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부터 무척 화초를 좋아했다. 그래서 손에 잡히는 대로 베란다에 화초를 심어 꽃집이라 불렀다. 베란다를 없앤 후에는, 거실 창가에 작은 화단을 꾸며보자는 생각을 했다. 장난감 물레방아도 돌리고 분수도 뿜으며, 연못에 송사리도 기르는... 그러나 대자연을 축소시켜 거실로 옮겨둔다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다. 큰 화분이 있긴 하지만, 거실 창가에 작은 야생화 화단을 꾸며보자는 생각을 했다. 크기라야 신문지 두 쪽 펴놓을 정도의 좁은 면적이다.
새 봄을 맞아 맨 먼저 민들레와 제비꽃․자운영을 옮겨 심었다. 앉은뱅이꽃이라는 별명처럼 제비꽃은 정말 작은 꽃이다. 그러나 노란 민들레와 보라색 제비꽃․자운영을 심어놓으니 봄의 전령사(傳令使)이다. 아무리 꽃을 좋아하기로서니, 우리네 산야에서 지천(至賤)에 피어있는 꽃들이요, 물을 주다 보면 샐 것은 뻔한데, 뭐가 그리 좋다고 또 하나의 일거리를 만드려는지.... 아내의 시선이 그다지 곱지 않은 것 같다.
흔한 건 천하게, 드문 건 귀하게 여기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남의 손에 있는 떡이 크게 보이지 않은가? 지구촌이라 하듯이 세계가 한 마을이 된 세상에, 각양각색(各樣各色)의 화초들이 밀려들어, 꽃 시장은 동서남북이 없고 춘하추동이 없다. 곱고 아름다운 희귀한 화초들이 자태를 뽐내며 사랑받는 그야말로 백화난만(百花爛漫)이다. 이렇게 꽃을 감상하는 우리들 눈높이에 따라 그만큼 삶의 질도 높아졌을 것이다.
외래어의 쓰나미 속에서, 외우기 힘든 외래종 꽃 이름은 꽃집마다 중구난방(衆口難防)이다. 이 틈바구니에서 쫓겨난 우리의 야생화들은 이름조차 까맣게 잊혀 가고 있다. 이렇게 화초 사대주의(事大主義)에 따라 천대받는 우리의 야생화들을 볼 때마다,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강요받던 일제 강점기를 돌아보게 된다. 실제로 외래종 화초․잡초들의 무성한 번식 때문에, 우리 토종 야생화들이 위축(萎縮) 내지는 멸종 위기에 빠졌다고들 걱정한다. 이를 안타깝게 여기어 재래종 야생화들을 사진사들이 카메라에 담기도 하고 세밀화로 그리기도 하며, 어떤 이들은 꽃에 얽힌 전설을 써서 책을 내기도 한다. 말하자면 화초의 국수주의(國粹主義) 요 민족주의(民族主義)고나 할까? 하기야 재래종으로 알고 있는 꽃들도 거슬러 올라가면 귀화식물(歸化植物)도 있긴 하지만.
일손이 달려 마음의 여유가 없는 옛날 우리네 장독대 둘레에는, 철 따라 맨드라미․접시꽃․봉숭아․분꽃들이 저절로 피고 지며, 울타리 밑에는 해바라기와 나팔꽃․꽈리꽃․과꽃, 우물가에는 채송화들이 누가 보건 말건 피고 졌었다. 논둑․밭두렁과 들판과 산기슭, 시냇가와 행길가에서도 이름 없이 밟히고 꺾이며 제멋대로 꽃을 피웠다. 그중에는 아기똥풀․노루오줌․며느리미씨게 같은 이상야릇한 이름들이 우리들을 웃기기도 했다.
그런데 흔해서 홀대받았으나, 가까이 있어 정들었던 그런 화초들이 사라져 가고, 이름마저 잊힌다는 것은 여간 쓸쓸하지 않다. 나이 들어 숨을 고르며 쉬엄쉬엄 걷다 보니, 옛날에 거들떠보지 않고 지나쳤던 작은 꽃들이 눈에 띄고, 자난날을 돌아다보니 함부로 밟고 꺾던 못난 꽃들이 애잔하게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돋보기로 들여다봐야 할 작은 꽃들에게도, 앙증스럽게 암․수술이 있고 알록달록한 고운 무늬가 있으며, 씨방이 있어 씨를 맺는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는 말씀이 실감이 난다.
이렇게 귀한 생명체들을 불러 모아, 조촐하나마 잔치를 베풀어주기로 한 것이다. 속죄(贖罪)라도 하듯이 말이다. 고아와 과부․나그네를 특별히 돌봐주라는 구약 말씀과, ‘....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마 10:42)는 말씀에 따라 마치 자선사업(慈善事業) 하듯이.
큰 꽃들은 한 두 송이 있어야 아름답지만, 작은 꽃들은 무리 지어 피어야 아름답다. 이런 작은 야생화들은 얼른 지기 마련이라, 지면 아낌없이 뽑아내어 다른 꽃으로 바꾸어 심는다. 그중 한강 둔치에서 옮겨 신은 루드베키아가 가장 오래 그리고 예쁘게 정원을 장식해 주었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손쉽게 뽑아다가 심으면 일 년 내내 갖가지 꽃들을 고루고루 구경할 수 있다. 남들이야 눈여겨보지 않지만, 나는 일어나면 먼저 커튼을 걷고 이 초미니 가든 앞에 서서 그들과 눈인사를 나눈다. 화초들도 사랑을 자양분으로 해서 자란다는 게 아닌가? 야생화들은 까다롭지 않아서 좀 무관심해도 금방 토라지지 않는다. 생명력이 강하여 웬만해서는 죽겠노라고 엄살떨지도 않는다.
이제 이 초미니 가든에도 어김없이 가을은 찾아왔다. 자연법칙에 가장 잘 순응하는 이 야생화들도 떠날 채비를 할 것이다. 겨울 동안 이 작은 정원도 저 들국화 잔치를 마지막으로, 지난날의 잔치를 깡그리 잊은 채 아마도 휘휘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