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 쉬고 생각하고
뙤약볕이 쬐는 오후, 지하철 3호선 매봉역에서 내려 영동3교 아래로. 한창 무더운 시간 때문인지 산책하는 사람들이 드물구나. 다 죽어가는 꽃나무 한 포기 살려내는 것도 가슴 뿌듯하거늘, 죽었던 개천을 살려냈다니... 청계천과는 비교가 되지 않지만, 그런대로 맑은 개울물이 흘러 물고기 떼들이 노닐고, 아이들도 징검다리를 건너다니며 즐겁게 놀고 있다.
관악산과 청계산에서 발원하여, 강남구와 서초구의 북동쪽으로 흘러 탄천에서 합류하는 18.5Km라고 한다. 산책길을 따라 걷는데, 시원하게 뚫린 자전거 길로는 댄싱으로 자전거를 타고 쌩쌩 달리는 젊은이들의 건각이 아름답고 부럽다. 생태계가 복원되고, 야외 물놀이장도 두 군데나 있어 손자들도 벌써 다녀갔다고. 무더위에 지쳐 주마간산격으로 영동5교까지의 윤곽만 살펴보고, 오는 가을철에 다시 오기로 떠나왔다.
예정대로 5개월만에 다시 찾아왔다. 드높은 푸른 하늘 아래 울긋불긋 물들기 시작한 단풍이 곱다. 발맛사지 길을 지나 징검다리를 통해 건너편으로 갔다. 졸졸 흐르는 여울 속에서 송사리와 피라미들이 떼지어 헤엄을 친다. 냇가에는 여러 가지 수생식물이 무성하고, 양쪽 자전거길에는 각종 야생화들이 지천으로 피어있다. 그 위쪽 산책길에는 키 작은 관목들과 발돋움하는 나무들이 산책하는 이들에게 그늘을 서어비스하고 있다.
130 여 개의 다듬어진 바위들이, 물이 밭은 못에서 맨살을 내놓고 일광욕을 하고 있군. 바닥에도 반들반들 닳아진 돌멩이들이 바둑판처럼 박혀 있어 잔디밭처럼 뒹굴어도 좋을 것 같다. 영동4교 쪽 벼농사장에는 노랗게 익은 벼 이삭들이 추수를 기다리고 있는데, 청승맞게 서있는 허수아비들이 뻔질나게 드나드는 들쥐들에겐 못본 척 하는구나. 그들도 뇌물을 먹었나?
“해오라기다!”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건너편 냇가 풀섶에 어린 해오라기(?) 한 마리가 성큼성큼 걷다가 먹이를 잡다가 하는 게 아닌가? 숨을 죽이며 응시하였다. 아직 눈치채지 못한 듯 유유하다. 댕기 머리가 있는지, 쌍안경을 가져올 걸 퍽 아쉬웠다. 해오라기인지 아니면 왜가리인지...머리․목은 흰색이지만 몸뚱이가 회색인 걸로 보아서는 재두루미 같기도 한데. 자주 나타나는 것인지 모처럼 나타난 것인지, 아무튼 천연기념물이나 발견한 것처럼 흥분되었다. 나만의 보물을 간직한 채 한참 훔쳐보다가 살며시 자리를 비켜주었다.
영동3교를 지나니 바위만 엎드러져 있는 또 다른 마른 못이 있고, 나무데크 다리가 전망대 역할을 했다. 여기저기 계류폭포에서 맑은 물이 유입되고 있었지만, 송사리 외에 물속 식물과 곤충들은 눈에 띄지 않았다. 이곳에 아까 본 해오라기가 날아온다면 먹잇감이 있겠나? 발맛사지길을 통과 다음 징검다리를 건너는데, 다른 곳보다는 물이 깊고 물살이 세어 요란하다.
“잉어다!”
두 번째의 외침이다. 50cm 남짓 되어 보이는 잉어 한 마리가 큰 입을 벌리고 나를 반기는 게 아닌가? 가져간 과자 부스러기를 던져주었더니 냉큼 받아 먹는다. 두 마리 세 마리.....어떻게 알아차렸는지 자그마치 다섯 마리나 모여들었다. 먹이를 던져주는 일이 바빴다. 뻐끔 뻐끔. 양어장도 아닌데 요렇게 큰 잉어가 있다니 믿어지지 않았다. 간식을 모조리 빼앗겼지. 그래도 배가 부르다. 해오라기와 잉어를 본 것만으로도 참으로 흐뭇한 날.
아치다리를 건넜다. 이제 영동2교까지 왔다. 5층 계단식 폭포는 낙차 보(洑)인 셈. 개울 복판에 인공 섬도 마련해 놓았다. 영동1교까지 오는 동안 여러 운동 시설과 휴식 공간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었다. 대치역에서 양재역까지 세 역의 구간, 무려 3시간 남짓 걸었으나 발목과 무릎이 팍팍하지 않다. 자전거 길에는 젊은이들이 마구 페달을 밟아 쏜살같이 달리고 있구나. 뒤를 돌아보거나 멈추면 넘어지고 추월 당한다는 것이 젊은이들의 인생 철학이 아니겠는가? 나도 젊은 시절에는 그랬으니까. 계단을 두 계단씩 올라가야 직성이 풀리고, 일찍 일어난 새가 벌레를 잡는다고 잠조차 아까웠다. 한병철 재독 철학자가 지적한대로, 긍정주의 성과사회에서 내가 주인이면서도 나를 노예로 삼아, 혹사․착취하면서 ‘빨리 빨리’를 외치며 피로하게 뛰었지.
한편 산책길에는 나이 지긋한 분들이 쉬엄쉬엄 천천히 걷고 있다. 약간 땀이 날 정도의 운동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나도 요즘 느긋하게 걷는다. 步자는 止자와 少의 합자가 아닌가? 걷다가 앉아 쉴 줄도 알아야 젊어진다는 뜻이겠지. 그저 빨리 걷기만 하면 놓치는 것이 많다는 걸 나이 들어 깨달았다. 페스트푸드에 반대해서 여유식(Slow Food)으로부터 시작된 ‘느리게 살기 운동’에 의해서, 최근 슬로우 시티가 관심사다. 공해 없는 자연 속에서, 그 지역에서 나는 음식을 먹고 그 지역 문화를 공유하며, 자유로운 옛날의 농경시대로 돌아가자는 ‘느림의 삶’을 추구하자는 국제운동이 Slow City가 아닌가? 최근 내 고향에도 슬로우 시티가 마련되고, 대표적인 슬로우푸드가 청국장이란다. 천천히 걸으면서 아래쪽 낮은 곳을 굽어살피니, 작지만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들이 속절없이 사라져갔음을 과거엔 미쳐 깨닫지 못했지. 생태계 파괴의 물꼬를 뒤늦게나마 되돌렸다는 것은 새로운 창조보다 위대한 것 같다. 양재천은 이를 깨우쳐준 것이다. 썩어 다 죽어가는 개울을 되살려, 후손들에게 넘겨준 고마운 손길들에게 박수를! 문을 닫고 쉬고 있는 수영장 앞에서 내년 여름철에 다시 만나기로 기약하며 손 흔들어 작별.