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길 2 02화

녹음방초

by 최연수

우리 집을 방문한 사람들은 산장에 온 것 같다고 한다. 한여름에도 에어컨이나 선풍기가 필요 없을 정도로 녹음이 시원하다. 집 앞에 커다란 나무들이 서 있어 햇빛이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잠깐 머물다 가면 산장에 왔다 간 느낌이겠지만, 그러나 날마다 생활하는 우리에겐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안방에 들어오면 동굴 속에 들어온 것처럼 컴컴해서 대낮에도 전등을 켜야 하고, 장마철에는 방바닥이 끈적거리며 곰팡이 냄새가 이맛살을 찌푸리게 한다. 한두 나무 베어냈으면 좋으련만, 함부로 벨 수도 없고, 이웃 주민들 동의를 얻자니 이해관계 없는 그들이 선뜻 응할 것 같지도 않다.

그러나 집밖으로 나가면 그야말로 녹음방초다. 옥상을 훌쩍 넘은 메타세쿼이아를 비롯하여, 30여 년 이상 자란 갖가지 나무들이 울창하고, 철 따라 온갖 화초들이 아름답게 피어, 이제는 아파트 안의 공원이 아니라 공원 안의 아파트가 되어 있다. 주거 환경으로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이 쾌적하다. 엎드러지면 코 닿는 곳이 국립현충원이요 한강 시민공원이라, 날마다 녹음 속으로, 아니면 한강을 끼고 산책하는 즐거움을 무엇에 견주리오. 게다가 반포천을 따라 그야말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허밍웨이를 걷는 것도 즐겁다.

주위가 온통 푸른 빛깔이다. 어렸을 적부터 푸른색을 좋아했다. 자라난 주위 환경이 푸른색이었기 때문일까? 푸른색 속에는 마음을 포근하게 감싸주는 요정이라도 숨어있는 것일까? 학창 시절에 심리 검사를 위해 좋아하는 색깔을 묻는 설문조사가 있었는데, 나는 곧바로 녹색을 썼다. 선생님께서는 온순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 녹색을 좋아한다면서, 나와 딱 들어맞는다고 했다. 취직하여 첫 출근 때는 아버님께서 맞춰주신 コン色(일-감색) 양복을 입었는데, 그 후 손수 양복을 맞추게 되었을 때는 녹색 양복을 입고 싶었다. 그러나 raxa(포-라사)점을 두루 다녔으나 녹색 양복 감은 눈을 씻어도 보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삐딱하게 바라보던 라사점 주인을 이해할 수 있다. 내가 무슨 연예인이 되어 무대에 설 것도 아닌데, 녹색 양복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겠다는 것인가?

아무튼 지금도 녹색이 좋다. 그런데 우리말에 푸른색이라면 청색(靑色)과 녹색(綠色)의 구분이 없다. 하늘도 푸르고 들도 푸르고, 바다도 푸르고 산도 푸르니 아이들 가르칠 때에도 헷갈린다. 파란색 불이 켜지면 안전하니까 건너가라 하면서도, 녹색이 분명한데 청색처럼 들린다. 하기야 한 때는 교통 신호가 청색이었을 때도 있었지 않은가? 청(靑)은 ‘푸를 청’ 자요, 녹(綠)도 ‘푸를 녹’ 자니까 한자를 알아도 헷갈린다. 영어 blue와 green, 일어 あお와 みどり처럼 분명했으면 좋은데, 그 많고 많은 우리말의 색깔 쓰임새 중에, 하필 푸르다는 말만은 흐리멍덩하다.

초목은 모두가 푸르다. 그래서 나무가 좋다. 푸르니까 나무가 좋은 것인지, 나무가 좋으니까 푸른색이 좋은 것인지 나도 모르겠다. 요즘 전 인류의 과제가 녹색혁명인 것 같다. 녹색 양복을 맞춰 입고 싶었던 내가 일찍이 평화의 사도요 녹색혁명의 선구자였는지 모르겠다. 우리나라도 지금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환이 절감 실하다, 녹색성장을 위해 3대 전략을 추진 중에 있다. 곧 ①기후 변화 적응 및 에너지 자립 ②신성장 동력 창출 ③삶의 질 개선과 국가 위상 강화이다.

