돈거돈락(豚居豚樂)이란 간판이 붙어 있었다. 비저공문(肥猪拱門)이라, 살찐 돼지가 문을 연다고 했겠다.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우리를 맞이하며, 웃고 있는 저 모습! 하다못해 창자까지도 순대가 되고, 아미노산 생산 등 터럭까지도 남김없이 사람에게 유익하게 다 받치고 있는 게 아닌가?

최근 돼지의 게놈(genome)을 해독했다고 보도되었다. 2만 5000 개의 유전자들이 총 29억 쌍의 염기 구조로 이뤄졌다는 것. 해부학적으로 인간과 장기가 비슷해, 장기 이식의 최적 동물로 평가된다고. 앞으로 치매 등 질병 치료 연구에서 쥐보다 더 정확한 동물 모델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 하니, 정말 귀한 동물이 아닐 수 없다. 고사 때 상석에서 高官大爵(고관대작)들에게도 큰 절을 받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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