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 쉬고 생각하고
지하철 2호선 뚝섬역에서 내렸다. 30℃를 오르내리는 뙤약볕과 도로 공사장을 지나게 되어 별로 유쾌하지 않았다. 그러나 공원에 들어서자 살촉이 송두리째 빠진 듯 햇살이 무뎌졌다. 평일 한낮이라 사람들로 붐비지 않아서 좋았다. 6 마리의 힘찬 군마상은 이전엔 경마장이었음을 말해준다. 35만 평이라 하니 어마어마한 공간이다. 뉴욕의 센트럴파크나 영국 하이든 파크 같은 공원으로 조성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이라니, 도심 속의 휴식 공간으로서 앞으로도 더욱 손질이 되리라. 다만 오르막 내리막 언덕 길이 없는 평지임이 몹시 아쉽다.
자연과 도심이 한데 어울려 흙길과 포장도로가 함께 나있어 좋다. 이 넓은 공원을 하루 두루 돌아보는 것은 아예 단념. 그래서 우선 가까운 PARK3 허브 농원․곤충 식물원․나비정원만을 둘러보기로. 요즘 곤충을 공부하는 손주가 생각났다. 오랫동안 잊혀진 곤충. 특히 갖가지 종류의 나비들의 생태가 서로 다른 것이 흥미로운데, 어느 두 분의 대화를 엿듣는 건 더욱 재미있었지. 전형적인 도시 출신인 듯한 분은 나비들의 짝짓기에 관해서는 전혀 까막눈이었고, 전형적인 농촌 출신인 듯한 분은 자신이 환생한 나비가 되어 실감나게 설명해 주는 것이었다.
왕광현의 러부레타는 둘둘 말린 편지 모양의 조형물. 점자를 비롯해 전 세계 95개 언어로 ‘사랑’을 뜻하는 문자가 씌어져 우뚝 솟아있다. 그래서 서울숲의 운치와 함께 사랑을 고백하는 장소로 인기가 있다는 것. 2시간 이상 걷고 보니 너무 힘들어 다음에 다시 오기로.
4개월 만인 가을에는 먼저 PARK1로 들어섰다. 깊이 3cm의 거울연못 앞에 섰다. 흐르는 물엔 얼굴을 비춰볼 수 없는데, 이건 연못 아닌 거울이다.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귀한 사람이냐?”
“너!”
맞다. 하나 밖에 없는 내가 희귀종이니 천연기념물이고말고. 그런데 운동모로 흰 머리를 감추고 젊은이 티를 냈지만, 얼굴의 잔 주름은 속일 수가 없구나. 내 얼굴에 반해서 이 명경지수(明鏡止水)에 뛰어든들, 발목도 잠기지 않은 요런 야트막한 연못에서 설마 나르키스처럼 수선화로 피어나겠는가?
자연과 잘 어울린 조각공원에는 16여 점의 작품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4점이 ‘바람’이 주제였다. 실체도 허상으로 거꾸로 보는 세상인데, 형체도 없는 바람을 형상화 하고 싶은 것이 예술인가? 바닥분수와 야외무대는 쉬고 있었다. 국내 최초의 어린이 전용 모래놀이터, 다양한 형태의 친환경 숲속 놀이터, 숲속의 실개천처럼 잘 꾸며진 물 놀이터는 소풍 온 많은 어린이들의 파라다이스. 워낙 넓어 오히려 한산한 느낌. 널따란 잔디밭은 뚝섬가족마당인데, 두세 가족들의 공놀이하는 모습만 멀찍이 보였다.
수변쉼터에서 잠깐 휴식. 넓은 호수 주위를 한 바퀴 돌고, 성수대교 아래쪽을 지나 PARK2로. 사슴우리에서 어린이들이 꽃사슴을 구경하는지, 꽃사슴들이 어린이들을 구경하는지...아기 사슴 앞에서 어린이들이 시글버글하다. 보행가교를 지나 계속 걸으면 한강수변공원에 당도하는데, 발걸음을 되돌리기로. 바람의 언덕에 올라 바람과 악수를 한 후, 바람과 수작하는 억새 길을 지나 드디어 생태 숲으로. 여러 가지 종류의 젊은 나무들이 낯선 나그네를 반겨준다. 한강을 어루만지며 불어온 강바람과 푸른 하늘을 쓰다듬으며 내려온 햇빛이, 이들을 사랑으로 끌어안은 때문일까? 나뭇잎들이 갓난아기 살결 같이 유난히 반들거리고 빛이 난다. 젊은 피톤치드를 수혈해주고 맑은 산소를 공급해준 탓이겠지, 쌓인 피로가 땀과 함께 한 순간 증발해버린다.
문득 하늘과 지평선이 맞닿은 광활한 사막을 횡단하는 탐험대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그들은 왜 그 곳을 걸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린 왕자’를 통해서 생택쥐페리가 말한 대로 어디엔가 우물이 숨어 있기에 사막이 아름답다고 노래했을까? 수변의 저 갈대처럼 모든 면에서 인간은 연약하지만, 파스칼은 명상록에서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겠다. 인간의 이성과 의지의 위대함을, 능력과 노력의 무한함을 확신하면서, 실증해보이겠다고 그들은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연 앞에서 한없이 맥없다. 황사의 피해국인 우리에게 자연 재해인 사막화 문제는 심각하지 않을 수 없다. 북한의 황폐화는 특히 그렇고.
다행히 우리나라는 6.25전쟁을 거치며 사막처럼 황폐화 되었던 산림을 되살린, 조림사업의 자랑스런 노하우가 있다. 그리하여 중국․몽골에 가서 조림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미국의 세계적 환경운동가 래스트 브라운은 한국을 세계 산림녹화의 모델로 소개했으며, 유엔환경계획 아킴 슈타이너 사무총장도 람사르총회에서 한국의 산림 복구는 세계적인 자랑거리라고 평가했다. 그래서 이번 ‘유엔사막화방지협약 제10차 당사국총회’가 우리나라 창원에서 열리게 된 것은 의미가 깊다. 한해 600만 ha의 사막화를 막자는 역대 최대 규모의 대책회의인 것이다. 이 시점에서 걷고 있는 이 녹색길이야말로 맑은 유리 같은 천국의 황금길이요, 이 푸른 나무들이야말로 생명수 강가에 심겨진 생명나무다. 이런 사색에 잠겨 사색의 길까지 지나왔다. 처음 들어왔던 길로 돌아온 셈. 온종일 이리저리 길 따라 어디론가 걸었지만, 결국 떠나왔던 곳으로 되돌아 왔구나. 그리고 또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우리 삶이란 이렇게 나아감과 되돌아옴의 되풀이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