요즘 여러 곳의 공원을 순례하면서 녹색 나무에 파묻혀 있다고 할까. 가는 곳마다 나무요 풀이요 꽃이다. 삶의 질을 개선하는데 이러한 綠陰芳草(녹음방초)․綠水靑山(녹수청산)이야말로 낙원이 아닌가?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생명나무가 자라고 있는 에덴동산(창 2:9)이나, 수정 같이 맑은 강 좌우에 철 따라 열두 가지 열매를 맺고, 만국을 치료하기 위한 잎사귀가 푸르른 천국(계 22:1〜2)과 비교할 수야 없지만, 녹음이 우거진 동산이 천국의 작은 모형 같다. 사하라 사막에서의 오아시스나 고비사막에서의 초원이, 그들 주민들에게는 지상의 천국이리라.

회개하여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복음의 기초다. 그러나 구원의 단계는 일반적으로 3단계로 설명하곤 한다. 회개하여 믿으면 의인(義認)의 단계라 하고, 신앙이 성장하고 중생하기 위해서는 날마다 성령의 도움이 필요한데 이를 성화(聖化)의 단계라 하며, 궁극적으로는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는 것인데 이를 영화(榮華)의 단계라고 한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성화의 단계에 이르는 것일까? 참으로 어려운 문제이다. 그런데 나는 무성하게 자라는 나무를 쳐다볼 때마다 ‘성령 충만’을 연상한다.

세계에서 가장 큰 나무는 무엇일까? 미국 Sequoia 국립공원의 세콰이어(sequoia)라고도 하고, 험볼트 레드우드공원의 아메리카삼(杉)이라고도 하며, 한편 호주 바우바우산의 유칼리나무라는 말도 있다. 아무튼 100m가 넘고, 2,3천 살은 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앞으로 얼마나 더 장수하여 성장할지 모르지만, 그들이 가장 먼저 천국에 입성할 나무인 것 같다. 우리의 신앙도 이만큼 성장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그 나무들 못지않게 光合成(광합성) 작용을 활발히 해야 하지 않을까? 모든 식물이 광합성작용으로 생명을 유지하고 성장하지만, 그 나무들은 무언가 특별했을 것이다.

나뭇잎의 葉綠體(엽록체)가 햇빛으로부터 에너지를 얻고,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와 뿌리로부터 수분을 흡수하여 有機化合物(유기화합물)을 생성하는 것을 광합성작용 또는 탄소동화작용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산소를 방출하고, 전분을 만들어 스스로 양분 삼아 자라나고, 열매나 뿌리․줄기에 저장한다. 우리도 위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에너지로 삼고, 기도를 이산화탄소 삼아 쉬지 않고 호흡하며, 뿌리로부터 기쁜 찬양을 흡수하여 광합성 작용을 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스스로 만든 양분으로 하늘까지 신앙이 성장하며, 한편 저장한 양분과 산소를 이웃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 이것이 성령의 9가지 열매가 아닐 것인가?

생태학상 나무는 생산자이지 소비자가 아니다. 스스로 양분을 만들어 성장․번식하며, 움켜쥐거나 훔치고 빼앗는 일 없이 오히려 나누고 섬기는 평화주의자지 제국주의자가 아니다. 이렇게 나무는 무엇 하나 버릴 것이 없다. 쉘던 실버스타인(Sheldon A. Silverstein)의 동화에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있다. 매일 찾아오는 소년에게 나무는 가지고 있는 것을 몽땅 내준다. 장성해서 집을 지을 때 재목으로 다 베어가도 마냥 기쁘기만 했다. 노년이 되어 찾아왔을 때는 이제 그루터기밖에 남지 않았는데, 거기에 앉아 쉬고 있는 모습을 보고도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이 나무가 바로 예수님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하고, 성령이 충만한 성화의 단계는 바로 이 녹색 나무를 닮아가는 것 아닌가 생각하기도 한다.

올해는 하는 수 없이 除濕機(제습기)를 사다가 습도를 낮추고 있다. 1시간 정도만 작동해도 한 대야의 물이 나온다. 놀라울 정도다. 곰팡이로 인한 짜증은 없어졌으나, 여전히 어둡다. 집안이 어두우면 우울해지는데, 전등을 켜놓을 수밖에 없다. 우리 집 앞의 커다란 나무들을 보면서 짜증이 나다가도, 제 구실을 다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한편 미안한 마음도 든다. 사람 살아가는 모습이 다 이러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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