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처럼 꿈을 꾸지 않는다는 사람, 꾸었어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사람들이 참 신기하다. 그만큼 숙면(熟眠)할 것이기 때문이리라. 더구나 좋은 태몽이나 운수대통한 길몽을 꾸고 희희낙락(喜喜樂樂)한 사람, 꿈이 들어맞았다는 사람을 보면 그 순진무구(純眞無垢)함이 참 부럽다. 그만큼 안면(安眠)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룻밤에도 어김없이 서너 차례 꿈을 꾸며 뒤척거리는 나에게는, 그들처럼 단잠을 깊게 자보는 것이 하나의 꿈이기도 하다. 한창 자라던 어릴 때의 가위눌린 꿈으로부터는 이미 졸업했어야 하고, 봄날 개꿈 같은 너절하고 어수선한 꿈은 쉬 잊어버려야 할 나이인데 그렇지 못하다. 오죽하면 잠자리 들기 전 악몽, 흉몽을 꾸지 않도록 기도도 할까?
더러 그리웠던 사람을 만나고,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노닐며, 즐거운 한 때를 보내는 꿈을 안 꾸는 건 아니고, 행운의 돼지꿈을 꾼 일도 있긴 한다. 그런데 어린 시절 무척 혐오했던 뱀에 관한 꿈, 학창 시절 불안과 공포의 6.25 전쟁에 관한 꿈, 청년 시절 몽유병자처럼 험난한 길에서 방황하는 꿈, 철부지 아이들과 입씨름하던 장년 시절 교직 생활에 관한 꿈... 이런 꿈을 자주 꾸다가 때로는 식은땀을 흘리기도 한다. 이런 꿈이야 과거사를 배경으로 한 것이므로 고개를 끄덕이게 되지만, 겪지도 않았고 상상도 해보지 않았던 노아의 홍수와 같은 수재의 꿈은 왜 가끔 꾸게 될까?
어떤 것은 자다 깨다 하면서, 전편․후편․속편으로 이어지는 꿈도 있고, 자는 것인지 깨어 있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이 꾸는 비몽사몽(非夢似夢)도 있다. 이런 불가사의한 이야기에 웃어야 하는지 짜증내야 하는지... 바라던 일이 물거품 되고, 하는 일이 꼬이어 심란한 상황일 때는 그렇거니 한다. 그러나 버릴 것 몽땅 버리고 놓을 것 다 놓아서 텅 비어 있는 이 나이에 웬 꿈일까? 시시콜콜한 꿈까지 글로 엮어서 책을 낸다면 천일야화(千一夜話)는 저리 가고, 아마 만리장성이나 히말라야산이 될 것이다.
해몽 책을 펴놓고 하루의 운세를 알아보던 때도 있었다. 코에 걸면 코골이, 귀에 걸면 귀고리 같은 해석인 줄 빤히 알면서도 말이다. 나날의 삶이 고되고, 바라던 꿈이 꺾일 때마다 이 책에서 때로는 위안도 받고, 때로는 무너지는 일장춘몽(一場春夢)에 맥이 풀리기도 하였다. 못나게시리 한낱 꿈에다가 내 운명을 점친다니... 이런 유치한 백일몽에서 깨어나기 위해서, 프로이트(Freud)의 정신분석학 중 ‘꿈의 해석’을 천착(穿鑿)했던 시절도 있었다. 무의식 세계를 파헤친 그의 학문은,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것과 비교하기도 하지만, 암호를 해독하고 수수께끼를 풀거나 퍼즐을 맞추는 것과 같은 해설에 호기심은 있었으나, 박하(薄荷)와 같이 막힌 콧속을 시원하게 뚫어주지는 못 하였다. 오히려 내 꿈을 끼워 맞추어보려 해도 어긋맞춰진 톱니바퀴나 눈길에서 헛도는 바퀴 같은 느낌이었다. 더구나 성욕을 비롯한 억압된 욕망의 위장된 성취가 은유와 상징으로 꿈을 통해 표현된다니, 결혼생활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억눌린 성적 욕망 때문이란 말인가?
다만 꿈을 자주 꾸는 것이, 그런 학문적인 흥미보다는 내 심신의 건강에 과연 이로운지 해로운지 실용적인 면으로 관심이 쏠리었다. 꿈이란 정신․신경이 과민한 사람에게 나타나는 일종의 병리 현상이요, 복잡하고 혼란한 생활환경으로 인한 잡념과 번민의 생리 현상이 아닌가 나름대로 오랫동안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립․분열․상극․투쟁․모순․갈등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원만하게 타협하여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원탁회의가 곧 꿈이라는 긍정적인 학설에 접하면서, 오히려 꿈으로 인해 잠을 잘 수 있다니 다행스럽게 여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인생의 1/3이 잠을 자면서 보내는데, 잦은 꿈 때문에 밤 잠을 설치다 보니 늘 머리가 개운치 않고, 악몽․흉몽에 시달리게 되면 영 기분이 언짢으니 어찌하랴.
베르나르 베르 베르(프랑스 소설가)는 창의력을 키우는 법으로 규칙적인 생활과 꿈의 메모를 들었다. 그리고 데니스 洪(미국 버지니아 세계적 로봇 과학자)은 침대 곁에 공책과 연필을 두라고 하였다. 곧 잠과 꿈은 아이디어의 원천이기 때문이란다. 실제로 19세기의 유기화학자 케쿨레는 자기 자신의 꼬리를 문 뱀을 꿈에서 보고, 오랫동안 풀리지 않았던 벤젠 분자의 구조를 발견했다고 한다.
그런데 내 인생관에 코페루니쿠스(Copernicus)적 전회를 가져온 꿈이 하나 있었다. 그 흔한 너절한 꿈 가운데, 이 꿈은 며칠 동안 강렬하게 머리에 각인되어 일기장에 소상하게 적어두었다. 천사의 예언대로 처녀의 몸에서 아기가 태어났다는 이 신화 같은 사실이, B.C. 와 A.D.라는 인류 역사의 분수령이 되었 듯이, 나 또한 동화와 같은 이 꿈 하나가 무신론적․반기독교적인 인생관에서, 유신론적․기독교적 인생관으로 바뀐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꿈이 예사롭지 않은 현몽(現夢)이 아니겠느냐는 어머니의 말씀과, 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겠느냐는 어느 전도자의 해몽(解夢)이 내 마음에 와닿았다. 그 후 성경을 보니, 꿈 이야기가 참 많았다. 특히 요셉과 다니엘의 해몽은 본인의 운명뿐만 아니라, 한 나라의 흥망과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큰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아무튼 불가사의한 꿈은 왜 꾸게 되고, 무슨 뜻이 있으며, 어떻게 풀이해야 되는지 지금도 궁금하다. 잠이 들면 뇌는 거의 모든 활동을 중지하고 깊은 잠에 빠진다. 대신 몸은 지속적으로 뒤척인다. 잠든 지 60분 후 뇌는 서서히 다시 활동, 거의 깨어있는 상태까지 돌아온다. 이때 눈동자만 빠르게 움직이고 나머지 몸은 마비된다. 꿈은 대부분 이런 렘(Rapid Eye Movement-REM)의 상태에서 꾼다고 한다. 이때 만약 몸의 마비가 풀리면 몽유병 현상이 나타나고, 거꾸로 마비된 상태에서 완전히 깨어 버리면 의식은 있지만 몸을 제어할 수 없어 가위에 눌린다. 이렇게 깊은 잠과 REM 수면 상태가 반복되는 동안, 매일 밤 적어도 4〜5번 꿈을 꾸게 되고, 깨기 전 마지막 REM 수면 상태의 꿈만 기억한다는 것이 뇌과학자들의 설명이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꿈은 왜 꾸는 것일까? 현대 뇌과학에서는 크게 두 가지의 가설을 제시한다. 왓슨과 함께 DNA 구조를 판독해서 노벨상을 받은 프랜시스 크릭은, 저장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된 정보가 꿈을 통해 지워진다고 주장했다. 바꿔 말하면 뇌의 쓰레기통 같은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MIT의 윌슨은 낮에 경험한 정보들이 마치 녹화된 동영상을 반복해 보듯 REM 상태 때 다시 반복된다는 실험 결과를 얻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우리는 깨어있는 상태에서도 현실을 직접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지각된 정보들을 경험과 미래 예측 위주로 추론하는 뇌의 해석을 통해 이해한다. 하지만 잠이 들면 더 이상 자극을 통한 현실과의 검증이 불가능해진다. 마치 운전사 없는 버스같이 지그재그로 작동하고 그 결과물을 꿈으로 인식할 것이다고 한다.
그렇다면 꿈의 의미는 본질적인 것보다는 해석하는 사람의 의도와 상상력의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꿈보다 해몽이 더 의미 있다는 결론이 아니겠는가? 그런 뜻에서 내 꿈 이야기를 되돌아본다. 그때 그 흑인의 “살고 싶으냐?”는 질문은, 사느냐 죽느냐는 절박한 상황에서 다분히 철학적․종교적인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는 햄릿의 독백과 일맥상통(一脈相通) 하지 않은가? 누구인가 현몽(現夢)했으리라는 어머니의 기대와, 전도자의 의미 있는 해몽(解夢)과,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나의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상황이 맞아떨어진 한 편의 드라마였음이 틀림없다.
‘꿈보다 해몽’은 되새김할수록 깊은 맛이 나는 속담이다. 이 속담을 잠언(箴言)으로 여기면서, 그 꿈을 두고두고 감사할 뿐 아니라 앞으로도 어떤 꿈이건 일희일비(一喜一悲) 하지 않고, 멋있게 뜻깊게 해몽하리라고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